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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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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24일 22시 30분 등록

나는 매우 주도면밀한 사람이다. 무슨 일이든 상황을 분석하고 전략을 수립한 후 계획대로 움직인다. 그래서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이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했으며 가정을 꾸렸다. 계획을 세워 출산을 했고 회사에서 부서 이동과 승진을 했으며 자금 운영 계획을 세워 집도 장만했다. 나는 분명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실존의 3단계설 - 심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 - 중 심미적 단계에 있는 인간은 아니었다. 나는 인생을 즐기는 베짱이보다는 내일을 위해 끊임없이 준비하는 개미였다. 나는 쾌락과 재미보다는 안정과 대비가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래서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마음은 항상 미래에 살았다.

 

그렇다면 나는 윤리적 단계에 머문 인간이었나? <서양 문화를 읽는 코드, >의 저자 김용규는 윤리적 단계에 있는 인간의 삶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은 국토 있는 국왕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매 순간 자신의 과업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지체 없이 행동을 취하지요. 따라서 실수를 하거나 장애물에 부딪힐 때에도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나도 그랬다. 신속하게 움직였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났다. 그러면서 나는 많은 것을 성취하고 획득했다.

 

그런데 나는 원하던 많은 것- 사회적 지위, 경제적 자립, 단란한 가정-을 가졌지만 절망을 피할 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많은 것을 가졌고 남부러울 것 없이 보이지만 내면의 나는 끊임없이 울고 있었다.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따르지 못한 나약함에 대한 뉘우침의 울음이었다.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내면의 어린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그 자리에서 어떻게든 버티려 안간힘을 썼다. 육체와 영혼은 탈진했지만 이 고비만 넘기면 좀 더 머물 수 있거라 자위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나는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잘못은 나에게 있었다.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지만 검푸른 진흙은 코 밑까지 차올라 질식하기 일보직전 이었다. 나는 한없이 절망했다. 키르케고르는 그러한 절망을 예찬한다.

 

절망하라. 그러면 그대 정신은 결코 더 이상은 우울 속에서 신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가, 비록 그대는 그 세계를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볼 것이지만, 다시금 그대에게는 아름다워질 것이고, 즐거운 것이 될 것이고, 그리고 그대의 해방된 정신은 자유의 세계로 날개 치며 솟아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새벽이 오기 직전이 가장 어둡지만 그 순간을 이겨내면 찬란한 태양이 떠올라 세상의 모든 것에 밝은 빛을 쪼여주는 것처럼, 만신창이가 되어 기진맥진 한 절망의 끝에서 희망의 싹이 돋아나 새로운 출발을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그 시기가 지나자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한 집착이란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손에 쥔 것을 버릴 각오를 하자 절망이란 놈이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키르케고르의 말대로 무한한 자기 체념이 나를 실존의 마지막 단계인 종교적 단계로 이끌었다. 나의 나약함과 한계를 인정하자 비로소 신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에게 나의 모든 것을 의지하고 안식하고 싶어졌다. 신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싶었다.

 

이제 나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 정기적으로 종교활동을 하지는 않지만 신이란 절대자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은 믿는다. 신이 창조주인지, 인격적인지, 유일자인지는 나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내 인생을 계획하고 운영하는 존재가 있음을 믿을 뿐이다. 사후의 구원에 대해서도 별로 미련이 없다. 1965년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회에서 가톨릭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할지라도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나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선포하지 않았나?

 

나는 이제 계획한 모든 것들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성공한 삶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계획한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실패한 삶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것은 신의 예정이며 섭리에 따라 일어난 일일 것이다. 세네카의 말대로 내가 동의하면 운명은 나를 인도하고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운명은 나를 강제할 것이다. 나는 목청껏 외친다.

 

운명이여, 나를 그대가 원하는 곳으로 인도하소서. 나는 당신을 따를 준비가 되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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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그대여 절망의 끝에서 희망의 싹을 틔워라!

IP *.143.15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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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2011.07.25 00:09:41 *.23.188.173
언니의 글은 역시 힘이 넘친다.
언니의 외침을 따라서 외쳐본다.
운명이여, 나를 그대가 원하는 곳으로 인도하소서. 나는 당신을 따를 준비가 되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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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갱
2011.07.25 01:22:50 *.111.51.110
명쾌하네요!
키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설이 확 와닿습니다.

신의 존재로 인해 위로받고 힘을 얻으셨다니 저또한 기쁩니다!
운명이여 저도 좀 기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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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5 09:53:04 *.45.10.22
언니도 이 구절이 와 닿았구나 나두~
그저 물살에 몸을 맡겨보고 싶어 
두려워서 발버둥칠수록 물에 가라앉지만 마음을 풀고 
그대로 물에 몸을 맡기면 두둥실 떠오르는것처럼 말야 
언니 좋은 글 고마워요~
emot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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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5 10:00:07 *.124.233.1
"나는 이제 계획한 모든 것들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성공한 삶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계획한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실패한 삶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나는 이 말이 누나 마음에서 우러나온 '고요의 울림' 이라고 확신해요.
이곳에 오게 되어 연구원이 된 것도
그리고 좌충우돌 부딪히며 삶을 배우게 된 것도
그리하여 내가 얼마나 한 없이 부족하고 작은 존재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인지 깨닫게 된 것도
그분의 섭리인 것이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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