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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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히 기록하라. 쉬지 말고 적어라. 기억은 흐려지고 생각은 사라진다. 머리를 믿지 말고 손을 믿어라. 기록은 생각의 실마리다. 기록이 있어야 기억이 복원된다. 습관처럼 적고 본능으로 기록하라.
- 다산 정약용
나는 기억을 믿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록되지 않은 기억은 증발하여 사라지며 때로는 왜곡되기도 한다. 19세기 독일의 유명한 실험심리학자인 에빙하우스는 망각곡선주)을 통해 기억의 휘발성을 입증한 바 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학습 후 10분 후부터 망각이 시작되어, 1시간 뒤에는 50%가, 하루 뒤에는 70%, 한달 뒤에는 80%를 망각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망각으로부터 기억을 지켜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기록과 주기적인 복습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기록은 기억을 위해 할애되는 정신적인 자원을 절약할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수단이다. 천재 혹은 영웅으로 불리는 역사 속의 위대한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 중의 하나가 바로 기록하는 습관이다. 그들은 기록을 기억을 위한 보좌관으로 활용하여 기억의 불확실성을 극복함과 동시에 그들이 가진 정신적 자원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늘 공책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지체 없이 공책에다 적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현대미술의 거장 피카소는 "내 작품은 일기와 같다. 이런 점에서 이들 드로잉 노트의 첫 번째 대중 전시회를 '나는 노트이다'라고 부른 것은 적절한 일이었다."라고 이야기 한 바 있다. 또한 위대한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그의 끊임 없는 창작의 비결에 대해 "뜻 밖의 참신한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면 모두 메모를 해두고 적절하게 활용한다. 손가락을 얕봐서는 안 된다. 악기와 늘 접촉하는 영감의 원천이 바로 손가락이다. 그게 없으면 무의식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가 없는 것이다."라며 손 끝에서 비롯된 성실한 기록의 중요성을 이야기 했다. 현대무용의 대가 마사 그레이엄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종이에 적는다. 어떤 책에서든 인상적인 구절이다 싶으면 바로 옮겨 적는다. 그리고 출처를 적어둔다. 이렇게 하면 실제 작업을 할 때 모든 과정에 대하 기록을 간직하고 있을 수 있다. 내 무용에 대한 메모는 모두 갖고 있다. 특별한 기호는 쓰지 않는다. 내 생각을 그냥 적어둘 뿐이고, 나는 내가 쓴 글과 동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여기 저기에 설명이 있다."며 자신의 창조적 무용동작이 끊임 없는 기록에서 비롯되었음을 이야기 하였다. 이렇듯 역사 속의 영웅들은 기록의 대가들이기도 했다.
기록의 목적은 단순한 끄적거림이 아니다. 그저 끄적거리기만 하는 것은 기록이라기 보다는 낙서로 보는 편이 낫다. 기록의 진정한 목적은 잊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것을 간직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내 삶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삶의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여 잘 갈무리해 두는 것이다. 매 순간을 섬세하게 받아들이고 중요한 의미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것. 이것이 기록의 진정한 목적이다. 변화경영사상가 구본형은 "평범한 개인의 역사는 본인이 남기지 않으면 유실된다.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고 자신의 세계도 없다. 개인의 역사는 스스로에 의해 편찬되어야 한다. 이것이 군중 속에서, 군중으로, 흔적 없이 매몰되는 자신을 잊지 않는 길이다." 라며 기록이 '개인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훌륭한 수단이 될 수도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이렇게 남겨진 기록은 단순한 개인의 '자아탐색'을 넘어 중요한 사료가 되어 후대의 귀감이 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충무공 이순신이 7년간의 전쟁 속에서 매일 써내려 간 <난중일기>다. <난중일기>를 통해 우리는 역사 속 영웅의 인간적 고뇌와 시련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이란 역사 속의 중요한 사건의 한 단면을 포착할 수 있게 된다.
나의 경우 기록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은 직장 상사를 통해서였다. 소위 말해 '일 잘하는 사람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끊임없이 기록하는 습관이다. 특히 내가 속한 팀의 담당 임원의 경우 업무수첩과 개인수첩 심지어는 탁상 달력까지 빼곡한 메모로 가득 차 있다. 업무에 대한 실무자 이상의 꼼꼼한 지식과 엄청난 기억력이 그를 '직장인의 별'인 임원의 자리에 오르게 했고, 그 뒤에는 그의 '기록하는 습관'이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프로젝트 리뷰나 각종 회의시간에 그는 업무 수첩에 늘 뭔가를 빼곡히 적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그 기록을 정확히 찾아내어 거기서 의미 있는 아이디어를 끄집어 내어 부하직원들의 나태함을 부끄럽게 만들곤 했다. 나도 부끄러운 사람 중 하나였는데, 그 원인은 그 순간의 기억이 지속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 기초한 '귀차니즘'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의 기억은 철저히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을 따랐고, 그렇게 증발된 기억들이 업무에 엄청난 비효율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기록을 해놨더라면, 바로 찾아서 해결 할 수 있는 일들을 애써 기억해야 하고, 기억하지 못하면 주변 사람에게 묻거나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렇게 낭비되는 정신적 자원과 시간의 낭비가 만만치 않았다.
그 후 나는 회의 시간에 사람들이 기록하는 것을 유심히 관찰했다. 각양 각색이었다. 날짜만 적어 놓은 사람, 낙서를 하는 사람, 그냥 대충 적는 척 하는 사람 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업무수첩을 펴놓았을 뿐 제대로 기록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때 문득 기록하는 습관, 제대로 기록하는 습관이 업무의 효율성 뿐만 아니라 내가 갖출 수 있는 차별성의 한 측면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기록'하는 일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먼저 개인적 측면에서 매일 새벽 깨어나자 마자 떠오르는 생각들을 마음껏 편하게 적어 내려가는 '모닝페이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한 일기의 차원을 넘어 감정의 배수로 역할도 해주었다. 그래서 새벽이 아니더라도 회사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개인적으로 답답한 상황이 생길 때면 수첩이나 컴퓨터에 적고 또 적었다. 업무적으로는 회의 시간 등에 멍하니 있거나 낙서를 끄적거리지 않고 무엇이 되었든 적극적으로 받아 적었다. 마구잡이로 적다 보니 정작 내가 쓴 글자를 내가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래서 빨리 잘 쓰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분량의 답을 적어야 하는 기자나 사법고시생이 배운다는 '백강 고시체'를 배우기도 했다.
그렇게 뭔가를 받아 적고 기록으로 남기는 습관은 생겼지만, 프로젝트의 문제 해결을 위한 혹은 칼럼을 쓰기 위한 아이디어는 받아 적을 준비가 되어 있는 집이나 사무실의 책상 앞이 아닌, 지하철 안에서 서 있을 때나, 길을 걸어갈 때 혹은 계단을 오를 때 문득 떠오르곤 했다. 그래서 손바닥 만한 수첩을 가방 속에 넣어 두고 뭔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꺼내어 적었다. 그러나 수첩을 꺼내고, 적는 데 시간이 걸렸고 그러는 사이에 생각은 금새 증발해 버렸다. 그래서 찾은 대안이 휴대폰의 녹음 기능을 활용하여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녹음시키는 것이었다. 가벼운 차림으로 산책을 할 때나 혹은 날씨가 너무 춥거나 비가 오는 길을 걸을 때 버튼 하나만 누르면 녹음이 되는 휴대폰의 기능은 그 빛을 발한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발표한 뒤 피드백을 받을 때도 이 녹음 기능을 활용하는 데, 업무 수첩에 받아 적은 내용 중 놓친 기록을 보완할 수 있고, 피드백 해준 사람의 의도와 뉘앙스를 파악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꾸준히 기록하는 습관이 자리 잡음과 더불어 지난 1년간 1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모닝페이지, 몇 권의 수첩이 '기록'이란 습관에 천착한 결과물로 남았지만 뭔가 채워지지 못한 허전함이 많이 남았다. 그 이유를 쉽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아주 많은 생각들을 쉴새 없이 기록으로 남겼지만 시간이 흐른 뒤 정작 기록해 놓은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어디에 기록해 두었는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마구 잡이로 기록하고 담아 두는 일만 열심이었지, 그것을 언제 어떻게 활용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 동안 내가 한 기록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순간에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 필요한 아이디어를 꺼내어 쓸 수 있게 한다는 기록의 본질적인 목적을 간과했던 것이다. 즉 기록을 통해 증발되는 아이디어를 잡아내어 담아두어 그때 그때 활용하는 것 까지는 좋았으나, 그런 좋은 아이디어를 잘 갈무리하고 피드백 하지 않아 힘들게 모은 중요한 기록들을 사장시켰던 셈이다.
사가토 켄지는 그의 저서 <메모의 기술>에서 내가 그 동안 제대로 실천한 부분과 놓친 부분을 7개의 단계로 나누어 멋지게 설명해 놓았다.
■ 내가 그 동안 잘 지킨 것
■ 놓친 것
1. 언제 어디서든 기록하라
떠오르는 생각을 기억에 의존하지 말고 생각난 바로 그 자리에서 기록한다.
늘 지니고 다니는 것, 항상 보이는 곳에 기록한다.
2. 주위사람들을 관찰하라
일 잘하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따라 한다.
다른 사람들의 말하는 내용, 사고방식, 언어습관 등을 기록한다.
3. 기호와 암호를 활용하라.
자신에게 쓰기 편하고, 보기 편하고, 사용하기 편리한 방법을 찾는다. (예 : ⓘ 아이디어, ⓣ 전화)
4. 중요한 사항은 한눈에 띄게 하라.
중요한 사항은 밑줄, 동그라미, 색깔 볼펜을 활용한다.
5.기록하는 시간을 따로 마련하라.
기록을 정리하여 갈무리 해 둘 수 있는 시간을 따로 마련한다.
6. 기록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라.
언제든지 찾아 활용할 수 있도록 기록해 놓은 것을 DB로 구축해 놓는다.
7. 기록을 재활용하라.
기록한 것을 버리지 말고 일정기간 보관한 후 다시 읽어 본다.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의 복습 기능을 활용하는 것과 같다)
기록은 재능이 아닌 습관의 영역에 속한다.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노력 속에 습관의 근육으로 길러지는 것이다. 평범함을 비범함으로 이끄는 것은 타고난 재능과 성실함이란 두 개의 기둥이다. 기록하는 습관은 그 중 '성실함'의 영역에 속한다. 성실한 사람은 '불확실한 기억'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손과 발의 수고로움으로 갈무리한 '확실한 기록'만을 믿는다. 그렇게 그들은 '삶의 결정적 순간'을 놓치지 않은 성실함 덕분에 평범함에서 비범함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격언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기록을 남긴다."로 바뀌어야 한다.
주)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
운전을 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아침에 의식이 돌아오기 전 몽롱한 상황에서 번뜩이는 생각들을
경험한 적은 모든 범인에게 한두번씩은 있는 경험일거야.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것을 잘 기록해 두는 사람은 없을 뿐더러,
그것을 쫓아 뭔가를 모색해 보는 사람도 없을 것이야.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한 깊이와 아이디어로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
기록을 잘 하는 것은 경인이 글에서처럼 위대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필수적인 도구인것 같아.
나도 항상 수첩은 가지고 다니는데, 생각들이 그곳에 살지 못하고 그냥 생각으로만 머무를 때가 아직도 많지.
습관이 되어 일상이 되는 것은 모든 것에 있어서 '시간', '노력', '집중', '본성과의 거스름'등등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 같아.
시간이 조금 지나서 <메모의 활용>이라는 경인이의 글을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구나.
그런 류의 글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형님 말씀처럼 습관으로 만들어 일상화 시키고자 하는 것들은
시간, 노력, 몰입 등의 많은 정신적 자원들을 필요로 하지요.
그렇지만 그것은 마치 우주선을 우주 밖으로 쏘아올릴 때 엄청난 연료를 필요로 하는 것과 같지요
그러나 그 에너지는 대기권을 다시말해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최소의 에너지이지요
대기권을 벗어나면 아무런 힘 없이도 자유롭게 우주 공간을 활보할 수 있는 것처럼
힘겹게 습관으로 근육으로 길러 놓으면
우리는 무림 고수가 극학 기예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듯
우리 삶에 좋은 습관하나를 체득하게 되는 거겠지요?
결국 우리가 기록을 하는 건, 좋은 습관을 체득하려고 애쓰는 것은
북극성 아래, 강들이 모여드는 바다 위에 이르는 길을
좀 더 현명하게 이르기 위함이 아닐까요? ^^
나 역시 기록과 복원이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는 많이 기록하지 않는다. 기록한 다음에 보게 되지 않아서다. 잘 정돈된 기록만 한다. 그러니 우연히 나를 찾아 온 생각들이 많이 샌다. 아깝다. 그러나 나는 그 생각들이 언젠가 우연히 다른 모습으로 찾아 오기를 기다린다. 내가 노리는 것은 다시 찾아 와 재생되는 기억이다. 찾아 왔으나 잡아두지 못한 생각은 어쩌면 나의 것이 아닐 지 모른다. 언젠가 다시 찾아 올 때 나의 포충앙에 걸린다.
나는 그 것에 대하여 길게 이야기 한다. 매일 아침 나의 글 속에서 그것은 부활한다. 그리고 그것은 책의 한 귀절이 된다. 매일 쓰지 못하면 기록은 재활되지 않는다. 기록의 습관은 메모가 아니다. 메모광을 보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꿰어지지 않은 구슬들로 가득한 지저분한 창고일 뿐이다. 기록이 매일 생각의 출발점과 실마리가 되게 해야한다. 완성도 있는 글로 살아나야 비로소 제대로 부활한 것이다. 메모하라.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곳에서 출발하여 생각을 확장하여 시작과 끝이 있는 글로 되살려라. 메모가 기록이 되고 기록이 글이 되게 해라. 그리고 글이 책이 되게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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