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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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옹심이 콧등치기
“어데서 왔드래요?”
맞은 편 식당의 미닫이를 열고 들어서는 내게 잔부터 건네며 대뜸 묻는다. 사내는 벌써 두 병째 소주를 비우고 있었다. 얼떨결에 잔을 받으며, 전주에서 왔다고 했다.
“멀리서도 왔네요.. 혼자서 왔드래요?”
그도 혼자였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근방에 사는 단골손님쯤 되나보다. 식당 아주머니를 누님이라 부르는 사내는 혼잣말인지 들으라는 말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초저녁 내내 늘어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시큰둥한 아주머니의 표정 속에서 짐짓 그의 지루한 삶이 보였다. 술을 따라주며, 그의 세월들이 내 목구멍으로 삼켜지기 시작했다. 안주라고는 달랑 고들빼기 하나뿐이었고, 테이블 두 개가 고작인 작은 식당이었다. 아주머니가 술잔을 하나 더 내어놓고, 젓가락을 놓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뭘 먹을 것인지를 묻는 눈치였다. 무얼 먹어야 할지 몰랐다. 곤드레밥. 콧등치기. 감자옹심이. 그리고 올챙이 국수. 식당 벽에 붙은 낯선 이름들을 하나씩 씹어보다가 ‘콧등치기’를 주문했다. 사내가 또 참견을 한다.
“우리 누님이 해주는 콧등치기는 정선 땅에서 최고예요.”
아주머니가 양은 바가지에 물을 부어가며 메밀반죽을 하는 사이, 사내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진다. 뒤죽박죽. 혀가 풀린 사내의 말은 젊은 시절 전주 근처로 노가다를 다녔다가 광산에서 탄부를 했다가 금새 아우라지에서 물질을 했던 이야기로 넘어갔다. 좁은 식당 안에서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말의 고삐를 쥐어잡기가 숨이 찼다. 마치 낡은 테이프가 되감겼다가 아무데서나 시작하듯이 사내의 말에는 앞뒤도 없고, 걸리면 걸리는 대로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를 반복했다. 밤새 틀어놓은 테이프처럼 시간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전주 양반은 사발탱수 잡사 봤드래요? 쌔리미는요?”
귀에 설은 물고기들 이름에 내가 관심을 보였나 보다. 술기운에도 사내는 다시 기운차게 순간을 낚아챘다. 그는 물고기 하나하나의 생김새와 주로 잡히는 곳,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또 언제 먹어야 제 맛이 나고 어떻게 해먹어야 하는 지를 줄줄 꿰었다. 메자. 돌바가.. 꺽데기.. 꾹저구... 한 마리씩 요리가 끝날 때마다 술잔이 비워지고, 사내는 입맛을 다셨다. 작은 테이블 위에 소주 한 병이 더 비집고 들어섰다.
콧등치기가 따라 왔다. 사내도 아주머니도 저녁을 먹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 그릇을 주문했지만, 콧등치기는 세 그릇에 나누어 담겨있고, 둥근 의자를 끌어다가 아주머니도 앉았다. 이제 테이블에는 셋이다. 잘게 썰어낸 갓김치를 풀어먹는 콧등치기는 젓가락에 착착 앵겨 감겼다. 사내의 이야기도 잠시 멈췄다. 메밀, 감자 그리고 옥수수를 빼고 강원도 땅 맛을 말할 수 있을까. 몇 가지 밖에 나지 않는 박한 땅이었지만, 굳은살 박힌 아낙의 손끝에서 나오는 맛이 가지가지였다. 그저 그렇고 그런 삶도 사내의 입에서 제법 그럴듯한 소설로 되살아 났다. 세월의 힘일까. 아니면 낮이 짧고, 밤이 긴 외로움을 꿋꿋이 살아낸 사람들만 그럴 수 있을까. 콧등치기 메밀가락이 후루룩 거리는 소리가 하나로 길게 이어졌다. 멀리서 아우라지 물길이 밤새 부둥켜 안고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견디기 힘든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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