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로운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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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사랑이라고 한다. 지혜에 대한 사랑. '사랑은 동사다'. 이 문구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TV광고 카피로 나오면서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끌지 않았나 싶다. 이쯤에서 그리스인들이 사랑한 삼단논법을 철학의 정의에 적용하여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사랑은 동사다.
철학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동사다.
철학은 뭔가를 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철학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물음은 "철학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라는 표현으로 바꿔 보는 것이 더 적합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철학은 어떤 행위를 통해서 구체화 되는가. 버트런트 러셀은 그의 책 <서양의 지혜>에서 "과학은 알려진 사실들을 설명하고, 철학은 근본적 물음에 관해 사색한다."라고 철학에 대한 행위를 정의했다. 정리해보면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고, 이 사랑은 사색(思索)을 통해서 구체화 되는 것이다.
이렇게 철학을 정의하고 나서 자문하여 본다. '나는 철학을 하고 있는가?'
그 물음에 답이 선뜻 떠오르는 대신 '철학이 뭐였지?'라는 물음이 다시금 슬며시 고개를 든다.
대학에서 교양필수로 철학개론을 배우고, 최근까지 몇 권의 철학에 관한 책들을 보았음에도 아직까지 철학과 나의 관계를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 얼핏 철학으로 인생을 논한다는 것은 지당한 일인 듯 하다가도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음을 절감하는 대목이다.
철학자가 아닌 일상인으로서 내가 철학을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일상에서 철학적 사색을 하는 것은 어떤 명제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어느 날 뜬금없이 '존재란 무엇이냐',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이냐'하는 물음을 심각하게 던져본다고 해서 철학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나의 일상에서 '철학함'의 시작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는 것이 선결의 과제인 것이다.
살다 보면 우리는 늘 이런 생각에 젖곤 한다. '이렇게 아등바등 살 필요가 있을까?" "왜 이렇게 사는 것이 재미가 없지"라는 회의(懷疑)말이다. 하지만 이런 회의(懷疑)적인 생각을 곰곰이 더듬어 보면 그 밑에는 '인생은 무엇일까?'라는 제법 철학적인 의문이 깔려 있는 듯 하다.
다시 말해 일상의 회의(懷疑)에 철학의 가능성이 아낙사고라스의 스페르마타(spermata, 씨앗)처럼 숨어 있는 것이다. 다만 [회의(懷疑)=철학적 사색]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으니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회의가 철학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문득 머리에 드는 혹은 가슴에 깃드는 회의는 그저 흘러가는 일상적인 생각의 한 자락일 뿐이다.
제비가 한 마리 날아왔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이 아닌 것처럼.
나는 회의(懷疑)가 철학적 사색이 되는 매개변수로 '물고 늘어지기'라는 과정을 대입해본다.
회의(懷疑)를 그냥 흘러가게 버려두지 않고 '물고 늘어지면' 그것이 반성이 되고 사색이 되어 철학함의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철학에 대한 정의 그리고 철학적 행위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앞에 두고 내게 다시 묻는다.
'나는 철학을 하고 있는가?'
'그렇다! 나는 철학을 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철학을 해 왔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듯하다.
'철학함'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마땅할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서른 중반 즈음이다.
그 나이가 되도록 '참 재미없이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별다른 고민도 없었고 고민이 없었던 만큼 치열함도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모두가 가는 대학이니 그곳을 가기 위해 말썽 없이 공부했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꿈도 없었다. 대학은 학력고사 점수에 맞추어 학교를 고르고 떨어지지 않을 학과를 선택하면 끝이었다. 적성과 미래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대학을 다니면서는 민주화와 우리 사회의 자유에 대해서 고민하고 술을 마셨지만, 내 자신의 자유와 내 삶의 주인 됨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은 없다. 그 후 졸업을 하고 재벌기업에 입사를 했다.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해서 좋은 인사고과를 받았고 동기들보다 빠르게 승진했다. 좋은 삶의 표본인 것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살았다. 유명 회사의 브랜드와 많은 보수가 내 삶이 지향하는 바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가볍게 살아온 시간이 주는 삶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졌다.
통장의 잔고는 조금씩 늘어가고 있었지만 내 인생의 무언가가 자꾸 빠져나가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이 허전하고 애석했다.
나의 마음은 끈질기게 어딘가 올라가고 싶은 정의할 수 없는 충동이 있었지만 그 충동의 해소를 조직 내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회사에서 주어진 일의 무가치함이나 무용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의 가치와 조직 내의 가치를 조화시켜 가슴을 설레게 할 수 있는 그런 지혜가 나에게는 부족하였고, 가슴 뛰는 무엇을 찾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어떤 힘을 가지고 나를 만들기 위하여 끝없이 기어오를 사다리를 다른 곳에서 찾아야 했다.
그 사다리를 놓치지 않고 기어올라 오늘이라는 시간에 와 있다. 그리고 까마득함이 남아 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며 저녁에 짠 실을 아침에 풀어버리는 페넬로페처럼, 쉬이 찾아지지 않을 답을 두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실을 짜고 풀기만을 반복했던 지루한 시간이었고, 지금도 그것의 어느 중간쯤에 놓여 있는 듯하다.
나로부터 탈레스까지는 2,600여년의 시간이 뒤로한다. 상상력만으로 거슬러 올라가기엔 너무 아득하다. 그래서 더욱 실감이 없다. 나는 철학에 관한 책을 보기 전에 많은 것들에 대해서 유식해지고 싶었다. 머리 속에 많은 것을 남겨서 삶의 단면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현학적 멋을 부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수천 년 전 죽은 선각자의 죽어있는 지식에 숨을 불어넣지 못할 그저 그런 생각 따위일 뿐이다.
유식해 지기 위해서 수십 권의 어려운 철학 책을 읽는다는 것은 보석을 캐려고 돌밭을 쑤시다가 종내 까무러치는 그런 헛된 노력에 다를 바가 없다. 2,600여년 쌓인 철학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끝내 절망하여 돌아서야 하는 돌 밭을 쑤시는 보석 찾기와 같음이다.
철학의 출발은 책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 내 속에 떠도는 소리를 엿듣고, 가슴으로 느끼지는 저 깊은 곳의 나의 문제를, 나의 사유를 통해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철학의 시작이다. 그리고 물고 늘어지는 사유의 끝에 이르렀다 생각될 때 도움이 필요하다면 철학자들의 사유를 찾아보고 나에게 대입해 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서 한층 성숙하고 폭넓은 시야와 새로운 시각으로 처음부터 다시 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내가 철학자가 아닌 일반인으로 철학을 대하는 길이리라.
대 철학자 러셀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원래 철학이 시작된 건 인생의 고민거리를 풀어 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철학은 일찍이 그리스 사람들이 그랬듯이 순전히 가보고 싶어서 하는 탐험 여행처럼 오직 알고 싶어서 시도하는 지적 모험이다."
러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삶의 고민에서 시작하자라는 나의 정의가 일정 부분 잘못 된 것 같다. 하지만 나의 다름을 격려하고 싶다. 비록 대 철학자가 기록한 철학에 대한 명제이지만 깊게 생각한 나의 생각에 맞지 않는다면 버릴 수 있는 것이 철학을 하는 목적이 아닐까. 그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것 또한 철학의 사대주의와 다를 바 없는 것 아니겠는가.
물고 늘어져 개똥 철학이라도 가지고 산다면 그냥 휩쓸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조차도 모르는 부유하는 삶보다는 낫지 않을까. 철학은 그 어떤 특정 분야의 과학처럼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어떤 문제를 놓고 그것을 투시하고, 애기하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기가 다짐할 것을 스스로 깨달아가는 일종의 자기만의 '퍼포먼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철학은 일상에서 생을 물고 늘어지는 삶에 대한 사랑이고 이것은 사색이라는 행위를 수반하는 동사이다.
우리의 연구원 과정에서 7월의 타이틀이 <철학>이 아니고 <사유의 방식>이 됨을 조금 이해하면서 글을 마친다.
<끝>

소크라테스에게서 '음미하는 삶'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참 편안했습니다.
'음미하는 삶'을 살아야 겠다 라는 욕심이 지금까지의 생각이 아니었는가 짐작해봅니다.
음미할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혜가 책에 있지 아니하고 현실에 있음을 조금은 알 것같습니다.
나를 통해서, 내가 ( )를 통해 노래하고, 그것으로 사람들과 어울어지는 것이
음미하는 삶으로서 현실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상계에만, 책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아니 될 이유입니다.
제가 오늘 구하고 있는 것은 ( )를 채울 질료입니다.
무엇을 통해 나를 노래하게 할 것이냐?
그것을 찾는 시간이 재미있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P.S : 늦게 시작한 인생이니 건강을 잘 챙겨서 오래 살아볼 작정입니다.
반이 끝났다기보다는 1/3정도 끝났다고 봅니다. 과욕인가요?
더위에 건강 잘 챙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