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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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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19일 20시 44분 등록

아버지는 경찰을 똥파리라고 부르신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영어 발음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내가 아빠, 경찰은 영어로 폴리스예요.” 했더니 그런가? 아닌데. 똥파리랑 비슷한 발음이었는데…”하고 얼버무리신다. 아버지의 최종학력은 고졸이다. 그것도 지방 소도시의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셨다.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해 방직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다 오른쪽 손가락 네 개를 잃는 산업재해를 당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내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금은보석상을 하며 가장의 역할을 충실히 하셨다.

 

분명 아버지의 유년시절은 그리 궁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물려받은 재산이 많아, 머리는 포마드 기름을 발라 올려 붙이고, 손을 베일 듯이 다림질해 각을 잡은 흰 양복에, 파리가 미끌어질 듯이 광을 낸 백구두로 멋을 내고 시내를 어슬렁거리는 한량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7남매의 맏이인 아버지를 공업고등학교에 진학시킨 이유는 아마도 그가 공부에 큰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래도 아버지의 교육열은 괴테 아버지 뺨치는 수준이었다. 괴테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에 헌신적이었다. 괴테는 아버지 덕에 어려서부터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불어, 영어, 이탈리아어 등을 배웠고 그리스 로마의 고전문학과 성경 등을 강독했다. 나의 아버지는 자신의 배움이 짧아 괴테 아버지처럼은 못했지만 그 열성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았다.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던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공부를 잘했다. 내 여동생은 나보다 더 잘해서 경시대회에 나가 상을 타올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우리 집안의 기둥이자 장손인 남동생은 그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두 누나들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주말도 없이 장사하느라 눈코뜰새없이 바쁜 아버지였지만 그래도 아이들 교육에는 항상 열성적이셨다. 초등학교 육성회장을 맡아 학교의 크고 작은 행사에 꽤 큰 성금을 쾌척하기도 했고 우리 담임선생님이 가게에 들르면 남자는 시계, 여자는 반지와 같은 촌지성 뇌물(?)을 주기도 하셨던 것 같다.

 

지금이야 영어유치원에 다니고 초등학교 때 영어 연수를 떠나는 시절이지만 나 어릴 적에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영어를 처음 배웠다. 내가 영어 공부를 처음 시작한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는 나에게 손수 알파벳을 가르쳐 주셨다. 당시 엄마는 영어를 가르칠 형편이 아니었다. 이승만 정권 시절 사업을 하던 외할아버지가 정권의 몰락과 함께 가산을 탕진하자, 엄마는 초등학교 졸업을 끝으로 더 이상 배움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후 엄마는 예순을 넘긴 나이에 주부를 위한 중고등학교에 진학해 자랑스런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내셨다.) 결국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우리 아버지였다.

 

지금도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 아버지와 내가 책상에 앉아 에이, 비이, 씨이를 복창했던 그 순간이 말이다. 웬일인지 그려지는 장면은 아버지와 내가 책상에 앉아 있는 뒷모습이다. 아버지와 나는 벽에 붙여놓은 나무 무늬 책상에 얼굴을 맞대고 앉아 진지하게 공부를 하고 있다. 스탠드 불빛이 생각나는 걸 보면 아버지가 장사를 마치고 난 늦은 저녁 시간이 아닐까 싶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나에게 영어를 가르칠 정도의 실력이 있는 분은 아니었다. ‘폴리스 사건을 생각해보면 잘못 가르쳐준 것도 있지 않았나 가자미 눈을 뜨고 의심해 보기도 한다. 그래도 아버지는 딸의 공부를 남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분이셨다.

 

세월이 흘러 내가 고등학교 3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 양복 저고리 안 주머니에는 항상 꼬깃꼬깃 접힌 대학진학표가 들어 있었다. 당시에는 전국의 수험생들이 모의고사라는 걸 매달 보았고 수험서 출판사에서는 점수에 따라 지원이 가능한 대학과 학과가 적힌 2절지 크기의 표를 발행했다. 매달 나의 모의고사 점수가 나오면 아버지는 그 표를 펴놓고 딸이 어느 대학에 진학하면 좋을까 고민하곤 하셨다. 주위 사람들에게 어느 대학 어느 과가 전망이 밝은지도 끊임없이 물어보셨다. 물론 아버지는 내가 교대에 진학해 교사가 되길 바랬지만, 남들이 자식 교육을 위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가던 시절에 할 수 없이 귀향을 선택했던 만큼, 아버지는 나의 대학 진학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보상심리도 가지고 계셨던 것으로 보인다. 

 

대학시절 어느 날,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울에 올라온 김에 교수님께 인사를 하고 가시겠다는 것이다. 교문 앞에서 만난 아버지의 손에는 이미 자양강장제 한 박스가 들려있었다. 대학 교수님께는 학부모가 큰 용건이 있지 않는 한 찾아가지 않는다고, 이렇게 가시면 교수님이 부담스러워할 거라고, 지금 수업이 있어 연구실에 안 계실거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었다. 아버지는 기어코 교수님 방문을 두드리셨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말 교수님은 방에 계시지 않았다. 다행히 아버지는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조용히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가셨다. 아버지는 그날 교수님께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셨을까?

 

남편은 시댁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다. 마흔도 안되어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는 남겨진 네 아이들의 입에 풀칠하기도 힘겨웠다. 그래서 모두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돈벌이 나섰다. 남편 역시 학비는 물론이고 기숙사비까지 무료인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그는 형제들 가운데 가장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청각실 조교로 일하며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하지만 시험을 일주일 앞두고 기흉으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천만다행으로 상태가 호전되어 시험을 봤지만 전기 대학 지원에서는 낙방을 하고 말았다. 집에서 요양을 하고 있는데 친구가 병문안을 왔다. 친구가 말한다. “정환아, 나 후기지원으로 모대학에 원서 넣으려고 해.” 남편이 말했다. “그래? 그럼 나도 그 대학 원서하나 가져다 줘라.” 만약 그때 그 친구가 다른 대학에 지원했더라면 남편도 다른 대학에 진학했을 것이다. 남편에게 나의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있었다면, 아니 먹고 살기 바빴지만 어머니가 남편의 대학진학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면, 그것도 아니면 뭔 친척이라도 그의 미래에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남편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괴테는 그의 자서전 <시와 진실>에서 말한다.

 

우리의 소망이란 우리들 속에 들어있는 능력의 예감이다. 즉 우리가 이룰 능력이 있는 것을 예고하는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들 바깥에서 그리고 미래의 모습으로 우리 상상력에 그려진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남모르게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하여 열정적인 선취야말로 진정으로 가능한 것을 꿈꾸어 얻은 현실적인 것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그 시절 나의 아버지의 소망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는 나의 어떤 능력을 예감하고 알파벳을 손수 가르치고 모의고사 점수표를 들여다보며 고심하셨을까? 어떤 소망을 이루기 위해 자양강장제 한 박스를 들고 교수님을 찾아 뵈려고 하신 것일까? 지금 나의 아버지의 소망은 무엇일까?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는 줄 알았던 딸이 나약한 모습으로 날개를 접고 쉬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몇 달이면 다시 취직하겠거니 생각했던 딸이 6개월이 넘게 칩거하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지금 나의 소망은 무엇인가? 나의 소망은 괴테의 말대로 나의 잠재된 능력의 예감일 것이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그런 소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소망을 이뤄줄 힘은 무엇일까? 괴테는 매일 새벽 일어나 서서 작품을 썼다고 한다. 역시 소망을 이루어주는 것은 매일의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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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갱
2011.06.19 23:25:47 *.166.205.132
나도 그 구절에 빨간줄 그었는데...ㅋ
비슷한 처지에 있어서인가 싶어요.
좋은 아버지 밑에서 훌륭하게 자라셨네요~
누님, 공부 무지 잘했었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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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6.20 15:00:15 *.35.19.58
무지 잘 하진 못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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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00:55:53 *.139.110.78
우리 아빠도 초등학교 때까지 시험때만 되면 시간을 정해놓고 문제집 뒤편에 있는 시험지를 풀게 하셨는데 난 아빠의 소망이 뭔지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외면했던 게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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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6.20 15:01:03 *.35.19.58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 아버지의 소망이 뭘까 생각해봐.
미선이라면 이룰 수 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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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13:20:54 *.124.233.1
역시 우리 모두 같은 구절에 큰 울림을 얻었네요 ^^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우리 가슴 속에 접혀 있는 질서,
꿈의 씨앗..
우리 모두 저마다의 꽃을 한 송이씩
피워내는 풍광을 떠올리면 코 끝이 찡해져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아직은 황무지 같을지라도
모두가 피운 꽃 한송이 한송이가 모여
멋진 화원이 될 꺼에요.
그쵸 누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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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6.20 15:02:10 *.35.19.58
그래, 경인아!
각자의 꽃이 어떤 모습일지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꽃을 피운 후에나 알게 되겠지.
땡7이들의 화원이 기대되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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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13:26:43 *.45.10.22
아.. 언니도 이 구절에서 멈춰섰구나 .. 
나도 ^^ 
아주 감동적이였어요~!
힘내요 우리 모두!
나도 잠시 쉰다고 하고 싶은데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차마 그 말이 안 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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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6.20 15:03:20 *.35.19.58
주선아, 좀 더 하다 쉬어도 늦지 않다.
쉬는 것도 일하는 것도 다 때가 있는 것 같아.
내가 보기에 주선은 아직 일할 때인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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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
2011.06.21 09:22:00 *.219.84.74
사샤도, 재경이도, 경인이도..나도.
많은 이들이 이 부분에서 공감하고 마음 설레였구나.
그 설렘은 위안이겠지.
미나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그 욕구도 그런 것이겠지.

나도 소망을 통해서 나의 부모님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나의 아이를 통해서 아이에게 바라는 나의 소망이 무엇인지도...
아이게게 바라는 나의 소망이 내 스스로에게 바라는 소망과 거의 흡사!

부모는 자신이 원하는 소망을 자식을 통해서 꿈꾸는 구나 하는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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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6.23 21:46:51 *.35.19.58
오라버니, 저도 아이가 그저 건강하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데,
시험 점수를 받아오거나 담임 선생님한테 한 마디 들으면 학부모로 돌면해 아이를 잡게 되네요.
오늘 기말고사 봤는데 점수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입니다.
우리 부모님들도 그랬겠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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