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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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쓸까?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으면 자신의 역사는 남아있지 않게 된다.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구본형 사부님은 'Me-story'를 남기자고 제안하며 연구원 모집 과정에도 '개인사' 쓰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넣고 있다. 개인사를 써보면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고, 자신을 깊이 알게 되어 미래의 되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질 인생을 위대한 인생으로 꿈꿔보게 만드는 것이 개인사 쓰기다. 그런데 개인사 쓰기의 기초가 되는게 <난중일기> 같은 매일의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일상의 사실, 느낌을 솔직히 남기다 보면 그것이 쌓여 기록이 되고 역사가 되어 유산이 된다. 이순신은 그 치열한 해전의 한 가운데에서도 일기를 남겼다. 한가할 때 보충하며 문장을 다듬었을지라도 매일 기록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습관처럼 자신의 일상과 생각, 느낌을 기록하는 행위 자체에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작정 기록을 남기면 되는 것인가? 무엇을 어떻게 쓴다는 말인가? 어젯밤, 칼럼을 써야한다는 책임감으로 모두 잠든 시간, 부모님 댁 식탁에 앉아서 무작정 넷북 모니터만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무작정 써야한다는 의무감이 어떤 것도 쓸 수 없게 만드는 상황이었다. 아무생각도 떠오리지 않아 대신 가져온 책 한 권을 훑어보았다. 도로시아 브랜디의 <작가수업>이었다. 그곳에 나의 고민에 중심을 잡아주는 이야기가 나왔다. "작가는 자발성과 아이처럼 예민한 감수성과 순수한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가 또 있는데, 다름 아니라 어른스러움과 분별력과 절제와 공평함이다. 예민한 감수성과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구석도 중요하지만 이런 의식적 측면을 갖추지 못한다면 예술작품은 탄생하지 못한다."(41~42쪽) 아이의 천진함과 어른의 분별력, 두 가지 모두를 훈련시켜 하나로 통합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것을 무의식과 의식의 연결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난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써내야 한다는 생각에만 갇혀 있었다. 그저 무의식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지 못하고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강제하려고 하면서 내 안의 이야기들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의 단초들을 대충 제목만 적은 후 일단 잠을 청했다. 그리고 일찍 일어나 홀로 공원 산책을 나섰다. 한 바퀴, 두 바퀴 무작정 걸었다. 처음엔 무엇을 건져볼까? 하는 생각이 더 사색을 막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몸이 풀어지고 생각이 가라앉자 이런 저런 새로운 것들이 떠올랐다. 우선은 한때 시도했었던 '모닝페이지'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줄리아 카멜론이 <아주 특별한 즐거움>이란 책에서 소개하는 '모닝페이지'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뭐든지 그냥 쓰는 방법이다. 잠재의식을 억압하는 센서가 작동하기 전에 계속 움직여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이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다면 "쓸 만한 말이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라고 쓰는 것이다. 이렇게 3쪽을 가득 채울 때까지 무슨 말이든 쓰는 것이다. 왜 이 '모닝페이지'를 써야 하냐는 물음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이렇다. "모닝페이지는 자신이 갖고 있는 두려움과 부정적인 사고의 다른 면에 우리를 이르게 한다... 그 곳에서 우리는 조용한 중심부, 한때는 분명 우리 자신의 것이었던 평온하고 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중심부를 찾아낸다." 모닝페이지를 씀으로써 창조적인 것을 두려워하는 부정적인 센서를 피하고 참된 자신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의 이상한 꿈 이야기도 자주 나오고, 원균에 대한 비꼼과 무시의 부정적인 말들도 자주 나온다. 나랏일에 대한 한탄과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도 수시로 나온다. 이순신도 어떻게 보면 '모닝페이지'를 쓰듯이 자신에게 떠오른 그 날의 일과 생각을 그저 쓴 것이다. 그렇게 매일 매일 일기를 쓰면서 분명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순신은 '일기 쓰기'라는 습관을 통해 무의식과 의식을 통합시켜 위대한 인생을 살았고, <난중일기>라는 유산도 덤으로 남길 수 있었다.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무시무시한 전쟁의 상황에서 조선 수군통제사로서의 역할을 꿋꿋히 해내었고 아직까지 '영웅'으로 살아있다. 현대의 구본형은 새벽에 글쓰기를 통해 평범한 직장인에서 사상가이자 작가가 되었다. <일상의 황홀, 2004>이라는 구본형의 책에 '하루의 기록을 통해 나는 변화한다' 는 말이 나온다. 이 책은 일기 형식을 빌어 하루에서 건져올린 자기경영의 예화들이다. 매일 새벽에 자신의 깊은 곳에서 건져올린 것들이 한 권의 책으로 갈무리 되어 나온 것이다. "나에게 새벽은 최근 7년 동안의 작업장이었고, 탈출이었고, 모색이었고, 즐거움이었습니다. 아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거의 전부 새벽 덕이 아닌가 합니다."(90쪽) 그에게 새벽은 이런 것이다. 그는 새벽이라는 물리적 시간을 통해 무의식과 의식을 연결시켜 자신 안의 큰 샘을 발견했을 것이다.
이순신의 매일 일기 쓰기와 구본형의 새벽에 글쓰기, 그리고 아침에 무작정 쓰는 모닝페이지와 <작가수업>에서 '무의식과 의식이 연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한 줄로 연결되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나는 그랬다. 글을 쓰는 기교와 수사법, 맞춤법과 띄어쓰기 등 기술적인 것 이전에 더욱 근본적인 것이 무의식에서 풀어져 나와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이것이 글이 써지지 않는 막막한 상황에서 시작해서 다음날 새벽 산책길을 걸으며 떠올린 사색의 한 덩어리이다. 결론은 이렇다. 무작정 써야 한다. 쓰지 못하게 억압하는 것마저도 멀치감치 떨어져 바라보며 묘사하고, 명상하듯이 자신을 바라보며 써 내려 가야 한다. 말이 되든 안 되든, 옳든 그르든, 좋든 싫든 떠오르는 그대로 써내려 가는 것이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무엇인가 해내야 하는 것은 없다. 반드시 이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도 없다. 있다면 그 순간의 자신과 주변의 것들이 하나가 되려는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이런 생각을 명료하게 해주는 이현주님의 시가 있어 옮겨본다.
오늘 아침 산책 길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는
아무것도 줍지 못했네.
여느날보다 멀리 걸었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오늘은 무엇을 건질까?
이런 생각으로 문을 나섰기
때문일게야.
그놈의 욕심을 끝내
지우지 못해서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는
아무것도 줍지 못했네.
오늘은 아침 산책길에서
참 소중한 것을 얻었어.
'무엇을 어떻게 쓸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글을 시작했다. 그런데 먼저 '무엇을 어떻게'라는 짐을 덜어내야 할 것 같다. 어떤 삶을 살고 싶다고 외치다가 진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처럼, 어떤 글을 쓰고 싶다고 주장하다가 진짜 내 글을 못쓰게 될지 모르니까 말이다. '삶을 기뻐하는 삶'이 그저 살아가는 것이 듯 '살아있는 글'은 지금 내 안의 중심에서 그냥 나오는 것이리라.
<2011.6.4 산책길, 사진/양경수>
무심히 걷는 산책과 모닝페이지와 같은 자유로운 글쓰기를 통해
내면에 있는 무한한 세계의 보물들을 건져 올리고,
어른의 분별력의 힘을 얻어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
이것도 우리가 앞으로 끌어 안아야 한느 모순과 역설의 또 다른 모습인 것 같아요.
나와 세상 사이 어디 쯤에 제가 있으면 좋을까요?
분명한 것은 우리가 매일 힘겹게 일어나 수련하는 새벽은
자신의 내면의 보물을 길어올리기 더할나위 없이 좋은 시간이며,
더불어 함께 하는 연구원 과정은
멋지고 명쾌한 분별력을 갖추기 좋은 시간이겠지요?
형님 글 읽고 내면과 세상 사이에 제가 어디쯤에 와 있나 가늠해 보게 됩니다.
고마워요 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