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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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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19일 17시 52분 등록

아우라지 강가에서

여송정 정자 아래로 솔숲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살갗을 타고 넘는 바람은 언제나 달았다. 난간으로 불거진 자리에 몸을 기대었다. 경사진 여울의 바위 틈을 비집고 흘러가는 강물이 소리를 내었지만, 처녀의 치마는 펄럭이지 않고, 곱게 빚어 넘긴 머리칼은 요동도 없다. 낯선 인기척에도 여량골 처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서 있다. 싸릿골로 동박꽃 구경을 가자던 이는 애타는 발걸음만 동동거리고, 야속한 강물은 더는 알은 채도 하지 않는다. 야속한 하늘을 원망하고 무심한 강물을 탓해서 무엇하랴만.. 뱃사공마저 보이질 않는다. 지장구 아저씨는 어데를 간 것일까.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이히요~오 아리라앙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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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마디마다 굽어진 구절리를 돌고 돌아서 흘러온 송천이었다. 뼈마디 속 깊이 박힌 그리움을 누가 알랴.. 골지천은 또 그렇게 아우라지로 흘러든다. 다르게 흘러왔지만 골짜기 돌아가면 있을 것만 같은 그리움이 둘을 하나로 어우러지게 한다. 그래서 ‘아우라지’라고 불렀다. 속절없는 강물은 서로를 탐하며, 몸을 섞어 요동을 친다지만, 불어난 물길에 애만 태우는 동동걸음 사연을 더는 귀담아 들으려하지도 않는다. 여량리 처녀는 이제 울지도 못한다. 그저 마포나루까지 천리 물길을 따라 간 그리움만 기다리고 서 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쉽게 발을 떼지 못하였다. 급한 여울목을 넘어온 강줄기가 자꾸 맴을 돈다. 하루 해걸음이 유난히 짧다. 예전에 놓였었다던 섶다리는 흔적도 없고, 돌다리도 불어난 물길에 제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새로 난 다리 가운데로 커다란 초승달이 하나 걸렸다. ‘오작교’라고 했다. 그 길로 헐하게 강을 넘나들게 되었다. 이제 강물이 불어나도 애닳아 사공을 찾지 않아도 되고, 더는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뗏목을 엮어 굽이굽이 골진 강을 따라 떠나지 않아도 된다. 더는 떠날 사람도 없는데, 떠나보낸 마음은 아직껏 되돌아오질 않고 있다. 또 다시 골짜기를 따라 솔숲 사이로 바람이 부-운다.

옥산장은 이미 만원이었다. 수원에서 온 단체 관광객들과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실려 제법 소문이 난 이후로 그녀의 수석들을 눈요기 삼아, 하룻밤 짧은 인연을 맺으려는 발길들이 줄을 이었다. 누구에게는 죽을만큼 힘들었던 시절의 이야기도 정작 듣는 이에게는 가벼운 호기심거리로 들리나보다. 오늘밤 옥산장에 내가 묵을 자리는 없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길은 아우라지역으로 이어졌다. 어름치 두 마리가 어둠을 틈타 사랑놀음을 벌이고 있다. 절정의 순간인가 보다. 어느 것인지 암컷이고, 수컷인지 모르겠지만 두 마리 모두 입을 쩌-억 벌리고 금방이라도 몸을 부르르 떨 것만 같았다. 한기가 느껴졌다. 나긋한 고단함이 밀려오기 시작하고, 허기도 졌다. 역 앞에 허름한 여인숙을 찾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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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옹심이 콧등치기

“어데서 왔드래요?”
맞은 편 식당의 미닫이를 열고 들어서는 내게 잔부터 건네며 대뜸 묻는다. 사내는 벌써 두 병째 소주를 비우고 있었다. 얼떨결에 잔을 받으며, 전주에서 왔다고 했다.
“멀리서도 왔네요.. 혼자서 왔드래요?”
그도 혼자였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근방에 사는 단골손님쯤 되나보다. 식당 아주머니를 누님이라 부르는 사내는 혼잣말인지 들으라는 말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초저녁 내내 늘어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시큰둥한 아주머니의 표정 속에서 짐짓 그의 지루한 삶이 보였다. 술을 따라주며, 그의 세월들이 내 목구멍으로 삼켜지기 시작했다. 안주라고는 달랑 고들빼기 하나뿐이었고, 테이블 두 개가 고작인 작은 식당이었다. 아주머니가 술잔을 하나 더 내어놓고, 젓가락을 놓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뭘 먹을 것인지를 묻는 눈치였다. 무얼 먹어야 할지 몰랐다. 곤드레밥. 콧등치기. 감자옹심이. 그리고 올챙이 국수. 식당 벽에 붙은 낯선 이름들을 하나씩 씹어보다가 ‘콧등치기’를 주문했다. 사내가 또 참견을 한다.
“우리 누님이 해주는 콧등치기는 정선 땅에서 최고예요.”
아주머니가 양은 바가지에 물을 부어가며 메밀반죽을 하는 사이, 사내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진다. 뒤죽박죽. 혀가 풀린 사내의 말은 젊은 시절 전주 근처로 노가다를 다녔다가 광산에서 탄부를 했다가 금새 아우라지에서 물질을 했던 이야기로 넘어갔다. 좁은 식당 안에서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말의 고삐를 쥐어잡기가 숨이 찼다. 마치 낡은 테이프가 되감겼다가 아무데서나 시작하듯이 사내의 말에는 앞뒤도 없고, 걸리면 걸리는 대로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를 반복했다. 밤새 틀어놓은 테이프처럼 시간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전주 양반은 사발탱수 잡사 봤드래요? 쌔리미는요?”
귀에 설은 물고기들 이름에 내가 관심을 보였나 보다. 술기운에도 사내는 다시 기운차게 순간을 낚아챘다. 그는 물고기 하나하나의 생김새와 주로 잡히는 곳,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또 언제 먹어야 제 맛이 나고 어떻게 해먹어야 하는 지를 줄줄 꿰었다. 메자. 돌바가.. 꺽데기.. 꾹저구... 한 마리씩 요리가 끝날 때마다 술잔이 비워지고, 사내는 입맛을 다셨다. 작은 테이블 위에 소주 한 병이 더 비집고 들어섰다.

콧등치기가 따라 왔다. 사내도 아주머니도 저녁을 먹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 그릇을 주문했지만, 콧등치기는 세 그릇에 나누어 담겨있고, 둥근 의자를 끌어다가 아주머니도 앉았다. 이제 테이블에는 셋이다. 잘게 썰어낸 갓김치를 풀어먹는 콧등치기는 젓가락에 착착 앵겨 감겼다. 사내의 이야기도 잠시 멈췄다. 메밀, 감자 그리고 옥수수를 빼고 강원도 땅 맛을 말할 수 있을까. 몇 가지 밖에 나지 않는 박한 땅이었지만, 굳은살 박힌 아낙의 손끝에서 나오는 맛이 가지가지였다. 그저 그렇고 그런 삶도 사내의 입에서 제법 그럴듯한 소설로 되살아 났다. 세월의 힘일까. 아니면 낮이 짧고, 밤이 긴 외로움을 꿋꿋이 살아낸 사람들만 그럴 수 있을까. 콧등치기 메밀가락이 후루룩 거리는 소리가 하나로 길게 이어졌다. 멀리서 아우라지 물길이 밤새 부둥켜 안고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견디기 힘든 밤이었다.

IP *.1.1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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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1.05.20 10:41:51 *.236.3.241
네가 그동안 강에 대해 쓴 칼럼 읽어 보면,
몰입이 잘 되는 글은 특징이 있어.

'만경강 백리길' 첫 마디에 '아버지'란 모티프가 나오는데
그 정서가 글의 끝까지 함께 하면서 독자와 공감을 일으켜.

쉬리, 서호납줄갱이, 미꾸라지- 서술속에 사건이 있어.

근데 이글은 강의 이미지를 따라 서술이 흐르는데 건더기가 잘 잡히지 않는다.
아우라지 한 소재로 A4 10장이상을 쓴다고 하면 독자의 관심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소설 쓸 때처럼 구조를 가지고 써야 할 듯. 나중에 수정한다고 하지만
구조를 바꾸기는 힘드니 당겼다 풀었다 강약 조절을 할 포인트를 곳곳에 설정하고
사건을 삽입해서 긴장도를 높였으면 ㅎㅎ

예를 들면 여인숙 장면을  '떠도는 삶'이란 모티프와 결합해 글 전반부에 배치하고 그 정서로
글을 이끌어가는 건 어때. 

전체적인 코멘트는 아우라지 편 다 읽고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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