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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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기억해 두세요
A : 병원에 왜 오셨어요?
B : 실수였어요.
‘문제가 생겼다’는 다급한 연락을 받으면서, 뭔가 일이 터졌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어요. 응급실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직원이 다급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무언가 복잡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뜻하니까요.
구급차에 실려온 것은 85세의 할아버지였습니다. 환자는 뇌경색과 폐렴으로 이미 의식이 없었고 곧 돌아가실 것 같았구요. 다급한 문제는 보호자가 환자의 치료를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신경외과 교수님은 매우 위험하니 빨리 입원해서 수술을 하자고 하셨는데, 보호자가 계속 치료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입원치료를 원치 않는다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그것이 가족회의의 최종 결정사항이라고 하더군요.
병원은 사람을 살리는 곳입니다. 특히 응급실은 분초를 다투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24시간 365일 불 켜놓고 있는 곳 아니겠어요? 처치를 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 뻔한데, 치료를 하지 말라니요? 그럼 뭐 하러 병원에 오셨대요? 치료를 원치 않으시면 빨리 집으로 가세요. 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구요?
병원에 온 환자가 죽어가는데도 의사가 적절한 치료를 하지 않아서 사망하게 되면, 자살 방조죄로 의사가 구속되는 것이 현행 의료법입니다. 그렇다고 보호자의 동의없이 수술이나 입원치료를 할 수도 없습니다. 병원비도 받을 수 없지요. 의료법상 임종이 가까운 환자를 치료하지도 않고 집으로 보낼 수도 없고, 치료도 못하고 방치하다가 환자가 사망하면 죄없는 의사가 구속된다는 얘기지요. 병원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럼, 아예, 처음부터 응급실에 오질 말았어야지요.
직원이 따지듯 물었습니다.
“아니, 환자상태가 이렇게 위독한데, 치료를 원치 않으시면, 대체 병원에는 왜 오셨어요?”
보호자인 따님이 말했습니다.
“실수에요”
“예?”
실수가 야기한 복잡한 상황의 내막은 대략 이러합니다.
환자의 상태는 위독했지만, 가족들은 집에서 임종을 기다리면서 더 이상의 치료는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환자가 고령이고 상태가 수술을 해도 쾌유된다는 보장이 없고, 수술해서 생명은 유지한다 하더라도, 식물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고, 장기간 입원이 예상되다 보니,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그렇게 결정을 한 것이지요.
환자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준비했습니다. 천만원이 입금된 통장을 준비해놓고, 자신이 사망하면 그 돈으로 장례를 치루라고 한거지요. 가족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신 분의 의연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환자는 처음에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가족들은 임종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고, 응급실로 갔다가 바로 장례식장으로 모실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가족의 추측과는 다르게(?) 환자는 임종하시지 않았고, 의료진은 입원하여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고 재촉하니, 치료를 거절한 것이었습니다. 응급실에 간 것은 환자가 사망하시면, 병원 장례식장으로 바로 모시기 위한 것이었지, 수술이나 치료를 통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으니까요.
서울대병원에서는 환자 치료에 동의하지 않는 보호자를 설득하는데 실패하자, 저희 병원으로 보냈습니다. 평소에 저희 병원을 다니던 환자라는 것을 알고는 소견서를 첨부해서 보낸 거지요. 가족들은 구급차안에서도 계속 집으로 가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119 대원들이 환자상태가 위중하자 핸들을 병원으로 돌렸고, 결국 책임도 함께 넘어왔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보호자가 원하는 대로 그냥 환자를 집으로 돌려보내면, 분명히 환자가 사망하게 될 것이고, 법적 처벌에서 자유롭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게 될 테니까요. 가족들의 가장 큰 실수는, 환자가 집에서 돌아가시면 병원의 장례식장을 이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집에서 임종하시더라도 119 로 병원에 와서, 사망확인을 하고 장례식장을 이용하면 되는 것을 모르고, 병실입원이나 응급실을 통해야만 병원 장례식장을 이용할 수 있다고 잘못 판단한 것이지요.
그런데 의아함이 생겼습니다.
처음부터 우리병원 응급실로 오면 되는 것을 왜 서울대병원까지 갔을까? 하는 의문이었지요. 제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산전 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응급실 직원이 말하더군요.
“아마 서울대 병원이라서 갔을 거에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그래도 서울대병원하면 사람들이 알아주잖아요. 서울대병원 응급실을 통해 장례식장으로 모시면, 국내 최고의 병원에서 치료받다 돌아가신 것으로 주변 사람들이 인정해 줄 것이라 생각했겠지요.”
“아...”
경제적 어려움에 기인한 치료거부는 이해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에서 돌아가셨다는 타이틀이 꼭 필요했던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호자를 설득하지도 못하고, 적극적인 치료도 못하면서 응급조치만 취하다가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경찰서에 연락하여 형사가 오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행정적 조치를 하는 가운데, 갑자기 모든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되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새벽에 돌아가신거죠!
가족은 원래 계획대로 장례식장으로 모셨고, 병원은 다시 일상의 평화를 찾았습니다.
돌아가신 분께 감사하다고 할 수도 없고, 슬퍼하기도 애매한..이상한 상황..
어쨌든 할아버지의 죽음은 사망방조죄로 의사가 처벌받을 뻔한 상황을 종결시켜 주시고,
가족에게는 안도와 평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거 아세요?
‘환자가 집에서 돌아가신다 하더라도 병원의 장례식장을 이용할 수 있다’ 는 거요.
그 간단한 내용을 '생활의 지혜'로 분류해야 할지,
실수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암기해야 할
'인생 메뉴얼'로 구분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