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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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것에 대해 갖고 있는 확실한 느낌이다. 만일 누군가가 '나는 내가 글을 잘 쓴다고 믿는다'라고 주장한다면 그 말은 곧 '나는 내가 글을 잘 쓴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느껴진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이는 '탁자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는데, 어떤 '생각'이 탁자의 상판이라면, '확실하다고 느껴진다'는 것은 탁자의 상판을 지탱할 수 있는 다리들이다. 예를 들면 '나는 어릴 때 글짓기를 해서 상을 탄 적이 있어',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느낌이 좋다고 했어', '유명한 작가 선생님이 나보고 잠재력이 있다고 말씀하셨어', '내 글을 읽고 스스로 감탄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야' 등의 근거들이 생각을 뒷받침하는 합당한 이유가 되어 '나는 글을 잘 쓴다'는 확실한 느낌, 즉 믿음을 갖게 해주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도 작용하기도 하는데, 견고하게 형성된 어떤 믿음이 그것을 부정하는 근거들을 만나면 상판을 지탱하는 다리들이 하나씩 잘려 나가 결국에는 믿음이란 상판이 무너지기도 한다.
얼마 전까지 나는 스스로 '나는 자기관리를 잘 하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났고, 하루 중 내가 가질 수 있는 자투리 시간을 죄다 뭔가를 쓰고, 읽는데 할애했다. 사람들로 하여금 처음엔 경탄의 대상이 되었던 이러한 나의 행보가, 시간이 흐를수록 우려를 빚어 내더니 종국에는 거부감을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새벽기상, 글쓰기, 독서, 걷기 등을 나의 정체성으로까지 여겼던 만큼 이런 믿음의 붕괴는 내게 커다란 좌절이 되었다. 그래서 일종의 내적 '아노미(anomie)'가 찾아왔다. 새벽 기상을 비롯하여 1년여의 준비 끝에 몸담게 된 연구원 활동 등, 내 삶을 지탱하는 기둥으로 여겼던 활동들이 모두 무의미하게 여겨졌고, 그 동안 애써서 작업해온 자기탐색 활동 들의 결과물들이 작위적이라는 허무감마저 들었다. 또한 이런 새로운 모색을 위해 상대적으로 취약해질 수 밖에 없었던 회사와 가정의 문제도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위기감마저 감돌자, 나는 자포자기의 유혹에 빠져들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 동안 내가 종교처럼 신봉해 오던 신념들은 작은 비판에 무너질 만큼 아주 취약했으며, 자기계발적 요소에만 치우친 성장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상누각이었다. 그렇게 믿음의 붕괴라는 그로기 상태에 빠져있는 나를 각성시킨 것은 올 초 <신>의 저자 김용규 선생님께서 손수 적어주신 '자기계발에서 자기실현으로, 자기실현에서 가치실현으로'라는 문구였다. 정신이 든 나는 그날 인터뷰했던 내용이 담기 자료를 다시 읽었다. 당시에는 그저 덕담에 머물렀던 이야기들이 한 구절 한 구절 절절하게 나의 가슴 속으로 큰소리를 외치며 파고 들어왔다.
"자기계발은 일차적으로 자기 실현이 되어야 합니다. 이상적인 삶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 하면 자기 파괴적이 되기 쉽습니다. '아침형 인간'은 누군가 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지요. 궁극적으로 자기를 계발 하는 것을 뛰어 넘어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나쁜 습관을 바꾸기 위해 계발이 필요한 부분도 있지요. 하지만 자기계발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실현에 있어야 합니다. 즉 자신 안의 것을 끄집어 내어 발전시키고 자기의 본래의 모습과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마치 그저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활동에만 천착해온 나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 같았다. 그렇다. 나는 그저 남이 좋다고 하는 것들을 그저 별 생각 없이 따라 하고만 있었을 뿐이었다. 매일 일찍 일어나고, 매일 읽고 썼지만, 내겐 그저 몇 시에 출석체크를 하고, 몇 페이지를 읽고, 써냈다는 얄팍한 성취감만이 있었을 뿐 그 속엔 아무런 의미도 들어 있지 않았다. 이렇듯 의미가 결여된 단순한 따라 하기를 통해 내가 상판 아래 세운 다리는 견고하고 튼튼한 대리석 기둥이 아닌 툭 치면 부러지는 약한 나무 젓가락이었다.
이렇듯 아픈 경험을 통해 자기계발은 자기실현을 위한 일종의 도구일 뿐 성장의 본질은 아님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자기실현이란 무엇인가? 카를 융은 "자기 실현이란 자기 전체의 인격을 실현하는 것. 다시 말해 인간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필연적 요구로, 자기가 보내는 메시지를 자아가 파악하여 현실세계에 능동적으로 실천해나가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 바 있다. 융은 여기에 덧붙여 "그러나 완전한 자기실현은 불가능하다. 완전주의를 추구하게 되면 오히려 독단적이고 파괴적이 되기 쉽다. 완전성이 아니라 원만성을 추구하는 가운데 대극의 통일을 이루어가야 한다."라며 의미가 결여된 맹목적인 추종을 경계한다.
융과 김용규 선생님의 말씀처럼 의미가 빠진 나의 맹목적인 자기계발에 대한 열망은 분명 자기파괴적이었다. 그렇다면 그 '의미'란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독일의 뛰어난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의미 있는 삶이란 실존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실존이란 자기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남을 따라 살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단한 삶을 사는 것이다"라고 이야기 한 바 있다. 그러나 진정한 실존이란 단순히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만이 아니다. 진정한 실존은 자신의 존재 가능성, 재능, 잠재력을 송두리째 내던지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의미 있는 삶이란 나를 과감히 내던지는 '용기'가 있는 삶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무엇'을 스스로 결단하고 용기를 내어 과감히 내던질 것인가? 극단적인 예로 누군가 자신의 결단에 따라 용기를 내어 살인을 했다면 이 행위를 자기를 실현했다고 볼 수 있을까? 이 행위는 하이데거 식으로 보자면 분명 실존적인 행동이지만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여기에는 '가치'라는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 의미 있는 삶을 뛰어넘어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가치 있게 산다는 것은 인류보편적 삶을 추구하는 것, 다시 말해 진리, 선함, 아름다움, 사랑, 행복 등 최고의 가치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다. 비로소 선생님께서 적어주신 문구의 뒷부분 '자기실현을 너머 가치실현으로'란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당장 내릴 수 있는 가치 있는 결단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향해 스스로를 '기획투사'하고 '앙가주망' 시킬 것인가? 우선 온통 자신만을 향했던 시선을 바깥으로 돌려, 모 통신회사의 광고 문구처럼 사람을 향한다. End of Story, 내 삶의 끝자락을 체험하며 흐르는 눈물 속에 담으려 했던 것은 결국 사람이 아니었던가? 새벽에 일찍 눈 떠 삶을 노래하는 글을 쓰고, 좋은 글을 읽는 이유, 연구원이 되어 나를 탐색하고, 치열하게 공부하는 이유, 그 이유들의 끝엔 결국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이란 가치가 자리 잡고 있지 않았던가? 어떤 연구원 동료의 이야기처럼 자기 실현이란 결국 우리 모두가 서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시도는 새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설령 그 결과가 고된 시련이라 할지라도 나는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의미와 가치를 담아 내 던져진 '내 존재'가 자기실현을 넘어선 가치실현의 튼튼한 대리석 기둥이 되어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삶은 바뀔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좌절하지 마세요. 또 다시 시도하면 됩니다. 삶을 기뻐하는 삶을 사세요. 삶은 연회와 같습니다. 단 한번뿐인 연회를 즐기세요. 갖가지 은 그릇, 금 그릇, 아름다운 여인과 근사한 청년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자신의 연회를 기뻐하며 즐기시기 바랍니다.
- 철학자 김용규, <2011년 3월,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7기 연구원 Secret Mission>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