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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26일 07시 15분 등록

느릅나무 이백년 살이

얼추 이백년쯤 될까싶더니, 이백 삼십 년을 살았다. 강원-정선-23 고유번호를 단 느릅나무였다. 멀리서 볼 때는 두 그루 같이 보였는데, 가까이 보니 밑 둥지에서 가지가 갈라진 한 그루였다. 떠나고 싶어도 뜨지 못하고, 한 자리만 지키고 서서 골짜기 굽어 멀어지는 강물 쪽으로 긴 목을 빼고 있었다. 그 그늘아래 할머니 두 분이 한발 앞서 햇볕을 쪼이러 나왔다. 장이 서는 날인데도 구경나가기조차 힘들 정도로 걸음이 불편해 보였다. 서로 초면인듯 싶었다. 둘은 서로 이름도 묻지 않고, 나이 먼저 물었다. 이제 이름 불리우는 것도 기억하는 일도 쉽지 않은 듯 싶었다. 아흔 한 살 그리고 여든 세 살. 서로를 할머니 그리고 아주마이라고 불렀다. 아흔 한 살의 백발 할머니는 꽃분홍 조끼를 입었고, 여든 세 살의 아주마이는 지팡이를 짚고, 스카프로 머리를 감고 있었다. 이백하고도 삼십년 살아온 느릅나무는 올해도 초록빛 잎을 내고 있는데, 그 그늘 밑에 두 여인은 말끝마다 죽고 싶다고 했다.

처녀 시집 안 간다는 말과 노인 죽고 싶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하던데.. 진짜 거짓일까. 호기심이 일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열세 살 정선으로 시집올 때부터 시작했다. 일본시대 색시공출을 한다길래, 그거 피할라고 나이를 속이고 아버지가 서둘러 보낸 시집을 왔단다. 맘 못 붙이고 읍내 기생집으로만 돌던 남편도 십 수 년 전에 먼저 갔고, 23년 동안 광산에서 일하던 아들도 진폐로 폐암판정을 받더니만, 몇 해 전에 앞질러 세상을 떳단다.
“지금 붙어사는 막내아들 며느리가 얼마나 귀찮겠어?”
이렇게 물으며 한 토막을 쉬기까지 할머니의 말은 끊기지 않았고, 기억하는 숫자도 정확했다. 듣고 또 들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또 몇 차례를 반복했을까 싶기도 했지만,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이번에는 여든 세 살 아주머이가 말을 받았다.
“너무 아프니까 사는 것도 귀찮아요.. 목숨은 붙어 있고, 아침마다 눈 떠진 것이 무서워요.
겨울에 나오면 넘어진다고 꼼짝도 못하게 해요. 류마치 관절이라데요. 할머니도 관절이래요? 씻기 싫어서 비닐장갑을 끼고 다니는데, 손마디가 너무 굵어져서 아파요.”
“예전에는 고래장도 했다는데, 요새는 그런 거도 안하나 싶어요.. 차라리 그래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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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하나가 다 타들어갔다. 모래찜질이라도 하면 좀 덜 아프지 않겠냐는 할머니의 말을 넘겨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저 앞에 쯤 산 아래 장례식장이 딸린 정선병원을 지나쳐 강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름이 재미있었다. 강원 산소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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