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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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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4일 09시 25분 등록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나는 그 이름도 싱그러운 여대생이었다. 기숙사 통금시간 즈음에는 캠퍼스와 기숙사를 연결하던 구름다리 아래에서 이별이 아쉬운 선남선녀들의 입맞춤이 끊이지 않았던 그 때, 정문을 무사 통과할 수 있는 남자는 오직 교수님과 중국집 철가방 뿐이었던 그 시절, 어색한 화장과 어울리지 않는 옷으로 멋을 내어도 예쁘기만 한 풋풋한 처녀들로 가득한 그 곳, 여대 캠퍼스에서 나는 20대 초반의 시간을 보냈다.

 

나의 전공이었던 독어독문학과에는 세 개의 학과 동아리가 있었다. 독일문학의 진수를 알려준다는 독일문학회, 심오한 독일철학을 탐구한다는 독일철학연구회, 그리고 원어 연극을 하는 독어연극회였다. 동기들의 대부분은 만만한 독일문학회를 선택했다. 그곳에서 그녀들은 아마도 괴테나 카프카의 작품을 읽었을 것이다. 아주 소수인 몇몇은 독어연극회에 가입해 매년 가을에 열리는 옥토버페스트에서 원어 연극을 발표하기 위해 연기와 독일어를 연마했다. 나는 독일철학연구회를 선택했다. 왜 그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지적 호기심과 약간의 허영, 그리고 남들과 다른 것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어우러져 나는 이해하지도 못하는 헤겔 철학서를 끼고 선배들을 쫓아 다녔다. 독일철학연구회장이 된 3학년 때는 후배들과 히틀러와 나치즘이란 주제로 학술발표회도 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주제는 철학회보다는 역사회에 어울리는 것이었지만 그때 나는 제법 진지했다. 열심히 공부했고 발표회도 치밀하게 준비했다. 아마도 그때가 나에게 철학이 필요한 첫 번째 시간이었나 보다.

 

세계의 지성이라는 버틀런트 러셀은 그의 저서 <서양의 지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연구할 때, 우리는 다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배우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문제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들이 철학을 다루는 방법이 그들의 삶의 방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철학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법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전세집을 전전하다 내집을 장만하느라 나는 오랫동안 철학이란 것은 잊고 살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더 빨리 달려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 잘 사는 방법이라고 확신했다. 작은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더 유명하고, 더 크고, 더 월급을 많이 주는 회사로 전직했고, 적당한 나이에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직장생활을 감안해 네 살 터울로 아이도 둘 낳았다. 직장에서는 순조롭게 승진도 했고 나름 인정도 받았다. 원하는 많은 것을 가진 어느 날, 마흔을 코 앞에 둔 나는 길을 잃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의 삶은 허깨비 같았다.

 

융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는 중년이 되면 붕괴한다. 그리고 내면을 향해 들어가도록 강요한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도 나이를 먹어 나날의 삶에 대한 관심이 심드렁해지면 사람은 내면적인 삶에 눈을 돌리게 된다고 말한다. 나의 페르소나가 붕괴되었는지 나이를 먹어 나날의 삶에 심드렁해졌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면의 나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너 지금 행복하니? 아니라고? 네가 원하는 것을 가졌는데 왜 행복하지 않다는 거야? 그럼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뭔데? 어떻게 살고 싶어? 너 괜한 배부른 소리 하는 건 아니니? 지금 정신차리지 않으면 네가 가진 것들을 모두 잃을 수도 있단 말이야내 안의 나는 묵묵부답이었다. 나에게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 다시 다가온 것이다.

 

길을 잃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나침반일 것이다. 나는 속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나에게 안식년 휴가를 선물했다. 그리고 방향을 찾기 위한 사색과 고찰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동서양의 철학자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방식을 이야기해주었다. 공자는 벼슬에 나가면 를 실행하고 물러서면 조용히 를 즐기라 한다. 출세라는 것에 연연할 필요가 없으니 욕심을 버리라 충고하는 듯 하다. 마르크스는 철학자는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을 뿐이다. 참다운 과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의 말을 나의 삶에 적용해본다. 철학을 탐구하며 진정 해야 할 일은 나의 세계를 변혁하는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혼란스럽다. 20년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쉬지 않고 오른 산의 정상에서 이 산이 아니었나?’란 당혹감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다. 보다 신중해야 한다. ‘이 산이 정말 내가 오르고 싶은 산일까? 내가 과연 오를 수 있을까? 아이들도 키워야 하고 돈도 필요한데 좀더 쉬운 산을 빨리 올라야 하지 않을까? 정말 이산을 오르고 나면 정상정복의 희열감을 맛볼 수 있을까?’ 오르고 싶은 산은 어렴풋이 보이는데 끊임없는 상념들이 나를 괴롭힌다.

 

오늘도 나는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 인류의 고통에 대한 연민으로 자신의 인생을 꾸려왔다는 러셀은 인간에게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얻은 해답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떠오른 질문일 것이다. 정답은 없다. 내 마음 속의 문제들에 대해서 사색하고 나의 주변을 성찰하며 조금씩 나다운 삶을 꾸려나가면 된다. 각각의 철학사조가 역사적 배경의 영향으로 조성되었고 과거의 사조를 반영하고 또 극복하며 이루어졌듯이, 나의 철학도 그리 될 것이다. 내가 처한 상황에서 과거의 나를 기반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조급해하지 말자. 헤겔이 말하지 않았는가?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이 저물어야 날개를 펴듯이 누구도 앞날을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다. 지나간 다음에야 우리는 그것의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나에게 떠오른 질문들이 나의 길을 인도해 줄 것이다.

 

당신에게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 찾아 왔다면 바로 지금이 당신의 삶을 변혁할 때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 과정을 즐긴다면 당신의 길을 어렴풋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뒤를 돌아보지 말고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라. 그 길이 진정 당신의 길인지는 걷다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니.

IP *.35.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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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04 11:05:52 *.45.10.22
언니의 여대생 시절을 엿본듯 
내가 좋아하는 뚜벅 뚜벅 걷기가 마지막에 나와서 반가웠다는
emot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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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
2011.07.04 14:01:19 *.142.255.23
언니 나도 철학이 필요한 시기가 온듯요... 변혁이 필요한..
오늘 오면서 서양철학사 서문을 읽었는데... 왤케 가슴이 뛰는지.. 빨리 읽어보고싶다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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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04 14:27:27 *.124.233.1
이곳에 모인 우리는
모두 인생의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해 모인거죠.
누나와 형님 그리고 사부님을 바라보며
현실 속에 함몰되지 말아야 함을 느낌니다.

사부님께서 제게 달아주신 댓글의 내용이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되려고 하네요.

평지에 머물지마라.
그러나 너무 높이 오르려 하지마라
세상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
그곳에 머물러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다면
언젠가  홀로 정상에 오르게 되리라.


저는 지금 너무 낮은 곳에 처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정체도 모를 뭔가를 끊임없이 성취해 나가는 것을
선행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네요.

고마워요 누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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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늑대
2011.07.04 15:05:31 *.219.84.74
길은 정해져 있었다.
내가 걸어갈 길은 빤히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빤한 길에서 나침반을 자꾸 바라보았다.

길을 잃었으면 더 확실 했을것을
빤한 길 위해서 나침반을 보면서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랐다.

'나침반', "이 길이 아닌가봐" 하는 문구를 보니
 떠오르는 한때가 있어서 그때 마음을 따라서 끄적여본다.
재경아 힘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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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05 01:32:04 *.160.33.89
10년을 바친 인생에서 '이 길이 아닌가봐'  라는 경우는 있다.  
20년을 바친 인생에서 '이 길이 아닌가봐'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두렵고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평생을 바친 길에서 ' 이 길이 아니가봐' 할 수는 없다.  
그것이 이미 그의 인생이었기 때문이다.   
바다에 이르는 길이 어디 하나 뿐이더냐 ?  
산을 넘어 가는 길도 있고, 강 따라 가는 길도 있고, 긴 길도 있고
도는 길도 있고 짧은 길도 있다.     끝까지 가면 닿게 되어 있다. 
어느  길에나 위대함으로 가는 길을 있는 것이다.   끝까지 가면 바다에 이른다.  
그러므로 가다가 되돌아 와 갈림길에서 울더라도 다시 다른 길을 찾아   쉬지 말고 가야한다.  
갔던 길을 되돌아 오는 것도  가는 길의 한 부분이다.  헤매지 않고 어찌 처음가는 길을 찾을 것이냐.  
갈림길에서  지쳐 주저 앉아 있지마라.  일어서 걸어라 . 
그곳을 벗어나 계속 걸으면  바다에 다다르게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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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갱
2011.07.05 08:32:40 *.216.137.129
명확한 메세지네요~
멈추지 말고 걸어라!

독일철학연구회 회장님이셨다구라~
그런 과거가 있으셨군요.
음미하는 삶을 위해 노력하는 누님의 모습이 더 잘 이해가 되네요.
삶에 대한 진지함과 더불어 즐기는 정신, 유머가 누님의 무기!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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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곤
2011.07.05 15:39:13 *.87.61.225

그대의 글과 여러 사람들의 댓글을 읽고 나니 문득 두 가지가 생각나네.
하나는

니체가 말한 명언.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고병권(내 이름과 비슷하지.) 천개의 눈, 천개의 길을 시간날 때 음미하면서 읽어보면 좋을 것 같네.

 

또 하나는 김민기의 노래 봉우리’.

노래도 들으면 가슴을 울리지. (유투브: http://www.youtube.com/watch?v=9INbCyTf_bM)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내가 전에 올라가 보았던 작은 봉우리 얘기 해줄까?
봉우리
...
지금은 그냥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때 난 그보다 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고는 생각지를 않았어
나한테는 그게 전부였거든...
혼자였지

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 거야
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까
?
얼마 남지는 않았는데
...
잊어버려
!
일단 무조건 올라보는거야

봉우리에 올라서서 손을 흔드는거야 고함도 치면서
지금 힘든 것은 아무 것도 아냐
저 위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늘어지게 한숨 잘텐데 뭐...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저기 부러진 나무등걸에 걸터 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작은 배들이 연기 뿜으며 가고

이봐 고갯마루에 먼저 오르더라도
뒤돌아 서서 고함치거나
손을 흔들어 댈 필요는 없어

난 바람에 나부끼는 자네 옷자락을
이 아래에서도 똑똑히 알아 볼 수 있을테니까 말야

또 그렇다고 괜히 허전해 하면서
주저앉아 땀이나 닦고 그러지는 마
땀이야 지나가는 바람이 식혀주겠지 뭐
혹시라도 어쩌다가 아픔같은 것이 저며 올때는
그럴땐 바다를 생각해
바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구
...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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