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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닭이 울기 전까지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죽마고우 크리톤이 자신의 죽음을 만류하려고 찾아온 순간 논쟁을 벌이면서도 어떠하였을까.
나가야 한다는 정당성.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망.
살아온 세월의 회고.
아니면 바위 안에 창살 하나가 그의 자유를 그의 신념을 그의 사상을 막을 수 없음에 따른 사람들에 대한 조롱과 희열.
탈출 제의에 대한 달콤한 유혹을 뒤로하고 독배를 수용한 희대의 철학자요 사상가.
그는 무엇을 우리들에게 이야기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의 사상이 무엇이기에 시대를 뛰어넘은 명료한 주제로써 우리에게 지금도 다가오는 것일까.
한사람이 있었다.
올리브 나무 내려쬐는 뜨거운 뙤약볕 아래 지금도 그렇듯 무심히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애써 붙들고 질문을 해댄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시는가?”
“그곳에 가면 무엇이 있는가?”
“왜 살아가는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당신이 생각하는 정의가 무엇인가?”
“진리에 대해서 당신이 생각하는 바는?”
시대를 너무도 앞서간 그의 이 같은 질문은 사람들을 오히려 당황하게 만들었다.
“왜사냐니?”
“무엇 때문에 사냐고?”
“정의가 무엇이냐고?”
“그런 질문을 하는 저의는 무엇인가?”
스스로의 생각과 자문자답을 요구하는 이 같은 혁명적인 질문은 오히려 대중들을 선동 한다는 죄목으로 결국은 그를 법정까지 서게 하는 사태까지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무서운 것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자각하게 만든다는 것이었기에.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은 거울이 발명되고 난 다음부터라고 하였던가.
그래서인가.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이 어쩌면 타인과의 비교를 넘어선 또 다른 무엇인가가 될 수 있기에, 이 같은 거울의 출현은 인류 역사의 최대 비극 이라고 누군가 이야기 했었던 것인가.
태생적으로 우리의 눈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시각은 내면이 아닌 외부로 도출되어 있다.
덕분에 타인에 대해서 결점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볼 수 있고 그것에 대해 비평과 비난과 질시를 누구나가 할 수 있다.
반면 자신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어떤 놈인지는 타인의 시각에 의해서만 전달 받을 수 있었다.
신화속 나르시스가 강물에 뛰어들었던 이유는 한 번도 제대로 자신에 대해서 볼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사태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에게 나에게 진정 그는 다음과 같은 화두를 던졌다.
“너 자신을 알라.”
…….
나를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를 알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일까.
모두들 앞만 보고 전진을 하며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데 객관적인 역사를 돌아보는 작업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나를 안다는 것은 어쩌면 목숨을 걸만큼 위험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를 안다는 것은 어쩌면 치명적인 유혹으로써의 파국으로 치닫는 결과일수도 있다.
그렇기에 진정 나를 돌아본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고 두려우며 시간이 소요되는 일일수도 있다.
그로인해 나를 돌아보는 작업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어느 해 나를 알기위해 비어있는 하얀 종이에 스무 장의 자신의 살아온 삶을 기록한 적이 있다. 느낌은 그저 그러하였다.
다음으로 그 스무 장의 나의 과거를 오십 장으로 늘리는 작업을 하였다.
오십 장? 무엇을 적어야 되지. 골치가 아프고 막막하다. 내가 무슨짓을 하고 있는 거야.
삼일 낮밤을 그 화두를 붙들고 끙끙 씨름을 해대었다.
그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떤 배경을 가졌으며 가족과는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성장을 하였으며,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고 어떤 가치관과 꿈을 가지고 있느냐는 인생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을 하여야 하였다. 힘들고 외로운 작업이었다. 나를 알아간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인내를 요하는 작업이구나 라는 것을 정말 절실히 깨닫게 하는 시간 이었다. 그렇다고 이를 통하여 나를 진실로 알게 되었을까? 대답은 No. 하지만 이 작업으로써 내가 발견할 수 있었던 한 가지가 있었다.
‘콤플렉스 많고 덜떨어진 나 자신을 결국은 부둥켜안아야 하는 존재는 부모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같이 사는 사람도 아닌 오직 나 자신. 못나고 피하고 싶고 상처투성이인 나를 뜨겁게 안아줄 존재는 결국은 나’라는 화두였다.
그는 이 감옥 안에서 나에 대한 마지막 작업을 하였다.
자신을 알기에 그는 진리에 대한 사명으로 순순히 그 오류와 굴레의 말도 안 되는 죄목에 대항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람은 질문을 통해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통하여 고민을 하고 그 고민을 통하여 해답을 발견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질문을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고 생각게 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어떤 존재로써 인식이 되게 될 것인가?”
“나에게 내려진 죄명은 합당한 것인가?”
“내가 여기에서 나가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횃불을 전파하는 것이 또 다른 사명이요 또 다른 기회라고 생각하는가?”
“그럼에도 나는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순순히 맞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하는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물러나는 것이 옳은 것이고 드러내는 것이 거짓인가?”
어쩌면 너 자신을 알라는 화두는 다가올 내일의 끊임없는 증명을 해나가야 하는 개개인들의 숙제에 대한 해답일수도 있으리라.
그렇기에 그는 감옥에 있더라도 결코 그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물결의 흐름에 몸과 정신을 맡겼다.
장자의 나비의 꿈처럼.
속박이 속박이 아닌 절망이 절망이 아닌 자유와 해방의 공간을 그는 스스로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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