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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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는 개과에 속하는 무리동물이다. 하지만 가끔 무리생활에서 떨어져 나온 외로운 늑대가 생기게 된다. 몸이 약해서 무리에서 낙오되거나 혹은 '왕따'를 당하여 홀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아주 희귀하게 개성이 강해서 무리로부터 스스로 떨어져 나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대부분 홀로된 늑대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권력투쟁에서 패한 보스 늑대들도 구차하고 비참한 삶일지라도 가능한 무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외로운 늑대들 중에서 극한 상황을 견디고 살아남는 늑대들이 있다. 오랜 시간을 특유의 강한 생존력으로 견뎌내고, 어느 순간 다른 늑대 무리의 보스로 변신하는 것인데, 기존 무리의 보스와 싸워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다. 자신만의 생존력을 가지고 죽을 것 같은 고통과 시련을 이겨낸 내공이 그를 새롭게 살게 하는 것이다. 내 마음에 있는 <외로운 늑대>의 메타포이자 내 삶의 모티프이기도 하다.
언젠가 사부님께서 '댓글'을 통해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견딤은 3가지를 포함한다. 가난, 고독, 비존재감 그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가난하고 고독하고 비존재감 속으로 상징되는 10년 동굴 생활이 지나면 자신의 세계를 가지게 된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 세상 하나 . 그때 밥과 존재가 화해하여 하나가 된다.
나는 사부님의 말씀을 통한 배움 하나를 흔쾌히 내 마음 깊이 찔러 넣었다. 그것은 내가 앞으로 그러하리라는 다짐이기도 했다.
요 며칠간의 마음이 공허하다. '공허하다'라는 마음자리를 찬찬히 들여다 보니 '무언가 채우려 하는데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 그 빈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리움' 같은 것이 공허함의 배후에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무튼 이런 공허함의 원인은 요즘 생각하고 있는 '생존 혹은 생존력'이라는 화두에 있다. '홀로된 늑대를 죽지 않고 살게 하는 힘, 나에게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 고독, 비존재감을 견디면서 '바라는 하나'는 무엇인가.
그냥 막연하게 나섰던 길인데 이제는 자꾸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는 마음 속의 질문에 답을 못하고 있는 당혹감 같은 것이 있다.
무엇으로 살 것인가. 나를 설레게 하는, 나를 기쁘게 하는 세 가지 <책, 글, 소통>을 찾았는데 이것들을 무엇을 향해서 정렬시킬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나의 직업, 나의 경쟁력에 대한 열쇠가 될 터인데 쉽지가 않다. 이런 물음을 앞에 두고 있으니 생각하는 이야기가 있다.
치타에 대한 이야기이다. 치타는 우리가 알다시피 땅 위에서 가장 빠른 동물이다. 시속 110~120㎞를 거뜬히 달려 사냥감을 잡아채는 것으로 그 이미지가 선명하다. 치타의 이런 속도의 경쟁력은 정글에서 아주 중요한 핵심이라 할 수 있는데, 역시나 치타의 사냥 성공률은 다른 맹수에 비해 두 배에 이른다고 한다.
치타의 이런 속도는 처음부터 유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가젤 영양'이라는 몸집이 작고 속도가 빠른 먹잇감을 향한 유전적 변이이자 진화라는 것이다. 아무튼 그는 세월을 따라 '필살기'를 만들면서 ‘바람의 파이터’가 된 것이 틀림없다.
나에게는 가젤영양이라는 먹잇감이 보이지 않는다. 나를 진화시킬 그 무엇을 찾지 못하고 있어서, 필요한 생존력을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답답함의 원인은 많이 있겠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진화가 너무나 제한적이어서 유전적 다양성이 나에게는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양한 환경에 스스로를 노출시키지 못하고 안전한 곳만을 지향하여 살아온 삶은 동물원의 우리를 벗어난 나에게 정글에서 생존할 수 있는 생명력을 부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먹잇감을 잡아채기 위한 고민과 진화가 없었으니, 어느 날 찾아나선 울타리 밖의 삶에 당혹감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한편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하지만 이런 위로가 먹잇감을 쥐어주지는 못한다. 동물원에서는 적당한 긴장감과 적당한 포만감이 삶을 위로할 수 있었지만 정글에서는 '적당함'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폼이나 위세는 중요하지 않다. 생존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동물원에서는 으르렁거리는 위세가 사자에게 먹잇감을 주는 경쟁력이었지만 정글에서는 위세를 부린다고 으르렁거릴수록 사냥감은 더 멀리 달아나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나를 지배했던 법칙을 버리고 정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본성과 비기(秘器)를 살피어 깨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듯하다.
가젤은 치타보다 빨라라 살수 있고,
치타는 가젤보다 빨라야 살 수 있다.
이것이 지금 내가 보는 정글의 법칙이다. 나는 무엇보다 빨라야 하는가. 이것은 내가 다시 태어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물음이다. 이런 물음을 앞에 두고 나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이런 저런 고민과 생각 속에서 외로운 늑대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그 하루에는 지금의 고통과 견딤이 남들은 흉내내지 못할 나만의 생존력을 만들어 주고 있다라는 위안과 믿음이 존재하고 있다.
지금의 길은 사부님께서 알려주신 견딤의 지혜와 뚝심이 필요할 때이다.
그러나 그 견딤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치타가 '바람의 파이터'가 되게 하는 매일의 진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외로운 늑대가 고독을 통해 무리의 제왕이 되고, 외로움을 통해 홀로 우는 울음을 합창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리라.


한참 저를 힘들게 하던 주제네요.
하지만 일단 여기까지 오셨다면 우선 축하드려야할 것 같은데요. ^^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해법이 존재하겠지만
전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결국 정해진 목적지까지 무엇을 타고 가느냐의 문제인 거잖아요.
당연히 바로 눈앞에 보이는 '무언가'를 타고 가야겠죠? 그게 뭐든 말이죠.
지금 자신의 손을 기다리는 '현실적' 문제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바로 내 앞에 놓인 '현실적 문제'야말로 내가 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그러나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라고 믿거든요.
'현장'이 중요한 것도 이런 이유때문이겠죠?
참고로 저의 메인현장은 '가정'입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풀어야할 문제들을 '사람'들이 정해준 방식이 아니라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가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숙제이자 놀이죠.
읽고, 생각하고, 실험하고, 기록하는 저만의 방식으로 신나게 놀이를 즐기다보면
나도 모르게 '그곳'에 도착해있지 않을까 믿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가는 하늘의 영역인지도 모르죠.
그치만 마음을 다해 이 숙제를 풀어갈 수 있다면 적어도 제 삶에 대한 후회는 없을 것 같습니다.
늑대님의 현장은 어디인가요?


..당신은 꽃 속에 숨었습니다.
아닙니다.
한 잎의 꽃 이파리 속에 당신이 숨었습니다.
흥분의 도가니지요. 환희와 희열, 가식과 억압으로부터 터지는 봇물 같은 자유가 꽃이지요.
캄캄한 죽음이지요.
미치지 않고 어찌 저 꽃들을 본 답니까.
세상으로 이어진 모든 끈을 놓는 아름다운 자유,
나를 풀어버리는 해방,
견디고 참을 수 없는 광기,
그게,꽃입니다. 이승도 저승도 없는, 삶과 죽음의 입술이 닿는
완벽을 향한 저 찬란한 죽음 같은 것이. 꽃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지금 꽃입니다.
.. 김용택 님의 글에서 퍼 왔습니다. 늑대님에게는 존재를 아우르는 고민.의 시간이실 지금을..
비슷한 상황으로 공감하는 1인.. 이어서일까요^^ .. 그래서 보내드립니다.. 꽃 ..내 맘대로.. ㅎㅎ
아.. 지금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 그래서 .. 말했습니다.. 내 맘대로..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