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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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행복할 텐데, ~만 있다면 행복할 텐데... 이렇게 행복이 조건에 의해 느낄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했기에 행복의 조건을 맞추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 조건이 내 손에 쥐어져도 행복의 순간은 짧게 지나가버리거나, 행복감조차 느끼지 못할 때도 있었다. 내 눈에는 또 다른 조건들이 보였고, 그로인해 내가 가진 것이 만족스럽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행복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혼자서 잘할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보다 아니 나와는 달리 행복을 잘 찾아가는 사람으로부터의 도움이... 주위를 둘러보아도 어떤 조언을 구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젠 한탄이 시작된다. 왜 내 주위에는 생기발랄한 사람이 없는 걸까? 에너지가 팡팡 터지는 사람도 없고... 이렇게 나와는 반대되는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행복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가벼워 보인다며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카페에 들어설 때 양손을 흔들며 손님을 맞이하는 종업원들을 볼 때면 ‘뭐 저런 걸 하고 있나.’ 이런 생각을 하던 나였다. 그러다보니 주위에 생기발랄한 사람들이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이 ‘짠’ 하고 나타나 나를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주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 이 사람이 그 사람인가 하고 다시 보면 역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내 안의 자석이 나와 비슷한 색깔을 가진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나는 내 안의 자석은 보지 않고 그저 신세한탄만 하며 주위에 내가 원하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친구들을 부러워 할 따름이었다. 내가 어떤 색깔의 자석을 가지고 있는지는 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행복을 내가 가진 것에서 부터가 아니라 내가 갖지 못한 것에서부터 찾으려고 했었고, 같은 조건에서도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은 각자 안에 있는 다른 색깔의 자석 때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또한 내가 가진 것은 대단치 않게 느껴졌고 행복의 조건은 거기서는 찾을 수 없다고, 작은 조건에서가 아니라 어떤 큰 조건 아래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내 눈에 가벼운 것은 경박한 것으로 보였고, 행복의 조건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점점 다른 이들이 가진 것만이 부러워 보일 뿐이었다.
프랑스 작가 모파상의 ‘목걸이’에서 주인공 마틸드는 자신이 잃어버린 친구에게서 빌린 목걸이가 가짜인지 모르고 빚을 내어 진짜를 사서 친구에게 돌려주고 그 빚을 갚기 위해 10년의 세월을 온갖 굳은 일을 하며 보낸다. 빚을 다 갚고 나서 우연히 마주친 친구를 통해서 그것이 값이 얼마 나가지 않는 가짜였음을 알게 된다. 그때 마틸드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리고 그 10년의 세월은 어디에서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단 말인가? 상상만 해도 너무 끔찍한 일이다. 만약 그녀가 다른 부유층 여자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그들의 삶을 동경하는 대신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안에서 행복을 찾고자 했다면 목걸이를 빌리는 일도 10년의 세월을 빚을 갚기 위해 노동으로 채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내 마음의 행복에 대한 기준이 잘못되어 있다면 10년이 아니라 평생을 거기에 매여 살 수도 있는 일이다.
며칠 전 노르웨이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을 일으킨 노르웨이 청년은 잘못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그렇게 끔찍한 만행을 저질러 놓고도 누군가는 했어야 하는 일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의 이데올로기를 추구하기위해 그런 참사를 일으키면서까지 그가 얻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이데올로기가 현실화되면 그는 무엇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일까? 어쩌면 그것 역시도 행복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도 이 세상을 악한 쪽으로 바꾸려는 목적으로 그런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잘못된 생각의 틀 안에서는 그것이 좋은 쪽으로 바꾸는 방법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기에 즉흥적인 결정이 아닌 오랜 시간에 걸쳐 계획을 세우고 그것이 잔혹한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행복은 조건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고 선택하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행복할 수 있어?’ 과연 정말 아무것도 없었던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 나에게 없는 것은 도처에 널린 행복을 알아보지 못하는 시선이었다. 시선을 달리하니 아이들의 까르르 거리는 웃음소리에서, 자기만 봐달라고 칭얼대는 갓난아이의 모습에서, “엄마 나랑 같이 가야지.” 하고 조금 앞서가는 엄마를 부르는 아이의 모습에서, 아빠 품에서 불편한지 찌푸리면서도 잠을 자는 아이의 모습에서도 미소 지을 수 있으며 그로인해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행복은 어떤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리고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이런 시선을 처음부터 지니고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시행착오가 있었기에 이런 순간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 마음의 결정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어떤 외부적 조건도 타인의 시선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므로,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지 정하는 것도 내가 될 수밖에 없다. 결국 모든 것은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때론 내 앞에 주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 벅차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한 없이 아래로만 내려가고 있다고 느껴질 때도 행복은 주어진 거라며 주위에 행복이 널려있다고 생각하면서, 행복을 찾으려 하지만 보이지도 않고, 마음을 다 잡기 어려운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는 섣불리 어떤 행동을 결정하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인생을 저 창공 위에서 내려다보듯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지나간 과거도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도 다르게 보이듯이 우리 인생도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달리 보일 것이므로 위에서, 아래서, 옆에서, 뒤에서 이렇게 방향을 달리하여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마틸드처럼 10년의 세월을 헛되게 보내지 않으려면 말이다. 한 드라마에서 이런 대사가 나왔다. “세상은 웬만하면 아름다운데, 사람들이 그걸 몰라. 가끔은 멈춰 서서 하늘도 보고 나무도 보면서 쉴 줄도 알아야지.” 바쁜 일상이지만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내 옆에 서있는 나무를 볼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이 바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하늘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지금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는 것은 어떨까?
코끼리도 하늘 아래서 이처럼 웃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