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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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부터 낯선 하루를 맞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잠을 깨우기 위해 벌이는 가벼운 실랑이와 아침 상차림으로 분주한 아침은 나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나는 항상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전열을 가다듬고 전쟁터로 향하는 아침을 맞곤 했다. 하루는 반드시 싸워 이겨야 하는 전쟁이었다. 날씨가 궂거나 몸이 좋지 않으면 전쟁에 임하는 장수처럼 나는 근심했다. 나는 매일 하루를 견디기 위한 전의에 불타 입을 앙다물었다. 그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항상 패잔병처럼 기진맥진했다. 그것이 내겐 익숙한 하루였다.
동료들과의 아침 인사, 이메일 확인, 회의 참석으로 시작하던 나의 아침은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라디오 방송을 벗삼아 집안일을 하는 아침으로 바뀌었다. 쏜살같이 돌아오는 간부 워크샵과 영업회의 준비, 끊임없이 이어지는 출장과 야근 대신 나는 취미교실에서 새로운 것에 몰두하고 가끔은 그냥 집에서 하릴없이 뒹굴었다. 그것도 괜찮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달콤했다. 가끔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도 했고 또 가끔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고 점심을 함께 했다. 그것도 괜찮았다. 낯선 하루는 내게 활력을 주었다.
회사원 대신 전업주부라는 직업도 나름 괜찮았다. 오 천원도 안 되는 돈으로 조조영화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먹지도 않는 화장을 얼굴에 덕지덕지 바르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어디든 갈 수 있는 편안함이 좋았다. 남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공간에서 내 의지로 시간을 채워나갈 수 있는 하루가 내가 잃어버렸던 넉넉함을 찾아 주었다. 아이들의 얼굴에도 통통하게 살이 오르기 시작했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편안했다.
이제 그런 낯선 하루가 익숙한 것이 되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집을 나서고 나면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씽크대 개수대에 위태롭게 쌓여 있는 그릇들,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가지들, 발바닥에 묻어나는 허연 먼지, 화장실 세면대에 끼어있는 물때가 나를 가만히 쳐다본다. 혼자 해결해야 하는 점심을 자꾸 거르게 되고 가끔은 근사한 식당에서 기름진 식사를 하고 싶어진다. 눈깜짝하면 돌아오는 끼니를 또 어떻게 때우나 아득해지며 외식 횟수가 점점 늘어난다. 가계부 붉은 글씨는 이제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이걸 써 무엇 하나 생각이 든다. 거울 한번 보지 않고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동네 마트를 들락거리고 불어난 체중이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다.
<난중일기>를 통해 이순신을 만난다. 그의 일기에는 영웅의 위대한 일상이 아닌 보통사람의 익숙한 그것이 보인다. 그는 매일 동헌에 나가 일을 보고 활쏘기를 한다. 자주 옷 두 겹과 이불이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며 병마에 신음한다. 맡은 바 소임을 다하지 않는 관리를 잡아다 곤장을 치고 군관들과 어울려 취하도록 술을 마신다. 경상 수사를 헐뜯고 더러운 세상을 한탄하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한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자식의 건강을 근심한다. 불안한 마음에 점을 치고 밤새 꾼 꿈을 풀이하며 자신의 운명을 가늠하려 애쓴다. 깊은 밤 수루에 홀로 앉아 어수선한 마음을 달래어 보는 그는 나같이 한없이 흔들리는 인간이었다.
오늘 밤 달빛이 맑고 밝아서 티끌 하나 일지 않네.
물과 하늘이 한 빛이 되어 서늘한 바람이 선득 불어 온다.
뱃머리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는구나.
- 계사년 7월 초9일 이순신 <난중일기> 중에서
어쩌면 일상이란 지루한 것일지도 모른다. 낯선 일상도 시간이 지나면 지루한 것이 되고 만다. 일상이 지루해지면 흥분은 사라지고 그냥 살아 지는 하루하루가 이어진다. 다시금 일상을 낯설고 달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사마천, 일연 스님, 이순신, 카를 융과의 색다른 데이트를 시도해본다. 홀로 산에 올라 새소리를 들으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다. 정상에서 고추장 찍은 멸치 안주에 막걸리 한잔을 마시며 산바람을 느껴본다. 구두를 신고 화장을 하고 한껏 멋을 내고 외출을 한다. 아이들과의 여행을 계획하며 들뜬 시간을 보낸다.
낯선 하루가 익숙한 것이 될 즈음에 나는 생각한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누구나 흔들리며 살아간다. 나의 익숙한 하루를 낯선 설레임으로 가득 찬 그것으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해본다. 더 낯선 아침을 맞이하라. 더 낯선 일상을 시도하라. 살아지는 하루가 아닌 살아가는 하루를 만들어라. 익숙한 일상이 모여 빛나는 순간을 만든다. 빛나는 순간은 익숙한 일상 속에 있어 더 찬란한 빛을 내뿜는다. 나의 지루한 일상도 빛나는 순간을 만들기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작년 봄, 봄비가 눈내리듯 내리고 나는 출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카페에서 보고 있었어.
따뜻한 커피한잔, 빵한조각, 내가 보고 싶은 책 그리고 음악.
카페에서의 이런 시간은 내가 꿈꾸는 시간이었지.
편안한 곳에서 일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마음 넉넉하게 책읽고 낙서하고 생각하고 그랬으면 하는.
하지만 그런 시간들이 나에게 일상이 되고 보니 행복은 사라지고
나는 그것이 주는 일상에 매몰되고 '밥벌이'에 대한 고민을 스스로 만들어 창밖을 보면서 근심하고 있었지.
그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깜놀!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또 예전의 습관처럼 걱정을 나의 주변에 늘어놓고 있었지.
일상에서 특별함을 찾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 같아.
크로노스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듯, 일상은 모든 특별함을 평범함으로 바꾸어버리는 마력이 있는 듯.
그대와 내가 매일 같은 일상에서 위대함으로 살아남으려면 그대의 글처럼
일상을 의미와 함께 차곡차곡 쌓아놓는 길 밖에는 없을거야.
아마 그대의 일상을 내가 잘 보고 있으면 그대가 꽃필때 나도 덩달아 피는 꽃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봐.
새벽에 일어나 책보고, 글쓰고, 동지들 글 읽고 하는 그런 아주 평범한 아침에....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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