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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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레이스를 포함하여 지금까지 스무 권의 고전을 읽었다. 다양한 고전 들을 통해 신화와 역사 속의 위대한 인물들을 만났다. 어떤 인물은 신화의 세계를 총정리를 하고, 어떤 인물들은 한 시대의 역사를 마치 실로 구슬을 꿰듯 꿰었으며, 또 어떤 인물들은 100살이 가깝게 살아가며 긴긴 삶 속에 굵고 굵은 대작들을 남겼다. 그들의 삶은 너무나 커서 나같이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감히 범접하기 힘든 거리감이 있었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의 삶이 나의 정신적 촉수를 끊임 없이 자극했다. 새롭게 거듭 시작해야 할 마흔 넷이란 이른 나이에 저물어간 사람, 바로 스피노자다.
평소에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정리할 수 없었던 어떤 생각의 물결이 책의 한 구절을 통해 알맞은 이름을 얻게 되는 짜릿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또한 여기저기서 주워 듣거나 읽은 내용들이 그 한 구절을 통해 꿰어 맞춰지는 느낌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무의식 속에 접혀져 있던 생각의 씨앗들이 밝은 의식세계로 찾아 들어오고, 배움에 대한 원류를 발견하며, 가슴 속을 꽉 막고 있던 삶에 대한 고달픔의 바위를 밀어내고 그 틈 사이로 비춰지는 긍정의 환희. 그를 통해 나는 '잃어버린 나의 마음'과 만날 수 있었다.
"정신의 불건전함과 불행은 대체로 변하기 쉬운 대상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데서 생긴다...위대하다는 것은 인류 위에 군림해서 타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무지한 욕망의 편파성과 공허함을 극복하고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다."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일이 어렵다고 여겨졌다. 그 까닭을 곰곰이 헤아려 보니 그 속엔 사람들을 향한 나의 숨은 기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해주길 바라는, 강도가 아주 센 욕구였다. 물론 이러한 마음은 인지상정(人之常情), 즉 사람이 가지는 보통의 마음이나 생각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기대가 스피노자가 말한 불행을 만드는 씨앗이다. 사람의 마음이야 말로 변화무쌍(變化無雙)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변하기 쉬운 사람의 마음은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 다시 말해 '영향력의 원' 밖의 일들이다. 여기에 집착하게 되면 감정상태는 사람들의 작은 기분과 행동들에 좌지우지 되어 버린다. 이와 같은 어긋난 기대와 삐뚤어진 집착으로 인해 파괴되는 관계가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변하기 쉬운 대상을 향한 나의 시선을 어디로 돌려야 할까? 바로 '나 자신'이다. 상대를 바꾸려는 시도를 멈추고, 내가 할 수 있는 '영향력의 원' 안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상대가 반응하든 하지 않든 내가 나의 상황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방법은 나 자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 먼저 상대에 대한 일방적이고도 그릇된 기대를 거두어 들일 것. 또한 상대방을 향해 일방적으로 쏟아 붓는 나의 이야기에 과감히 정지 버튼을 누르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것.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려고 노력을 기울이고, 그를 위해 진심으로 웃을 것.
"우주적 차원에서 보면 당신에게 닥친 불행이란 궁극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일시적인 부조화일 따름이다."
나는 스스로 모범이 되고 싶었고, 그들에게 귀감이 되어주고 싶었다. 과거의 삶이 지나치게 밖을 향해 있었고, 엉망이었기 때문에 더욱 더 스스로를 엄격하게 통제했고,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의도와는 다르게 내 모습은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독한 모습'으로 비추어졌고, 모든 초점이 '자신만을 향한 이기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엉망이 되어 버린 듯 했다. 스스로 실패라 규정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말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 지금 내가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는 감정은 영원한 실패가 아닌 궁극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일시적인 부조화일 뿐이다.
활시위를 풀어놓고, 활대를 쉬게 할 것. 소통과 공감을 통해 부드럽고 따뜻한 감정과 열린 마음을 갖출 것.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것을 좋아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사랑해온 것을 불쌍히 여길 뿐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과 비슷하다고 판단한 것도 불쌍히 여긴다. 스피노자를 통해 또 하나의 인지상정의 깨우침을 얻는다.
"선과 악은 그 자체를 고찰해 보면 아무런 적극적 의미도 없다. 동일한 것이 동시에 선도 되고 악도 되고 선악과 관계 없는 것도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의 행동을 비웃거나 슬퍼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오직 이해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으로 나는 열정을 인간 본성의 악으로 보지 않고 더위, 추위, 폭풍우, 천둥이 대기의 본성에 속하듯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보다 큰 선을 획득할 희망이 없는 한, 자신이 선이라고 판단한 것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없다."
마음 속 어딘가를 떠돌던 생각이 마침내 주인을 만났다. 언젠가부터 나는 본능을 '삶에 대한 에너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선악이란 판단을 앞서는 것이라 여겼었다. 생명을 향한 욕망과 가능성,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에너지 덩어리라고 생각했었고 이 에너지가 무의식이란 세계의 중심을 이루고 있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이 희미했던 생각이 400여 년 전에 살았던 위대한 철학자와 만나 생기를 얻었다. 이는 또한 '악덕과 미덕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평소 생각을 뒷받침 해주었다. 우리가 보기에 악한 것들은 알고 보면 우리가 생각의 전부라고 오만하게 판단하는 인식과 이성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듯 '자기보존'은 본능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라는 스피노자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하는 대목을 "인간의 모든 행동의 기저에는 긍정적인 의도가 있다."라는 나의 신념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이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행동이나 해로운 행위, 혹은 전혀 생각 없이 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하는 모든 종류의 행동은 본래의 상황에서는 긍정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한 외침, 위험을 떨쳐내기 위한 공격, 안전함을 느끼기 위해 무언가를 숨기는 것이 될 수 있다. 이런 행동들을 묵과하거나 비난하기보다는, 그런 행동을 그 사람의 긍정적인 의도에서 분리해내어 원래의 의도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긍정적이며 변화된 선택을 추가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낫다는 의미를 가진 신념이다. 이 신념은 내게 삶과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안겨준다. 개인적인 지적 신념이 역사 속 위대한 인물의 응원과 지지를 받았을 때의 그 신명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자유인은 죽음을 가장 적게 생각한다. 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삶에 대한 긍정, 심지어 죽음에 대한 긍정조차도 가르쳐준다. 어리석은 사람은 늘 외부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릴 뿐만 아니라 내면에서 꽃 향기처럼 차 오르는 마음의 참된 행복을 느끼지 못한 체, 수동적 삶이 끝남과 동시에 그 존재도 끝난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신경을 끄고,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인 '자신의 삶' 만을 생각하며 성찰할 뿐이다. 스피노자는 자신이 주장했던 그러한 삶을 살다 갔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은 믿을 수 있다.
위대한 시인 괴테도 스피노자라는 고요한 공기와 호흡하며 열광적 낭만주의로부터 만년의 고전적인 침착성으로 고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나 또한 스피노자를 통해 '사람을 질리게 하는 치우침'으로부터 벗어나, 그리고 '변화무쌍한 것들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는 데서 오는 삶의 고달픔'으로부터 벗어나 잠시나마 평온하게 숨쉴 수 있는 정신적 여백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나를 넘어서는 보다 큰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존재라는 가능성을 일깨워주었다. 그렇다. 나는 스피노자의 '긍정 심리학'에 반했다.
모든 적나라한 진실을 견뎌내고
아주 침착하게 환경을 직시하는 것,
이것이 자주성의 정상이다.
- 키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