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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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사람이냐?
-Rewriting (1)-
“야! 니가 사~람이냐?”
비명같은 외침이었다. 툭하면 나타나는 동네 깡패가 왔나 싶어 나가보니, 수납창구 앞에서 사람들이 웅성대고 있었고, 중년여성이 전화기에 대고 절규하듯, 악을 쓰고 있었다.
“너는 왜 엄마를 돌보지 않는데? 엄마 치료비는 왜 나 혼자 내야 되냐구?”
병원이 떠나갈 듯 시끄러웠지만 그녀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야, 됐어, 됐다구! 오빠면 다냐?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끊어!”
휴대전화기를 닫는데 저런 소리가 날 수 있을까? 의아해 할 정도로 탁~ 소리를 내며 끊어버린 여성은, 숨을 크게 몰아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던 직원들이 싱긋 웃는다. 매우 익숙하다는 표정이었다. 창구의 시끄러운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질문은 남아 있었다.
‘니가 사람이냐고?’‘사람이 뭔데?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 건데?’
그녀의 악에 받힌 외침은 ‘사람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진화했다.
응급실로 알콜중독 환자가 각혈을 하며 들어왔다.
만성폐쇄성 폐질환과 결핵에, 기흉(가슴에 공기가 찬 병)까지 있었다. 상태가 위독하여 중환자실로 옮기고 격리치료를 했다. 우울증과 헛소리를 하는 등 정신질환 증세도 보였다. 그러나 간병인도 보호자도 없었다. 신원을 조회하여 간신히 친동생과 전화연락이 닿았으나 형의 상태를 말하니, 보호자 자격을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병원에서는 흔히 접하는 장면이다.
이틀 전, 병실에서는 할머니 한 분이 의료진의 눈을 피해, 연필깍이 칼로 손목의 동맥을 끊었다. 자살미수. 응급조치를 하고 가족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다. 치료비 지원 측면에서 본다면 가족이 없는 편이 낫다. 실질적 도움은 주지 않으면서, 서류상으로만 직계가족이 존재하면, 사회안전망 차원의 정부지원을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병원에 있다보면 알게되는 것들이 있다. 보호자 없는 독거노인으로 살다가, 치료가 어려운 상태로 방치되어 응급실에 오는 노인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독거노인 대부분은 가족이 있지만 그 가족들 대부분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렵게 연락이 되더라도 보호자로서 자격을 쉽게 포기한다는 것을.. 이 또한 병원에서 흔히 접하는 현실이다.
삶의 생노병사가 순환되는 병원은, 인간 내면세계의 진실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거대한 인생극장이다. 장례식장에 조문을 가면 자신의 남은 삶을 성찰하듯, 병원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사람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던져준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 앞에서 가장 매력적인 해법을 제시한 사람은,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던 맹자(孟子:B.C.372~B.C.289) 다. 맹자는 공자가 죽은 뒤 백년 좀 넘어서 탄생했는데, 왕도정치를 주장하며 전국시대 중기에 살았던 철학자이자 정치가다.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측은’의 마음이란 갓난아기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 아이를 구해야겠다고 반사적으로 느끼는 안타까운 감정이다. 겨우 기어다니는 어린아이가 한 발짝만 떼면 우물에 빠지려는 순간을 목격했을 때, 우리는 아이를 구해야겠다고 느끼고, 몸을 날려 아이를 구하려 한다. 맹자는 이 일이 ‘아이의 부모와 친분을 맺기 위해서도 아니고, 마을사람들과 친구로부터 어린아이를 구했다는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라고 말했다.
인간은 관계망속의 존재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고 타인을 염려하는 능력이다. 삶의 시련을 겪어본 사람은 시련 속에 있는 사람을 보며, 자신의 일처럼 마음아파 한다. 부모가 아프면 길거리의 노인들이 무심하게 느껴지지 않고, 강아지를 키우고 있다면 집을 잃고 헤매는 강아지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인 공감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이해타산이 개입하기 이전의 마음이며, 남의 불행을 무심하게 보아 넘기지 못하는 마음이다. 순간적으로 움터 나오는 이 새싹 같은 마음이 바로 맹자가 착하다고 하는 본성, 즉 성선설의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하고 돈이 없어서, 선한 바탕의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가지 못한다고 여긴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사람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욕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성찰하며 사람의 길을 가게 하는 것도, 사람의 길을 가로막는 징글징글한 장애도 인간의 욕망이다.
삶과 죽음은 속깊은 친구와 같다. 친한 친구에게 속마음을 보여주듯, 죽음 앞에서 인간은 결코 가식을 떨지 않는다.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했던 최희주님(54세) 은 임종 직전, 자신의 죽음을 나눔의 삶으로 정리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방광암 4기 환자였다. 대장암을 앓던 어머니를 위해 자신의 사회생활과 결혼을 포기하고 간병을 했는데, 갑작스런 하혈로 검사를 했다가 방광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10년이 넘는 어머니 간병으로 인해, 그동안 숨어있었던 자신의 병과 모든 스트레스가 건강을 악화시킨 것이다.
세 번의 수술과 힘겨운 항암치료를 받던 그녀는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스스로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겼다. 그리고 병원비와 장례비를 제외하고는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아이들을 위해 써 달라며 평생 모은 재산 1,500 만원을 기탁했다. 적은 돈이지만 힘들고 고통에 처한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녀는 평화로운 미소와 함께 조용히 자신의 남은 삶을 정리하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니가 사람이냐?” 고 외치는 속마음에는 ‘왜 너하고 나는 공감이 안 되느냐?’는 절망스러움이 숨어있다. 세상 곳곳에서 들려오는 절망의 외침을 들으면, 성악설性惡說 이야말로 인간의 존재를 규명하는 것이 아닌가 의아해 할 때도 많다. 그러나‘지금이라도 나눔을 실천할 수 있어 기쁘다’며,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진 것을 모두 내놓는 말기암 환자의 모습은,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조용히 대변하고 있다.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선한 바탕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함께 느끼는 공감의 능력을 통해, 타인과 연결하는 것이 인간의 본모습이라는 것을,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