-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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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구름빵^^
너에게 편지를 쓴다. 진작에 쓸 걸. 본의 아니게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가 돼 버렸구나. 금기의 대상으로만 여길 게 아니라 너와의 관계에 좀 더 관심을 가졌다면 내 청춘도 너도 한결 맛깔스러웠을 것을. 생을 주체하지 못할 때마다 네가 말벗이 되어 주었는데, 새해가 되면 으레 너를 작심삼일 레퍼토리에 넣곤 했었지.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게 너의 운명이었다고 치부하기엔 미안한 구석이 많구나.
그러나, 친구. 격하게 이별을 고해야 하는 내 처지를 이해해 줘. 마지막이야. 이제 너를 찾는 일은 없을 거야. 주린 배를 참다가 꿈결에 너를 만나는 일은 있어도 너에게로 또 다시 발걸음을 돌리는 일은 하지 않을 거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 했던가. 단숨에 목을 꺾을까 애정으로 봐줄 이에게 신병을 위탁할까 하다가 곤히 잠든 틈을 타 으슥한 곳에 너를 유기하기로 했어. 情理상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어둠 속에서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을 거니까 집 찾아 돌아올 생각일랑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역경을 헤치고 기어이 문지방을 넘어서겠다면 가냘픈 목이 남아나지 못할 거야. 결국 헌신짝이었던 거냐고? 내가 무엇이건대 남의 목숨 알기를 파리보다 못하게 여기냐고? 시퍼런 세치 혀 씨, 사랑한다고 말한 게 엊그제라고?
…(말문이 막힌다.) 그거 아니. 네가 나의 첫사랑이었다는 거. 지난 20여 년이 강렬했던 너와의 첫만남을 잊지 못한 되새김질이었다는 거. 너를 온 몸으로 느낀 후 어디를 가든 너의 품을 잊은 적이 없다. 날로 쇠잔해가는 아버지가 모든 걸 버리면서도 너만은 포기하지 못하는 걸 보고 진작 너의 마력을 알아봤다. 그래서 네 눈을 정면으로 마주한 적이 없었어. 에둘러 다녔지. 설악산 가는 고속버스에서 웬수떼기 친구놈들이 부추기지 않았더라면 20년 우리 인연은 없었을 거야. 우리가 처음 입맞추었을 때 넌 그저 심심풀이 땅콩이었어. 지루한 대관령 굽이 길을 잠시 잊고자 했던 거였지. 근데 웃기더라. 촌스러운 네 외모와는 달리 네가 속살을 드러냈을 때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은근한 체취가 잊고 있던 외할아버지네 골방 향수를 불러일으켰거든. 머리는 길에서 만난 인연이라 여겼는데, 손이 계속 너를 찾았다. 너와 입맞추면 머리가 멍해지고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래서 너에게 자주 연락을 했지. 너에게로 가는 횟수가 한 번에서, 다섯 번, 열 번으로 늘었다. 마음 같아서는 설렘이 열 배가 될 줄 알았는데 열 번을 합쳐도 한 번만 못한 적이 많더라. 너는 묘녀였다. 한 눈에 파트너가 지닌 욕망의 용량을 알아보고 정교한 피펫질로 사람을 감질나게 했다. 네가 몸 안 깊숙이 들어오면 시간이 정지된 듯한 환영에 사로잡혔다. 자연 ‘이 순간을 영원히’ 하고 싶을 때 너에게 손을 내밀었다. 덕분에 너는 미열이 내 뺨에서 가시지 않는 흔치 않는 장면들을 함께 했지. 물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묻고 싶은 장면에도 어김없이 넌 있었어. 생각해 보니 편도선 수술 때문에 각방을 쓴 보름 외에는 너와 떨어져 본 적이 없구나. 고백한다. 너는 나의 애인이자 친구이자 침묵을 채우는 독백이었다. 그런 너에게 이별을 고하는 내 맘을 헤아려봤니. “우리 그만 헤어져.” 모진 말 뒤에 500g에 불과한 심장을 향해 역류하는 아우성을 느끼니.
왜 그럴까. 쿨하게 비산하는 너의 영혼과는 달리 너와 나의 인연은 왜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걸까. 더군다나 내가 가장 사랑했던 이의 종말을 앞당긴 장본인이 넌데 말이야. 가장 사랑했던 이? 벌써 잊었니. 네가 폐 속에 심어놓은 종자가 엄마를 잠식했다. 너의 소행임을 뻔히 알고서도 나는 슬픔을 잊으려 또 너를 찾았다. 그래. 네가 추측한 대로 슬픔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불분명한 콩가루 관계를 정리하는 게 이 편지를 쓰는 이유일 수 있겠다. 하지만 간과한 게 있어. 너는 나의 청춘이었어. 스물 한 살에 너를 만나고 이십여 년이 지났어. 너를 보낸다는 게 뭔지 아니.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었음을 인정하게 됐다는 거야. 지나온 세월보다 다가올 미래가 더 빨리 흘러갈 거라는 거지. 솔직히 말하면 육체의 생기가 더 이상 너의 허무를 받아주지 못해. 꽃가루가 날리니 어김없이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코가 샌다. 코에서 시작한 염증이 눈으로 번졌다. 예전에는 없던 일이다. 이비인후과를 찾아갔다. “나이 들어서 그래요.” 의사가 전문용어로 그러더라. 질량보존법칙에 입각하야 시간이란 유한자원을 꼼꼼히 챙길 때가 됐음을 알게 됐다.
이제 알겠니. 너와 헤어지는 건 막연한 기대를 접는 거야. 하늘을 바라보는 희망 한 켠에, 저 아래 바닥을 의식하며 결코 멈추지 않을 생체시계를 장착하는 거지. 내가 아니어도 넌 행복하게 잘 살거야. 들끓는 힘을 주체 못하는 청춘들은 자라나기 마련이고 그들이 허무의 매력을 놓칠 리 없을 테니까. 넌 그들에 빨려 폐 속을 일주하다가 또 다른 이야기들을 품고 굴뚝 밖으로 퍼져 나가겠지. 이야기가 너 자신을 사르고 얻은 양식이 되었듯 내 생이 시간과의 협상에서 수지 맞는 물물교환을 얻어내길 기원해 줘.
친구, 이제 너를 보낼 게. 내 사랑. 행복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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