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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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자유이다. 그리고 일상은 우리가 매여 있는 질서이다. 질서에 지치면 자유를 찾아 떠나고 자유에 지치면 다시 질서로 되돌아온다. 떠날 수 있기 때문에 일상에 매여 있는 우리에게 여행은 늘 매력적인 것이며, 되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비장하지 않다... 여행은 익숙한 것과 결별이며 낯선 곳에서 아침을 맞는 것이다... 여행은 그러나 도피가 아니다. 우리는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 버리기 위해 떠나는 것이고 버린 후에 되돌아오는 것이다. 여행을 통해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없다. 오직 버리기 위해 떠난다.
- 구본형, <떠남과 만남> 중에서
며칠 뒤면 르네상스의 나라 이탈리아로 열흘간의 여행을 떠난다. 늘 여행을 동경해 왔지만 정작 여행을 떠나본 적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갈망과 현실 사이의 괴리 때문인지 여행이라는 단어는 아직도 낯설고 생소한 그야말로 나와는 거리가 먼 세계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이 참에 '그렇다면 나에게 여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나에게도 여행에 관한 몇 개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다. 1992년 여름,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식구가 함께 기차를 타고 원주에 있는 간현 유원지로 여행을 떠났다. 계곡에 텐트치고 캠핑하는 그야말로 아주 평범한 가족여행이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비가 내려 계곡에 물이 불어났다. 아버지와 나는 서둘러 텐트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비를 홀딱 맞으며 텐트 주위에 물이 빠질 수 있도록 고랑을 파고 주변을 지켰다.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와 동생을 지켜준다는 마음에 어찌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젊고 건강하셨고, 동생과 나 모두 해맑은 어린 아이였다. 우리 가족은 마치 초등학교 바른생활 교과서 삽화에 등장하는 '오순도순 화목한' 가족 같았다. 그때 우리 가족은 그렇게 행복의 정점에 있었다. 내게 각인된 여행에 대한 첫 기억은 '가족과 함께 하는 따스한 행복'이었다.
2002년 여름은 대한민국 월드컵대표팀이 사상처음으로 16강에 진출하고 4강신화를 창조한 행복한 계절이었지만, 내겐 한 없이 불행한 계절이었다. 가난과 실연이 나를 무너뜨렸다. 무력한 나는 방 한구석에 처박혀 자조 섞인 목소리로 세상을 원망했다. 먼저 화해의 손짓을 내민 건 세상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된 '대학생 동북아대장정' 광고. 신은 3만 4천명의 지원자 중 한 명으로 나를 선택해 주었다. 다시 세상에 나온 나는 난생 처음으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국경선을 넘었다. 옛 고구려와 발해가 세상을 호령했던 그곳으로 들어선 나는 1년에 스무 날도 채 되지 않는다는 백두산 천지의 맑은 풍광과 그 신성한 물에 발 담글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열차를 타고 드넓은 대륙을 횡단하며 난생 처음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했다. 벗들과 손을 맞잡고 '일송정'에 올라 대륙 위에서 말달렸을 '선구자'를 기리며 노래했다. 그렇게 여행은 '밀실에 갇힌 나를 넓은 세상으로 불러내는 신의 손짓'이었다.
2009년 여름 나는 처음으로 홀로 여행을 떠났다. 홀로 떠나보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내게 줄 그리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담배 한 개비와 녹는 아이스크림 들고 길로 나섰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는지 아니면 기억 속 어딘가에서 흘러나왔는지 알 순 없었지만 어떤 노래의 가사 한 구절이 나를 떠나게 했다. 강원도 대관령의 한산한 양떼 목장을 밀짚모자를 쓰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닐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차를 달려 추암의 바닷가 마을에 이르렀다. 옛 사랑과 추억이 숨쉬는 곳. 마을 이곳 저곳을 서성거리다 해 저문 뒤 회 한 접시,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청승맞게 캄캄한 바닷가에 우두커니 서서 눈을 감고 파도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였다. 그리고 울었다. 불어오는 바람과 흐르는 눈물에 옛추억이 씻어지도록. 그렇게 여행은 '그리움과의 낯선 마주침'이었다.
그 해 가을에 나는 결혼을 했다. 우리 둘 모두 가난했지만, 하나 된 우리의 새 출발에 큰 선물을 하기로 했다. 다른 곳에 드는 비용을 줄여 여행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그렇게 떠난 하와이 제도의 마우이 섬에 들어선 순간 둘 만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난생처음 빨간 컨버터블을 타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해안도로와 할레아칼라 하늘 길을 달렸다. 차를 달릴 수록 우리를 감싸고 있던 익숙한 일상의 껍질이 떨어져나가는 듯 했다. 길을 잘못 들어도 느긋해지고, 걸음 하나하나가 여유로워졌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출발점에서 시간 바깥의 세계를 체험하고 돌아왔다. 이후 우리는 몇 번의 여행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물론 여행을 하며 다투기도 하였다. 다툼은 서로의 뾰족한 모퉁이 돌을 부드럽게 다듬는 창조적인 불화. 그 후 우리는 더욱 깊어졌다. 그렇게 여행은 우리에게 '하나 같은 둘, 둘 같은 하나가 되기 위해 함께 떠나는 모험' 그리고 '사랑의 나이테'라는 성숙의 의례가 되어 주었다.
2011년 여름, 지금까지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여행을 떠난다. 존경하는 스승과 꿈을 나눈 벗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다. 단순한 휴식과 관광이 아닌 '함께 더불어 배우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다. 이번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기까지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몸 담고 있는 회사는 휴식을 창조로 보기보다 게으름과 소비로 인식하는 문화에 가까운 조직이다. 2~3일의 휴가도 신중을 기해 다녀와야 하는 곳에서 열흘간의 휴가를 낸다는 것은 꽤 눈치를 보아야 하는 일이다. 게다가 여행에 들어가는 경비도 우리 형편에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험과 도전을 감행한 것은 연구원이 되고자 했을 때의 그 마음과 같다. 코끼리의 쩨쩨한 횡포로부터 벗어나 덜 바쁘고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 그리하여 나만의 창공에서 마음껏 비행하기 위함 그것이었다.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과감한 도전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달콤한 열매다. 그렇다면 이번 여행은 당찬 도전과 함께 힘든 수련을 잘 견뎌온 나를 기리기 위한 선물, 그런 내 곁에서 더욱 더 마음 고생이 심했을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선물이기도 하다. 그 동안 신화, 역사, 철학의 바람을 타고 솟구쳐 날아오른 높은 하늘에서 다시 현실의 땅으로 당당하게 귀환하기 위한 터닝포인트. 나는 그곳에서 변화경영의 뿌리, 르네상스의 정신과 만나게 될 것이다. 르네상스 정신은 무엇인가? 익숙한 것과 결별이고, 나다움으로 돌아옴이며, 그리하여 낯선 곳에서 아침을 맞이하겠다는 정신이 아니겠는가. 기독교도가 예루살렘으로, 이슬람교도가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나듯 삶의 변화와 혁명을 꿈꾸는 나도 르네상스의 도시로 성지순례를 떠난다.
내 안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을 담아내기 위해, 그 불꽃을 더욱 더 훨훨 타오르게 하는 바람을 맞이하기 위해 가슴속에 텅 빈 공간을 마련한다. 본전이나 뽑겠다고, 사진이나 몇 장 찍고 돌아와야겠다고 하는 얄팍한 쩨쩨함을 버려라. Feel the soul. 르네상스의 숨결을 느껴라. 억지로 자아내지 말고 그저 자연스럽게 호흡하라. 멍청하게 눈으로만 탐착하지 말고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라. 그리하여 자신들의 한계를 뛰어넘은 천재들의 위대한 정신과 공명하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지 말고 찬찬히 맛보고 음미하라. 그리하여 내 몸에 새로운 피가 흐를 수 있게 하라. 누군가 보여주고, 들려주고, 떠먹여주길 바라지 말고 오직 스스로 느껴라. 그렇게 온 몸과 온 마음을 다해 배워라. 그 다음 위풍당당하게 세상으로 귀환하라. 그때 비로소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그곳에서 나를 찾아 돌아왔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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