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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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보니 나이 든다고 사람이 모두 그럴듯해지진 않는 것 같다. 제법 총명했던 어린 시절에 괴이쩍은 어른들을 보며 이미 눈치 깠지만, 정말 나이 든다고 사람이 다 괜찮은 어른으로 둔갑하는 게 아니라는 건 다른 사람은 차치하고서라도 나 자신을 보면 알 수 있다.
스물의 청춘을 정리하고 삼십 대를 맞이할 때 나는 앞으로의 생(生)을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책임감 있게 살고 싶다는 대견한 바램을 가졌다. 처세술이라는 약간 얄팍한 뭔가를 배워서 인맥이라는 나의 거미줄을 잘 만들고 스파이더맨처럼 내 삶의 무대를 종횡무진 하는 것을 상상했고, 재테크라는 테크니컬한 스킬을 배워서 나의 통장을 복되게 하리라고 다짐했다. 그래서 아이를 낳거든 내가 가진 모든 삶의 비법을 전수해서 삶의 초장부터 보란 듯이 잘 나가게 하리라고 흐뭇해했었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 모두가 꿈을 성취할 수 있는" 민주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무대라는 믿음이 있었고, 설령 자본주의가 내포하는 어떤 불평등 같은 기제가 있더라도 나의 청춘은 이런 것들을 충분히 훌쩍 넘어설 수 있다라는 내 능력에 대한 무한한 신뢰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마흔을 조금 넘기고 보니 무책임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세상은 어렵고 만만치 않다라고 눈을 내리깐다. 어깨에 진 짐을 내려놓고 일상에서 희희낙락(喜喜樂樂)하며 살고 싶고, 아이에게는 돈과 처세보다는 나의 손때 묻은 책과 낙서 정도를 잘 정리해서 물려주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한다. 스파이더맨처럼 종횡무진한 삶은 아니지만 그저 그런 삶이라도 나의 일에 대한 소중함 정도를 알려주는 나만의 이야기가 있으면 좋겠다 라고 희망해본다.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라는 루소적인 생각으로 부(富)의 부족함에 대해서 나를 방어하고, 적은 것을 기대하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도 있다라는 행복론을 가족 중에 유일하게 주창하고 있다. 철이 드는 것이 아니라 철 결핍쯤 되는 것 같다. 나이 든다고 모두가 철드는 것은 아닌 것이다. 아니, 친구 중에는 내가 오육십대의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핀잔하는 것을 감안하면 나는 너무 철이 많이 들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나의 생각을 괜찮은 것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을 보면 일정부분 괴이쩍은 것이다.
아주 철이 없던 어린 시절. 무협지에 빠져서 도서관 간다는 핑계로 어머니의 정성 어린 도시락을 싸 들고 발길 바쁘게 만화방으로 향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만화방은 500원이면 '일일자유이용권'을 끊어서 몇 시간을 있던, 몇 권을 읽던 그건 참가자의 자유였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현실을 떠나 무공의 세계에 살 수 있었고, 덕분에 느지막이 들어가는 날은 공부 열심히 한다고 부모님께 칭찬까지 받았으며, 동석한 친구들끼리는 비밀을 나누고 우정을 두텁게 했으니 일석(一石)으로 수십 마리의 새를 때려 잡을 수 있는 어린 청춘의 자랑이었다.
무협지의 세계에서 꿈과 현실이 모호해진다. 나도 어딘가에 있을 무림중원으로 떠나 절대 무공의 스승을 만나고 인고의 세월을 보내 스승으로부터 말로만 전해오는 무림의 비법을 전수받아 절대 신공을 가진 고수가 되며, 운명을 따라 세상을 떠돌고, 비련의 여인을 만나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꿈. 그런 근사한 꿈을 무협지는 현실에서 꿈꿀 수 있게 했다.
무협지 몇 권을 읽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무서울 것이 없다. 어깨에 들어간 힘은 우리들 스스로가 중원무림의 고수가 되어 무엇이든 걸리면 추풍낙엽 시킬 포스로 무장한 것이다. 무협지 몇 권은 태권도 도장 몇 달의 삘(feel)을 느낄 수 있는 그런 한방이 있었다. 마치 영웅본색을 보고 거들먹거리는 걸음과 의미심장한 썩소를 날리며 극장을 걸어 나왔던 모든 수컷들의 본성처럼.
그런 꿈은 어른이 되면서 잊혀져 갔지만 지금도 친구들을 만나면 야한 비디오를 훔쳐봤던 이야기와 함께 그때 만화방의 추억은 우리들의 영원한 안주거리이다. 지금은 모두에게 꿈같은 이야기가 되었다. 무림고수는 철없는 청춘들에게나 아름다운 꿈인 것이다.
나는 요즘 꿈꾼다. 무림고수의 꿈을. 중원을 제패하는 날을 생각하며 운명을 찾아 속세를 떠나는 나그네의 모습을 그린다. 스승을 만나 고초를 겪으며 내공을 쌓아 절대신공에 이르고, 비검 한 자루를 갈고 닦아 달과 물을 베어내는 그런 경지에 이르는 순간을 상상한다. 스승은 달빛 아래에서 뒷모습만 보이며 말씀하신다. "하산하라." 그러면 나그네는 도포자락 휘날리며 속세로 돌아오고 그는 감춘 듯 살지만 그의 칼은 항상 피의 울음을 듣는다. 그리고 세상에 그의 이름이 자자해진다. 그리고 전설같이 살다가 구름처럼 사라진다.
무림고수의 꿈은 나를 들뜨게 한다. 한편으로는 누군가 알면 흉볼까 걱정이다. 길가다가 방귀뀌고 누가 들었을까 둘러보는 것처럼 항상 남 몰래 생각하고 덮어둔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을 때 혼자서 웃는 웃음처럼 나는 나의 스토리를 그려 보는 것이 재미있다.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 나의 마음을 가볍게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리 그려보려고 해도 그려지지 않았다. 떠나고 싶은 무림도 없었고, 찾고 싶은 비기(秘器)도 없었다. 길을 떠나는 것은 무용하며, 치기(稚氣)어린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그릴 수 있는 그림에 감사한다. 그런 그림이 조금씩 그려지니 숨통이 트인다.
돈이 가물던 때 통장에 돈이라도 몇 푼 들어오면 느껴지던 해갈의 기분, 급하게 줄 선 화장실에서 꽉 닫힌 문을 누군가 선뜻 열고 나올 때의 다급함의 해소처럼 무림 고수의 꿈은 나의 숨통을 트이게 한다.
나이 든다고 철이 드는 것이 아니며, 세월은 거꾸로 갈수도 있는 법인가. 회청춘(回靑春)이다.
'1인 기업'으로 밥벌이를 구상한다. 미래의 어느 한 대목을 타켓팅하여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나간다. 1인 기업이라는 모토를 생각하니 삶이 비즈니스요 비즈니스가 삶이다. 무림의 한가운데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곳은 내가 알지 못하는 수 많은 고수들이 곳곳에서 자기만의 비기로 눈을 부릅뜨고 있고, 스스로 방어하거나 공격하지 못하면 어느 누구의 몫으로 자신의 생을 내어 놓아야 할지 모른다. 세상은 친절히 적과 조력자를 구분하여 주지 아니한다.
나는 무엇을 가져야 할까. 한판 싸움을 생각하니 내가 준비해야 할 것은 몇 십대의 거마로도 부족하고 담아야 할 것은 끝도 없는 가운데 버려야 할 것에 손익이 헛갈린다.
그런 생각에 스승은 나를 향해 착한 펀치를 날리신다.
스승은 그의 책 <사람에게서 구하라>를 통하여 내가 준비하고 차려야 할 나의 봇짐을 정의해 주신다. 나는 세상을 보는 눈도, 사람을 보는 눈도 철 없는 아이처럼 미진하다. 1인 비즈니스를 생각하면서 오로지 '싸움의 기술'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기쁨과 죽음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지면 죽음이요, 이기면 사는 것이다라고 삶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스승은 싸우는 법이 아닌 살아가는 법을 역사의 이야기와 그것의 해석을 통해 나를 가르치신다. 홀로 해야 하는 것과 함께 해야 하는 것들을 친절히 안내하신다.
나는 싸워서 버티는 법이 아니라 화(和)하여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러한 토대 위에 나의 비기(秘器)를 갈고 닦는다면 나는 고수(高手)라 일컬어 부끄럽지 않을 듯하다.
칼을 지니지 아니하고도 당당한 무림의 고수가 길을 간다. 나는 그 길을 꿈꾼다.
<끝>
먹고 살기 위해 쓰고 남는 시간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체력을 다지거라. 갓 자라기 시작한 대나무를 매일 뛰어 넘고, 무릎을 굽히고 그 위에 찻잔을 올려 두고 차가 쏟아 지지 않도록 하거라. 그러면 강철 같은 다리를 가지게 될 것인데, 운동은 다리로 하는 것이니, 근육을 잘 키워 두어야한다.
너는 부채를 쓰는 법을 배우면 어떠냐. 옥면서생들은 , 너는 얼굴이 좀 검긴 하지만 잘 생겼으니, 대개 부채를 무기로 쓴다. 백산이 부채를 가지고 다니니 한 번 물어 보아라.
그럼, 제군들 무림 지존이 될 때까지, 열심히 불 때고 밥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