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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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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26일 07시 18분 등록

하늘... 다리에 이르는 길

사내가 하늘벽 유리다리 이야기를 꺼냈다. 인터넷을 검색해도 사진이 뜨지 않고, 그저 전하는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꼭 들러보고 싶다며, 같이 갈 거냐고 물었다. 어차피 내친걸음이었고, 딱히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마침 부부는 카메라를 집에 두고 오는 바람에 인증샷 찍어줄 사진기사가 필요하기도 했고, 나 또한 차 딸린 운전기사가 필요했다. 무엇하나씩 부족한 여행길에서 우리는 쉽게 길벗이 되었고, 떠나온 길 위에서 사람들은 헐하게 말벗을 삼았다. 차가 고성리 가는 갈림길에서 산 위로 잡아채더니 버스도 다니기 힘든 거북이 길을 기어서 올랐다. 사람발길 닿기도 힘들어 보이는 산허리 춤에서 차가 열을 내기 시작하더니, 내리막길로 접어들자 고약하게 타는 냄새를 풍겼다. 과수원 옆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고향 같은 동강의 길 끝에도 봄소식이 닿아 있었다. 복사꽃이 피고, 밑으로 초록의 대지 위에 민들레가 그득하게 박혀있다. 햇볕을 머금은 노란 보석들이 부서지고 있었다.

어찌어찌해서 얽힌 실 같은 길을 마저 감았지만, 거북이 마을로 들어가는 연포다리에서 절벽을 만났다. 동강은 더 이상을 허락하기 싫었는지 저만치 눈길 끝에서 치맛자락 감아쥐듯 휙하고 돌아 숨어버렸다. 오늘 아침 백룡동굴에서 건너 왔다는 사내들 서넛이서 수군대고 있었다. 씁슬한 입맛이 개운치 않아 보였지만 차를 가지고는 더는 갈 수 없는 길이었다. 하늘벽 유리다리는 온전한 두 다리로 품을 들여야 하는 길이었다. 그저 짧은 눈길을 주고 스쳐가려는 뭇 사내들에게는 열어 보이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길은 저고리 앞 고름같이 야무지게 홀쳐 있었다. 가진 것 죄다 버리고, 세상 일을 모두 잊고, 적어도 하룻밤을 묵어가겠다는 마음 없이는 어려워보였다. 서로 가야할 길이 정해지자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간단히 적은 이메일 주소로 사진을 보내주겠다는 말을 건네자 차는 왔던 길을 되돌아 연포다리를 건넜다. 짧은 만남은 헤어짐도 쉬웠다. 늘 먼저 뒷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기에 많은 인연들의 뒷모습들이 봐야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라진 자취를 더듬어 갔다. 연포분교 김봉두 선생은 또 서울로 출장을 나간 모양이다. 학교는 문도 없이 열려 있었지만, 교실로 들어가는 입구는 굳게 닫혀 있었다. 몇 걸음 앞에 교육청에서 알리는 입간판 하나가 손님을 맞았다. 1.. 6.. 9... 1969년 1월 1일 개교해서, 1999년 9월 1일 폐교를 했고, 다녀간 학생수가 169명이었다. 이농현상이 이유였다. 문득 아들생각이 났다. 69년 1월이면... 내가 태어났을 즈음이고, 99년 9월이면 막 그 녀석이 태어난 뒤였다. 아이는 내가 나온 국민학교를 다니는 초딩 6학년이다. 한 때는 5천명까지 되었던 학생이 지금은 고작 250명 남짓 된다.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심 한복판에 있는 학교이니, 이농이 이유가 될 것은 아닌데.. 아이들은 다 어데로 간 것일까. 김선생을 따라 서울에 출장이라도 간 것일까. 금방이라도 “선생님요..”라고 부르며 나올 것만 같은데.. 그네도 시소도 없는 텅 빈 운동장으로 나무 그림자 하나가 울타리를 넘어 기어들어왔다. 더는 김선생을 기다려도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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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하나를 지난다. 보기도 드문 빈 집이다. 포장이 안 된 길이지만 전봇대가 아직 가느다란 실핏줄을 잇고 있는 걸 보니 분명 누군가 아직 살아 남아 있을 것이다. 강변에는 왠지 미루나무가 있어야 할 것만 같다. 고향집을 찾아 좁은 길을 따라 걸을 때면, 으레껏 게으른 소울음 소리가 들리고, 멀리 서너 그루쯤 미루나무가 있어야만 고향 같다. 매미소리가 아직 이른 5월이라면, 살픗 지나는 바람일망정 부서지듯이 호들갑스럽게 손을 흔들던 기억이 난다. 그런 나무 한 그루 정도는 서서 언제든 나를 기다리고 있어줘야만 할 것 같다. 능금꽃 같은 두 볼을 잘강잘강 씹어 먹고 싶던 분이는 그 길을 지나 보따리 하나 안아들고 야반도주를 했다. 이름깨나 있는 상급학교에 다니던 을손이가 털 뽑힌 수탉신세가 되어 집으로 쫓겨 들었던 길이었다. 짝사랑하던 박록주에게 거절당한 실연의 상처를 안고, 들병장수들을 찾아 떠돌던 유정도 이 길을 지났을지 모를 일이다.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길을 따라 흩어진다. 자꾸만 떠나간다.

당췌 사람 꼴이라고는 보일 것 같지 않던 길도 얼마 남지 않았다. 강 건너에서 줄 배 하나가 다가온다. 사람이었다. 줄을 끄는 것도 강을 건너는 이도 분명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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