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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가요코의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 책의 내용처럼 적은수의 인원으로 구성원이 채워져 있다면 개인의 일상사와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있을까. 그래서인가. 사람이 많아서인가. 살고 있는 지구가 넓어서인가. 때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혹은 제대로의 사실이 올곧이 전달이 되지 않을 경우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이 진실인양 내가 알고 있는 그것이 진리인양 믿고 인식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이 역사의 오류로 판단이 될 때 우리는 외부에 대해 손가락질 했던 자신을 돌아보기 보다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야기 하고 그럴 수도 있지라는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기도 한다. 내가 아니기에. 내가 그 당사자요 피해자가 아니기에.
대학교 새내기로 입학하여 5월 축제의 질퍽한 낭만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광장에서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무엇일까. 뭔데 사람들이 열중해서 보고 있는 것일까.
뭐야. 저게 뭐지.
사람들이 널브러진 모습.
대검에 찔린 모습.
두개골이 함몰된 모습.
아수라랑.
곤봉을 휘두르는 전경들.
아비규환.
이게 뭐지.
나의 가슴은 벌렁 거렸다.
그리고 나는 부끄럽게도 그때서야 그날의 진실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다.
빨갱이들의 난동, 일부 공산주의에 물들은 선동세력들이 저지른 극렬 반동분자들의 만행으로만 알고 있던 그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혼란에 빠졌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사실이 아닐 때 내가 믿고 있었던 그것이 아니라고 판단이 될 때 나는 무엇에 기대며 세상을 살아가야 되나.
같은 시대 같은 땅에서 함께 살고 있음에도 건너편 저쪽에서는 참혹한 살육의 현장에 서있었음에도 다른 편에서는 아무런 혹은 왜곡된 정보를 접하고 있었다.
나는 투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나의 가슴은 벌렁거리고 있었고 나의 주먹은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일상의 평화로움에 젖어있던 까까머리 중학생 어느 날.
하루를 끝내고 이불을 깔고 누웠지만 왠지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고 있던 늦은 시간.
누군가 우리 집 대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누구요.
형사였다. 이늦은 시간 웬일이람.
잠옷 바람으로 나가신 어머니는 그날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외삼촌이 찾아 오셨다.
방문을 판자를 대고 대못으로 망치질을 하셨다.
무슨 일이야.
삼남매를 데리고 가셨다.
어디로 가는 거죠.
승호야. 당분간 우리 집에서 학교를 다녀야 한다.
왜요? 철모르는 나는 티 없는 눈망울을 굴리고 있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어머니가 돌아 오셨다.
엄마. 어디 갔다 왔어요?
대답이 없는 그분은 몸져누우셨다.
그냥 더러운 세상과 사람 팔자, 신세 한탄을 하셨다.
그러다 TV 뉴스 시간 대머리 높으신 분이 나오면 욕을 하며 채널을 바꾸셨다.
무얼까.
무얼까.
의문은 대학교에 들어가서야 풀렸다.
삼청 교육대라는? 불순분자들만이 가는 그곳에 우리 어머님이 다녀오신 것이다.
사회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가는 그곳에 우리 어머님이 끌려갔다 온 것이다.
불순분자? 사회악?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무슨 일 때문에 그곳에 끌려가신 것일까.
의문점은 가시질 않았다.
그리고 그 의문점은 사진을 보면서 오버랩 되었다.
아! 그렇구나. 사람의 삶이란 것은 때로는 자신의 방향성과는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곳으로 휩쓸러 가기도 하는구나. 그것이 인생이구나.
나는 젊은 나이에 너무 일찍 어머니의 존재를 통해 팔자란 것을 몸으로 체득 하였다.
그래서 한동안 그것에 매몰되어 있었고 미치도록 그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가보고 싶었다. 그 사진속의 현장을 한번은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래야만이 내가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던 보이지 않는 무게감에서 조금이라도 해방이 될 것 같았다.
그래야만이 내가 내 마음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같은 땅 하늘아래 살아가는데도 그 길은 멀었다.
머나먼 길이 아님에도 나는 돌아서 가고 있었다.
시대의 사명감만은 아니었다. 단지…….
따뜻한 봄날이 쏟아지는 오월 빛고을 광주. 망월동 묘지를 어렵사리 찾았다.
부끄럽지만 당시 감정의 실천이 이루어지는데 이십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야 되었다.
한분 한분의 무덤마다 사진이 있었고 비석 뒤편에는 피 끓는 사연들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들은 왜 이곳에 있을까.
왜 당사자의 가족들은 이곳에 와서 살아 남은자의 한 맺힌 설움을 가슴 가득 안고 가는가.
나는 그때 무엇을 하였는가.
나는 그때 무엇을 보고 있었는가.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소시민인 나이기에 불의를 보면 행동으로 옮기질 못하더라도 조금의 마음의 덤을 함께 가지고 갔으면 좋겠다.
아픈 이가 있으면 자그마한 기도라도 드리면 좋겠다.
굶주린 이가 있으면 나의 먹을 것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배려가 있으면 좋겠다.
슬퍼하는 이가 있으면 잠시라도 나의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희망을 느끼지 못하는 이가 있으면 무지개를 보여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5월이 되면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그때의 현실에 몸서리쳐하며 힘들어 하는 이가 있다는 것을 기억 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사람의 도리 인간의 도리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최소한의 양심이 아닐까.
때론 자신에 지쳐 살아감에 지쳐 불행에 지쳐 혼자 살기 막막함에 헐떡일지라도 나보다 더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사람 사는 살이기에 그것이 조금 더 인간답게 사는 길이기에.
고박경리 선생님은 당신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셨지.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은 산다는 것‘ 이라고.
허허~ 산다는 것. 어떻게든 살아간다는 것.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