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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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었다. 원시의 계곡을 사납게 내리 달리던 물길이 콘크리트 벽에 막혀 숨을 죽이고 있다. 물이 소리를 잃었다. 그저 가볍게 스쳐 지나는 바람일 뿐인데도 수면은 쉽게 흔들렸다. 조용한 아침이다. 차도 사람도 없는 용담호 휴게소에 덩그러니 혼자 놓여졌다. 담배생각이 났다. 폐부 깊숙이 들어갔다 뱉어진 연기가 가벼운 바람을 타고 흩어져 갔다.
어찌 용담龍潭이라 불렀을까.
비행기도 인공위성도 없던 시절, 누구는 일제시대부터 댐을 지을 계획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조선관찰사를 지낸 이서구는 미리 알아보았다고 했다. 전해지는 말에 그는 천리안을 가졌고, 축지법을 썼다고도 했다. 전주 감영에 앉아서도 첩첩 고원 진안 땅을 내려다보았고, 골짜기들을 굽이지어 흐르는 물에서 용을 보았다고도 했다. 언젠가는 전주 사람들이 이곳의 물을 먹고 살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한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소문은 사실이 되었다. 전주와 익산 그리고 군산까지 이르는 전라북도 인구의 70퍼센트가 이 물을 먹게 되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다본 호수의 형상은 여지없이 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십여 년 전.. 수자원공사가 담수를 막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군산에 살던 선배 한 분과 같이 진안읍 여관방을 하나 얻어두고 한 열흘간을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소문을 믿었다. 똥통도 치우지 않은 채로 무슨 물을 담으려하느냐는 주민들의 말을 고지대로 믿었다. 막대기 하나 들고 이미 보상이 끝나 허물어져 가는 빈집들과 한때는 마을이 있었던 폐허 속을 뒤지고 다녔다. 바람 같은 일이었다. 금당 마을 어디쯤에서 의심나는 몇 군데를 꼽아두었고, 날을 잡아 포크레인을 샀다. 사람들이 몰려왔다. 방송국의 몇몇 낯익은 기자들도 먼 곳까지 바쁜 걸음을 하였지만, 허탕이었다. 입술에 침이 바싹 마르고, 그날따라 날은 일찍도 어두워져 갔지만 삽날은 끝내 모인 사람들의 눈길을 외면하고 말았다. 포크레인 삽질에 악취를 풍기며 푹 터져 나오는 드라마 같은 똥통은 끝내 찾아지지 않았다. 그때 똥줄이 타고, 얼굴이 똥색이 되어버렸던 기억이 떠오르자 웃음이 나왔다. 다 지난 일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 댐의 문비가 내려졌고, 담수가 시작되었다. 아직 환경기초시설도 준비되지 않았고, 지장물 철거도 진행 중이었지만 수자원공사 측은 더 이상은 미룰 수 없고, 다시 되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라며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담수가 시작되면서 하나씩 마을이 잠기고, 길도 끊겼다. 초등학교 운동장도.. 오래된 당산나무도.. 오동마을 호학마을 갈두마을 장음마을 그 다음에는 모곡마을... 망향공원에 사라진 마을의 이정표들이 비석처럼 늘어서 있다. 그 한켠으로 모정국민학교 사모비가 세워져 있다. 비석 옆면에 다시 부를 사람도 없는 교가가 적혀져 있다. 운장산 높은 정기 이어 받들어...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더러는 문화마을이라고 산중턱에 새집을 마련해서 남은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자식들이 사는 도회지로 나갔고 봉동 어디쯤에 집단 정착지로 옮겨가기도 했다. 처음 몇 해 동안은 명절 끝이면 이곳에서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해가 갈수록 수가 줄더니, 아예 소식도 끊긴 사람들도 있고 더러 영영 볼 수 없는 이도 있었다. 그 빈자리에 속절없이 물이 차올랐다. 깊어진 물속으로 더는 마을도 보이지 않았고, 철마다 나물을 뜯고, 소를 풀어 먹이던 산봉우리 턱 끝까지 물이 채워졌다. 생각해보면 기가 막히는 일이지만, 더 이상 하소연 할 곳도 없고.. 그래봐야 어찌 될 일도 아니었다. 물빛 위로 섬처럼 남겨진 봉우리들의 그림자만 남았다.
소도 잃고 덩그러이 놓여진 연자방아를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용담으로 흘러든 물길을 거슬러 가는 길이었다. 정천을 지나 진안읍으로 가려면 상전을 지나야 한다. 누가 알았으랴. 상전이 참말로 벽해가 될 줄이야. 그저 옛 사람들이 흘린 이야기로만 여기고 흘려들었던 말이었는데.. 더는 뽕나무 밭은 남아 있지 않고, 길 따라 간간이 들어선 팬션 몇 개가 지나는 이의 발길을 불러 세웠다.
물길을 따라 몸을 맡기고 흘러간다는 것.. 시간을 잊고.. 사람이 낸 길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린 빗물들이 지어놓은 길.. 고작 몇 백 년 된 인간의 발걸음이 아닌... 수천 년을 흘러온 신의 섭리로 지은 길은.. 가장 낮은 길이었다. 그래.. 하늘에서 내린 빗방울들이 지상에 내려와 깊은 골짜기들을 타고 모여들었다. 낮은 곳을 찾아.. 더 낮은 곳을 향해 아래로 내려갈수록 만나고, 강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길은 산을 만나면 구멍을 내기도 하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지어 건너기도 했지만, 강물은 그런 법이 없다. 산을 만나면 굽어 돌았고, 막히면 채워 넘었다. 숨죽이고 인내하며 자신을 채우고 또 채워서.. 기어이는 벽을 넘어 흘렀다. 오롯이 제 갈 길을 찾아갔고, 그때 들리는 소리는 계곡의 골짜기를 재잘거리던 소란과는 달리 깊이 우는 울음소리였다. 여울에서 물은 날을 세워 울었고, 다시 소에서 느긋한 걸음을 하였다. 달릴 줄도 알았고, 쉴 줄도 알았다.
용담에서 기나 긴 침묵의 시간을 기다림으로 채운 금강은 충청도 금산으로 이어졌다. 신용담교 다리를 지나 별이 쏟아져 내린다는 부남 땅으로 내어 달리는 물길이 다시 소리를 내었다. 비로소 제 갈 길을 찾고서야 깊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어느덧 걸음은 천년송 바위섬 앞을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