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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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부남에서 래프팅 보트를 탔다. 대소마을에서 부남면으로 들어가는 물길이 웅장한 바위 앞에서 굽어 흘렀다. 대문처럼 지켜서고 있는 바위를 사람들은 ‘대문바위’라고 불렀다. 아래쪽 덤덜교에서 바라본 물길은 옥녀봉 산허리와 도로 사이를 감아 돌고 있었다. 예전에는 황소도 잡아 삼켰다는 이무기가 살았다는 전설이 함께 내려오고 있었다. 대문바위를 지나 덤덜교 밑을 지나면서 강물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른 장마비 때문에 용담댐에서 방류한 강물은 평소와는 달리 탁한 흙빛을 띠었고, 사나워보였다. 이미 무슨 수변공원을 조성한다고 법석을 대던 둔치를 반쯤이나 집어삼키고서도 허기가 여전한 듯싶다. 겁이 났다. 저 괴물의 등허리를 타고 흐른다고 생각하니 발걸음 떼기가 쉽지 않다. 반쯤은 떠밀리다시피 보트에 오르고 또 얼마쯤을 흐르고서야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절경이었다. 깎아지른 바위며, 절벽들이 둘러선 자리에서 강물은 또 굽었다. 물길은 산을 넘지 못하고, 산은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한마디 말도 없이 버티고 선 바위들의 위엄 앞에 강물은 바람처럼 비켜 흘렀고, 그렇게 흐르는 강을 산은 더 이상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의 품에 감싸 안긴 듯 강물은 울음을 그쳤고, 이내 잠이라도 들것처럼 조용해졌다. 어디선가 까마귀 울음소리가 날아들었다. 아직도 짝을 만나지 못한 것일까. 문득 열흘 전이 칠월칠석이었음이 떠올랐다. 칠월칠일 장생전에서 남몰래 맺은 약속... 당나라 시인 백거이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그렇게 노래했다.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자던... 그리움이 깊어지면 한恨이 되고, 천년도 더 지난 이야기는 장한가長恨歌라 불리었다. 오작교 다리를 건너 그나마 일 년에 단 하루라도 만날 수 있다면... 소 키우고 베를 짜던 견우직녀의 사랑이 차라리 부러웠다.
하늘이 또 변덕을 부렸다. 대소교 다리 밑을 지날 무렵만 해도 멀리만 보이던 먹구름이 어느새 비구름이 되어 강물 위로 떨어졌다. 래프팅 보트도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양현 앞으로..” “우현 앞으로..” “좌현 뒤로...” 우왕좌왕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정신을 못 차리는 서투른 몸놀림들에 도리어 가이드의 손놀림이 바빠지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급하게 흐르는 여울목에서 배가 바위에 닿지 않게 하려는 듯 패들은 강물 속에서 더 깊이.. 더 자주 저어졌다. 패들 하나 남짓한 거리를 두고 배가 빠른 물살을 탔다. 다행이었다. 함성소리들이 이어졌다. 아찔하게 지나쳐 온 여울목을 다시 돌아보는데, 빙긋이 웃는 가이드의 웃음이 어찌 드라마 같다. 벌써 십 수 년째 일주일에도 두어 번씩 이 길을 지난다던 그의 말에 나도 웃고 말았다. 언젠가 강물에 빠뜨린 결혼반지를 찾아 준적도 있다는 구라같은 이야기들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즐기고 있었다.
소나기가 지난 하늘이 열리자 사람들의 표정도 여유로워졌다. 마중을 나온 처녀바위 근처에서 좁은 둘레길을 따라 걷는 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기도 하고, 왼쪽 오른쪽 번갈아 기우뚱거리는 롤링질도 했다. 그의 장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이들 하나씩을 번쩍 들어 강물에 띄우기도 하고, 패들로 물세례를 주기도 했다. 이미 소나기에 흠뻑 젖은 몸들인지라 더는 빼지도 않았다. 한 시간 전 배를 띄울 때, 자칫 뒤집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은 벌써 온데간데 없었다. 불어난 강물로 허리까지 잠긴 왕버들처럼 사람들도 절반쯤 강물에 잠겼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물속에 던져진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머금은 금강이 잠시 흐르던 걸음을 늦추었다.
시간이 멈춘 듯... 사방은 다시 소리를 잃고, 물위를 미끄러지듯.. 흘러갈 뿐이었다. 사실 낯선 사람들이었다. 한 배를 타기 직전까지도 서로를 알지 못하던 이들이었다. 저마다 이곳까지 흘러든 사연들이 있을 것이고, 배를 타는 이유를 가졌을 테다. 그렇지만 굳이 시시콜콜 묻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편했다. 사돈의 팔촌을 따져가며 굳이 거추장스런 인간관계들을 엮지 않는 것이 좋았다. 어차피 잠시 후면 배에서 내릴 것이고, 또 다시 각자의 시간들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함께 길을 타고 흘러왔지만 추억은 저마다 다르게 기억될 것이다.
해가 비쳐들었다. 파란 하늘이 다시 열리고, 천리 물길은 그 하늘을 담았다. 어느덧 굴암대교다. 자꾸만 뒤를 바라보던 아쉬움이 길게 이어졌다. 사람들의 수선스러움이 다가오고, 앞서 도착한 팀들이 배를 끌어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꿈인 듯싶었던 시간이 강물을 따라 다시 바쁜 걸음을 이었다. 우리만 남겨두었다. 금강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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