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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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청춘의 노래
나는 대체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다. 내가 꼭 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에도 흥미가 없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만이 내 마음을 잡아끈다. 조금만 지루하거나 힘들어도 ‘왜 내가 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는 의문이 솟구치는 일 따위에는 애당초 몰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도 조금 더 소진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 청춘의 문장 (김연수) -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낄낄거렸다. 지나간 청춘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라 아련하면서도 유쾌했다. 의문이 들었다. 나에게도 청춘이 있었던가? 내 청춘의 문장은 무엇일까?
인생의 시련을 공부로 극복하여 아이비리그 대학에 수석 입학하거나, 돈 한푼 없이 세계여행을 하면서 지구촌 친구들을 사귀거나, 하다 못해 연애라도 실컷 해봤으면 청춘의 기억이 좀 더 풍성했을텐데...기껏 생각나는 것은 대학 등록금으로 받은 수표를 맡기고 술을 먹었던 치기어린 기억과, 경춘선을 통학열차처럼 애용하면서 강촌과 가평으로 놀러다녔던 기억들만 떠오른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게도 인상깊었던 청춘의 장면이 있긴 있었다. 그건 지리산 여행에 대한 추억이었다.
1.
스물 다섯 살, 불같이 더운 8월의 저녁이었다. 학교 잔디밭에서 시원한 막걸리를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성당친구 다섯 놈이 찾아왔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었다. 어떻게 알고 찾아 왔을까? 물어보니, 내가 학교 잔디밭에서 술 먹고 있을거라 짐작하고, 학교를 이 잡듯 뒤져서는 찾아낸 것이다. 그러더니, 술에 취해 있는 나를 끌고 서울역으로 데려갔다. 그날 밤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지리산에 가자는 것이었다. 그냥 가보고 싶으니, 밤 11시에 출발하여 새벽에 도착하는 기차를 타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미친 놈들을 봤나!” 하고 욕을 하면서 나는 좋아라 따라갔다. (원래 미친놈들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여름 휴가철이라 표는 입석밖에 없었는데, 막상 기차에 타보니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서 있기도 힘들었다. 밤새 서서 가는 투혼을 발휘하기엔 1차에서 먹은 막걸리가 너무 과했다. 밤 12시가 넘어가자, 나는 선 채로 술주정을 부리는 묘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안되겠다고 생각했던지, 그 좁은 기차안에서 내가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앞좌석과 뒷좌석의 등받이가 서로 등을 맞대면서 만들어내는 삼각형 모양의 아래 공간..그 좁은 바닥에 신문을 깔고 들어가 누워서 잤다.
눈을 뜨니 구례역이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여름 장마를 입증하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린 버스터미널 옆 가게에서 빵과 사발면을 샀다. 구멍가게 지붕아래에서 내리는 비를 쳐다보며, 빵을 김치삼아 사발면을 아침으로 먹었다. 산을 올라가긴 가야 하는데, 우산이 없었다. 친구들은 구멍가게에서 비닐을 사왔다. 비닐을 네모나게 자르고, 각자의 머리통 크게에 맞추어 구멍을 뚫었다. 흥부네 집 옷 같은 그것이 비옷이란다. 지금 생각해도 “완전 어이없음” 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구멍 뚫린 비닐옷으로 완전무장을 하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몸이 젖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어깨에 맨 기타가 젖는 것에 더 신경이 쓰였다. 그렇게 생애 최초의 지리산 여행을 시작했다.
준비없이 간 지리산은 무서웠다. 청춘이라는 이름이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나는 지리산 여행자라는 느낌보다는, 산 속에 숨어사는 빨치산이나, 어떤 상황에서도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살아가는 특수부대 요원이 된 느낌이었다. 2인용 텐트에 4명이 눕고, 1인용 침낭에 둘이 들어가서 잠을 청하는데, 비는 쏟아지고, 바람은 무서운 소리를 내며 밤새 불어댔다. 준비해간 술도 없고, 술 살 돈도 없어, 얻어 온 소주 반병에 물을 타서 여섯 명이 나눠 마시는 눈물겨운 우정으로 그 시간을 보냈다. 여행을 끝내고 집에 왔을 때, 나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의 의미를 한달 동안 감미롭게 음미했다. 살아가는 일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라고 내가 긍정하는 이유는, 아마도 25살 지리산 여행이 준 선물 때문일 것이다.
2.
두번 째로 지리산을 가게 된 것은,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그 노래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20대 후반, 나이 서른이 다가오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대해 할말은 많았으나, 대답없는 세상에 계속 메시지를 발신하는 것은 젊음의 에너지로도 쉽게 지치는 일이었다. 친구들과 서울을 떠나기로 했다. ‘새해 일출을 지리산에서 맞이하자.’ 는 것이었다.
12월 31일 저녁, 봉고 뒷좌석에 골판지를 깔고 담요를 덧 깔았다. 소주 한 박스, 새우깡을 기본으로 한 과자 안주, 화투, Guitar, 고급안주인 고등어 캔까지.. 앞뒤 재지 않고 충동적으로 떠나기에는 더없이 간편한 것이 젊음이다. 노래 한곡 뽑고, 소주 한잔 하고, 노래 두곡 부르고, 두잔 털어놓고, 어설픈 여자애기, 잠시 화투를 치다가 다시 술판을 벌리고 또 노래부르는 시간..몇 시간이 흘렀는지,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봉고차를 운전하는 한 놈만 희생하면 아무 문제가 없었으니까. 그 때는 ‘술타령’ 이라는 시도 읆으며, 낄낄거리곤 했다.
[술타령]
날씨야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입나
술 사먹지
새벽 3시경 지리산에 도착했다. 일출시간을 기다렸다가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걷어가며, 노고단으로 올라갔다.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는 표현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리산의 겨울바람은 매섭다. 봉고차 뒤에 널린 소주병의 숫자만큼 얼굴에는 취기가 가득했고, 우리는 일출을 보기 위해 두꺼운 파커와 목도리로 얼굴을 칭칭 동여매고, 인생의 순례자처럼 어두운 새벽 눈길을 걸어 올라갔다.
1월 1일 새해였다.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는 눈덮인 지리산, 위대한 아침이다. 간밤의 숙취도 바람에 날려갔다. 기타를 꺼내들었다. 추위에 곱은 손을 펴며 남자 여섯명이 합창을 했다. 지리산에서는 지리산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 안치환의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를 목청껏 불러댔다. 이 노래는 “딩기리, 딩기리~” 소리를 내는 이른바 ‘말달리기 주법’으로 기타를 쳐야, 제 맛이 난다.
“눈보라 몰아치는 저 산하에 (딩기리, 딩기리~) 떨리는 비명소리는 (딩기리, 딩기리~)
누구의 원한이랴! 침묵의 저 산...~~~"
마치 빨치산이 된 듯한 비장함에 사로잡혀, 감정 잔뜩 잡고 노래를 부르는데, 문득 태양이 떠올랐다. 새벽의 찬 기운과 요상야릇한 구름덩이들이 웅성웅성 퍼지더니, 갑자기 노랗기도 하고 뻘건 덩어리가 쑤~욱 튀어나온 것이다.
“어..저거..저거..”
잠시 모두들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5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주변이 빛나기 시작했다. 산 정상과 산 허리로 퍼져나가는 태양빛의 세례를 받아, 온 천지가 노르스름한 주홍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주변에 서 있던 친구들의 얼굴 뒤로, 성인의 광채처럼 빛나는 기운들이 보였다. 멋진 광경이었다. 한숨같은 탄식과 함께 몽환적인 느낌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한 놈이 나직하고 감동어린 음성으로 소리쳤다.
“야..정말 가관이다.”
“뭐?”
“뭐야?”
잠깐 귀를 의심했다. 다른 친구들도 한꺼번에 그 친구를 쳐다보았다. 그놈은 이 장엄한 광경을 나보다 더 황홀하게 느끼는 놈이 있느냐는 듯, 우리를 쳐다보며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일출 정말 멋지지 않냐..야 정말 가관이다”
봉고차를 운전하던 친구였다. 어렸을 때 잘못 복용한 한약의 부작용이라고 본인은 열심히 주장하지만, 어쨌든, 귀가 잘 들리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다 보니 말도 짧은 친구였다. (겨울연가의 최지우처럼 '실장님'을 '실땅님'으로 발음한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취업이 잘 되지 않아서 운전으로 밥벌이를 하면서, 귀의 장애와 혀 짧은 말에 대해 콤플렉스가 있던 친구였다.
그놈의 얼굴을 보니, “야,,정말 장관이다” 라는 의미를 표현한 것인데, 어휘 선정을 잘못한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본인은 뭐가 틀린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우린 모두 쓰러졌다. 우리 모두를 감동시켰던, 그 장엄하고 비장한 지리산 노고단에서, 새해의 ‘장관’을 ‘가관’으로 변신시켜 준, 친구의 언어전환 능력에 탄복하며, 눈 위에서 배를 잡고 굴렀다. 웃음이 지나치면 숨쉬기가 곤란해지고, 눈물이 나오다가, 배와 등의 근육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그 친구의 이름은 ‘가관’이 되었고, 한동안 ‘가관’이라는 말은 친구들과의 대화 중심어로 등극했다.
아름다운 노래를 들으면 “야..이 노래 가관이다!”
예쁜 여성이 지나가면 “야..저 여자, 정말 가관인 걸!”
맛있는 삼겹살을 먹다가도 소리쳤다. “야, 이 삼겹살! 맛이 정말 가관 아니니?”
#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 청춘의 문장 / 김연수 -
지리산 일출 퍼포먼스는 그 후로 3년 동안 지속되다가 결혼을 하면서 멈추었다.
이후, 20년이 넘도록 한 번도 지리산을 가보지 못했다. 직장생활과 결혼생활에 적응하기에도 너무 바빠서 그랬지만, 지리산의 ‘가관’은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내 청춘의 명장면’이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쳥춘이 뭘까?
유끼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청춘이 뭐라고 생각하니?’
재치있는 대답들이 돌아왔다.
박미옥 : “데는 걸 겁내지 않는 치기?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
김연주 : “청춘은 벚꽃이다.”
이선형 : “꿈꾸니까 청춘이다.”
이은주 : “아주 시시한 일을 해도 재미있다고 느낄 때가 청춘이다.”
박경숙 : “청춘은 봄이다, 너는 봄이다. 고로 너는 청춘이다”
박상현 : 긴 내용을 마음대로 축약하면 안될 것 같아서, 전문을 커뮤니티에 올렸음.
내게 청춘은 바이러스다. 지난 2주간 지독한 감기에 시달렸다. 지나 간 청춘을 생각하니, 웃고, 떠들고, 아쉽고, 애잔하고, 피가 끓어오르고, 사랑하고, 꿈꾸고, 눈물 흘리고, 서럽던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인간의 노화는 지력이나 체력에 앞서 감정부터 늙어간다. 눈물이 메마르고, 웃음이 없어지며, 꽃을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면, 그땐 늙어간다는 것이다. 청춘은 나이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모든 감정이 죽어버리면 청춘 또한 죽어버릴 것이다. 청춘은 질병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바이러스) 일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시절
청춘은 치기와 객기로 똘똘 뭉쳐, 아무 준비도 없이 산을 오르는 무모함이었다.
늘 어디로 가야 하는지 주저하는 시간들이었지만,
일단 차를 타고 가야 할 목적지가 정해지면, 그 안에서 목청껏 노래하고 웃고 떠드는 것이다.
새벽의 눈길을 올라가며, 어둠이 주는 두려움을 껴안는 것이고,
장엄한 일출의 광경을 보면서, 세상의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 멋진 ‘장관’이 ‘가관’이 되면 어떠하리!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찰리 채플린은 말했다.
김연수의 말대로, 삶이란 정답표가 뜯겨나간 문제집과 비슷하다.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게 정말 맞는 것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살아보니, 별거 없더라.’ 말하는 누군가의 지적은 각자의 경험치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겠지만, 나도 한 가지는 말 할수 있을 것 같다.
지나간 아쉬움만 그리워하며 사는 것은 우리가 청춘에 살지 못하는 것이다.
지나간 청춘만 그리워 하며 살기엔 남은 생이 너무 아까우니까...
그 좋은 청춘! 생이 다하기 전에 내가 그리워 할 수 있는 ‘추억의 명장면’을 만들어 내는 것이 지금, 청춘을 사는 것이다.
청춘
내 잔에 넘쳐흐르던 시간은
언제나 절망과 비례했지
거짓과 쉽게 사랑에 빠지고
마음은 늘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어
이제 겨우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너는 웃으며 안녕이라고 말한다.
가려거든 인사도 말고 가야지
잡는다고 잡힐 것도 아니면서
슬픔으로 가득 찬 이름이라 해도
세월은 너를 추억하고 경배하리니
너는 또 어디로 흘러가서
누구의 눈을 멀게 할 것인가?
- 황경신 -
p.s 노래의 원래 제목은 ‘사춘기’였는데, 컬럼을 쓰면서 ‘청춘’으로 바꾸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며 살고 싶었던’ 지금도 끝나지 않은 '청춘'의 노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