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해 좌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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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이 망했다. 지난 1년 10개월 동안 아등바등, 온 저자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빈약한 밑천을 가지고 어디 가져다 쓸만한 판자데기는 없는지...새끼줄 끝에 딸려 나오는 먹을거리는 없는지...부지런히 발품 팔고 머리품 팔며 무엇이든 긁어모았다. 제법 형태가 보일 것 같은 순간, 잠깐 여행을 다녀왔다. 바로 이 순간 쓰나미가 덮쳐왔고 그동안 무언가 해보겠다고 쌓아놓았던 나의 전 재산은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함께 일하던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 사람들은 “새로 시작해보세요”라고 충고를 겸한 새 방향을 제시했지만 나는 이미 나의 모든 힘을 다 써버렸기에 더 이상 무엇을 더 주워 올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긴 침묵, 그동안 내가 들인 시간과 열정과 사람에 대한 의리가 아까워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사람을 만나기가 싫었다. 그러나 후반생은 예절바르게, 착하게 살자고 맹세를 한터이라 혼자서 새겼다. 당당히 내 꿈들을 펼치고 비상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무거웠나보다. 인생에서 나중은 없다고 지금 최선의 고백을 하라고 이 시대의 소리꾼은 노래를 부르지만 나는 아무래도 지금, 아프니까 청춘인 것 같다.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나의 등불이 되어주는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잠 못이루어 새벽빛을 맞이하는 시간에 김수영의 시를 읽어본다. 동쪽 하늘은 화려하게 불타오르기 시작하고 눈동자가 크고 까만 시인은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깨닫게 해준다. 아아~ 마케팅~
마케팅
비닐, 파리통,
그리고 또 무엇이던가
아무튼 구질구레한 생활필수품
오 주사기
2cc짜리 국산 슈빙지
그리고 또 무엇이던가?
오이, 고춧가루, 후춧가루는 너무나 창피하니까
그만두고라도
그중에 좀 점잖은 품목으로 또 있었는데
아이구 무어던가?
오 도배지 천장지, 다색 백색 청색의 모란꽂이
다색의 주색위에 탐스럽게 피어있는 천장지
아니 그건 천장지가 아냐 (벽지지!)
천장지는 푸른 바탕에
아니 흰 바탕에
엇갈린 벽돌처럼 빌딩 창문처럼
바로 그런 무늬겠다.
아냐 틀렸다
벽지가 아니라
아냐 틀렸다
그건 천장지가 아니라
벽지이겠다
더 사오라는 건 벽지이겠다
그러니까 모란이다 모란이다 모란 모란......
그리고 또 하나 있는 것 같다
주요한 본론이 네 개는 있었다
비닐, 파리통, 도배지.......?
주요한 본론이 4항목은 있는 거 같다
4항목 4항목 4항목........(면도날!)
- 1962년 5월 30일 시인 김수영이 쓰다.
버린 거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커다란 문제 앞에서 어찌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떠오르질 않았어요. 겁쟁이가 되어버려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고 머리속에 떠오른 그말로 말해도 되는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렸어요. 죄송합니다. 외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침묵해서 죄송합니다.
생각이 콱 막혀버려서 정말이지 어찌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용기도 열정도 애정도 모두 바닥이었기에, 지쳤다는 오라를 내는 변명쟁이가 되어 버려서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를 힘들게 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정말이지 버린 거 아닙니다.
외롭게해서, 힘들게 해서 정말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