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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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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31일 08시 56분 등록

 베란다 텃밭을 시작할 때의 일이다. 난 도시의 시멘트 골목에서 자랐기 때문에 농삿일에 전혀 감이 없다. 하지만, 뒤늦게 자연과 생태에 대한 관심을 가진 후 귀농을 꿈꾸기도 하고, 최소한 텃밭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궁여지책으로 아파트 베란다에서 조그만 텃밭을 하려고 마음 먹었다. 우선 텃밭 관련 책들을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다. 서너권은 사기도 했다. 그리고 어떻게 할지 '연구'를 시작했다.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심으면 좋은지, 배수는 어떻게 할지, 흙의 배합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참을 연구한 뒤에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티로폼 박스를 구하고, 읍내 주변 땅에서 흙을 퍼왔다. 재래시장에 가서 상추, 피망, 고추 등의 모종을 사왔다. 종묘사에 가서 모종삽도 사고, 퇴비도 한포대 사왔다. 모래를 섞어야 한다고 해서, 아파트 구석진 땅에서 모래를 퍼왔는데 이게 실수였다. 모래에 시멘트가 섞여있었나 보다. 모종이 다 죽었다. 실패할 수 도 있지 뭐,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게 된다. 두번째 모종을 사왔다. 열의가 식어 이번엔 그냥 흙배합의 황금비를 포기하고 퇴비와 퍼온 흙을 대충 섞어 심었다. 결과는 역시 꽝이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는 것을 무시한 것이 원인이었다. 우리집은 아파트 4층이다. 햇빛이 안드니 성장이 안되었다. 게다가 폐쇄된 베란다에 있으니 피망과 고추는 수정이 잘 않되는 듯 했다. 결국 수확한 것이라곤 손바닥 반 만한 상추 몇장 뿐이었다. 한번 수확 후엔 더이상 자라지 않았다. 아내는 십만원짜리 상추 한번 먹었다며, 나를 두고두고 놀리고 있다. 주변의 어떤 분은 책 한번 읽는일 없이 텃밭을 일구며 엄청난 수확을 거두는것을 보았다. 열등감이 느껴졌다. 상추 심겠다고 책을 읽는 나를 놀리는 사람도 있었다. 역시 머리로 아는 것과 그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다른 문제다.



흔히 하는 말로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가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라고 한다. 철학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구절들이 눈에 들어온다. 맨날 머리 싸매고 철학을 했던 학자들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런 고민을 했으리라. "내가 하는 이 사유가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는 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의문 말이다. 그러다가 철학이고 뭐고 때려치운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공부한다고 밥 한톨 나오는게 아니니까 말이다. 가족들의 걱정스런 눈길을 누가 쉽게 무시할 수 있으랴.


그리스인들은 '철학은 그 자체를 위한 일종의 관광여행'이라고 했다. 러셀도 '철학 자체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고, 우리의 영혼을 구하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비코라는 철학자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즉 만들 수 있는 것밖에 없다"고 확언했다. 서양철학사에서 확실히 이 문제를 제시하고 전환점이 된 철학자가 쇼펜하우어다. 모든것을 비관적으로 보았던 쇼펜하우어는 "철학이란 경험과 사고로 해석해야 하며 단순한 독서나 수동적 공부로 알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고, '책보다 생활이 먼저' 임을 단언했다. 그의 시대 이후, "철학자들은 이론을 주무르고 따지는 비현실적인 분위기에서 살아가기 어렵게 되었다" 한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행위와 관계없는 사고는 불건전한 상태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지난번 <서양의 지혜>를 읽고 쓴 '사유하라' 라는 글에서, 뭐든 열심히 하기 전에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을 사유하자는 얘기를 했다. 그건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었다. 생각따로 행동따로 되지말자는 얘기였다. 어떤 행동을 의식적으로 수행하면, 반드시 그 행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 습관적으로 행동해서는 새로운 경험과 원하는 변화는 오지 않는다. 비록 십만원짜리 상추를 먹을 지언정, 내가 모르는 분야에 대한 공부와 그것을 좌충우돌 삶에 적용하는 그 과정이 나를 확장시킨다. 나또한 십만원짜리 상추를 먹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해에는 야외로 나가 한 고랑을 빌려 가장 쉽다는 고구마도 심어봤고, 작지만 수확의 기쁨도 느꼈다. 그러다 올해는 동네 사람의 텃밭 구석에 쌈채소 씨를 뿌렸고, 관리는 그분께 맡기고 날로 날로 먹는 경지(?^^)에 까지 이르렀다. 내가 심은 상추뿐 아니라 고추, 호박도 얻어 먹는다. 어떻게든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런 변화도 없다. 이 말은 행동하면 어떻게든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얘기다. 그 변화는 비록 애초에 내가 의도한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또 그게 사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IMG_3200.JPG
<이게 문제의 10만원짜리 상추다. 심은지 얼마 안 된 사진인데 이 뒤로 얼마 자라지 못했다. 아무리 물을 줘도 거의 그대로 였다>

IP *.166.20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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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7.31 23:09:17 *.143.156.74
나도 안식년 to do list에 텃밭가꾸기가 있었는데 엄두도 못내고 있네.
둘째가 유치원에서 가져온 고추 모종은 아무리 물을 줘도 말라 죽고 있어.
역시 좋아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 되긴 힘든 걸까?
나도 경수처럼 다른 시도를 해봐야겠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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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1 10:02:04 *.124.233.1
양평집에 텃밭이 있어서 매년 배추, 무, 고추, 상추 등을 심어서 먹곤 했는데
작년까지는 내려가서 많이 도와드렸는데, 올해는 거의 못도와드렸어요.
맨발로 흙을 밟으면 폭신폭신하고 간질간질해서 좋더라구요.
올해는 옥수수를 많이 심으신 것 같던데 9월 오프수업 때 좀 싸가지고 가야겠어요.
형 말대로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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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
2011.08.02 08:44:29 *.163.164.176
경수야 우리도 1달전에 종묘사에 들러 이것 저것 사다가
고추랑, 파프리카랑, 상추랑 심었는데...
파프리카는 경민이 주먹만큼만 크다가 발육이 멈추었고, 색깔도 흐리멍텅.
고추는 꽃 핀자리에 경민이 꼬추만한 것이 열리더니 더 이상은 진도가 없고,
상추는 경민이 손바닥만틈만 크더니 시들시들해졌다.
경민이는 금붕어를 키우다 상처받고(결국 죽었거든)
요즘은 상추때문에 상처받고....
그러면서 크는 것인가 보다. 

여행을 같이 가지 못한 서운함이 크다. 경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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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2 16:07:24 *.45.10.22
나도 훈이 오빠말에 동감... 
오빠의 멋진 사진작품들을 남겨와야 할텐데 
너무나너무나 아쉬워요..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까지 다 털어버릴정도로 
잘 다녀와야겠지~!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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