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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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현재 '처벌이 학습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모의실험에 <교사>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조그마한 방에 앉아 있다. 당신의 뒤에는 상황에 따라 당신에게 지시를 내릴 진행자가 서있고, 당신 앞에는 '전기충격장치'가 놓여있다. 당신의 옆방에는 또 한 명의 피실험자가 당신의 상대역으로 '학생'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 학생은 당신 앞의 '전기충격장치'와 연결된 전기 수신기를 몸에 부착하고 있다.
실험은 아래와 같이 진행된다.
당신은 학생에게 문제를 내고 학생은 이것에 답을 하여야 한다. 만약 학생이 틀린 답을 제시하게 되면 당신은 당신 앞에 놓은 '전기충격장치'를 이용하여 15볼트부터 시작하여 450볼트까지 한번에 15볼트씩의 전기 충격을 더하여 학생에게 가하게 된다.
당신은 이 실험에 참여함으로써 약간의 보수를 받게 되어 있으며, 이 실험에 대한 모든 책임은 진행자에게 있음을 사전에 들어서 알고 있다. 당신은 학생의 오답에 대해서 몇 볼트까지 전기 충격을 가할 것 같은가? 당신은 피실험자인 학생의 위험을 고려하여 어느 순간 이 단순한 실험에서 진행자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 당신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일정 수준의 전류이상을 가하여 피실험자인 학생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거나 듣게 되면 우리는 실험을 거부할 것이다.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우리의 보편적 심성으로는 이 어설픈 모의실험에서 450볼트라는 치명적인 전류를 타인에게 가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일터이니 말이다.
나는 최근에 내 삶의 가치관을 정리해 보고 싶었다. 살아가는 중에 크고 작은 무수한 선택 앞에 나는 무엇으로 판단하고, 무엇을 기준으로 삶의 방향들을 결정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삶이 더 혼란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판단의 지표, 결정의 기준으로서 가치관을 만들면 혼란스러움이 줄어들고 괜찮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지난 과거를 들여야 보고, 현재 살아가는 마음을 뒤적여보고, 꿈꾸는 미래를 해석해보니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들은 <자유, 사랑, 용기>라는 세 가지의 가치꼭지로 정리될 수 있을 듯했다. 그래서 이것들에 대해서 스스로 구체적인 정의를 내려보고 몇 가지의 행동지침 등도 덧붙여 놓았다. 제법 그럴싸한 정의와 지침은 내가 마치 그런 것을 예전부터 훌륭히 지켜왔고, 앞으로도 그런 기준에 부합되는 삶을 살 것만 같은 위안을 착각처럼 부여했다.
얼마 전 사부님은 연구원 수업을 통하여 이것과 상통하는 가르침을 주신적이 있다.
"여러분은 어떤 원칙을 가지고 사느냐? 원칙과 유연함은 상충되는 것인데 이 두 가지는 살아가는 선택의 지점에서 어느 순간 서로를 배신하게 된다. 어떤 경우에 원칙을 지켜야 하고, 어떤 상황에 유연함을 지향해야 하느냐?
원칙은 삶의 가치관이다. 나의 가치관과 틀린 것이라면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할 삶의 기준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구분해야 할 중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다름'이다.
다름과 틀림의 기준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배워야 한다. 이것이 다름에 대한 자세이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넘어서는 것은 용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틀림에 대한 개념이다. 여러분이 괜찮은 인생을 살려면 여러분은 아주 좋은 만남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좋은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사부님의 가르침을 견지하여 내 가치관들을 잘 실천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다. 다름과 틀림을 혼돈하지 않고 나의 가치관에 비하여 틀림의 순간이 오면 나는 힘써 이겨 내겠다는 초보적인 가치관념을 보강했다.
다시 서두에서 이야기 한 실험의 실제 결과를 이야기 해보자.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 중에서 450볼트짜리 전기 충격을 가한 사람은 전체의 70퍼센트에 육박했다.
당혹스럽지 않은가. 실험은 중간에 조건을 조금씩 바꾸어 진행되기도 했다.
학생 역할을 맡은 참가자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는 조건이 되자 450볼트까지 전기 충격을 가하는 사람의 비율은 40퍼센트 정도로 줄었으며, 직접 자기 손으로 학생의 팔을 '전기충격기'에 가져다 대도록 하자 그 비율은 30퍼센트까지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최악의 조건에서도 끝까지 전기 충격을 가하는 사람이 자그마치 30퍼센트에 달했다. 결과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이들 교사인 피험자들은 진행 거부에 대한 어떤 불이익도 주어지지 않았으며 아무런 협박도 받지 않았다. 그저 진행자로부터 당신이 그 실험을 계속해줘야 한다는 지시만을 중간에 받았을 뿐이었다.
이 실험은 많은 사람들이 <밀그램의 실험>으로 알고 있는 <인간의 권위에 대한 복종>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했던 실험으로 1961년 예일 대학교의 심리학과 교수 스탠리 밀그램이 실제로 모의했던 내용이다. 밀그램은 실험 하기 전에 동료 심리학자와 대학원생들에게 결과 예측을 요청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전기 충격 실험이라는 설명을 들으면 애초에 실험 참가를 거부하거나, 참가하더라도 학생 역할자가 난리를 치는 순간부터 실험을 그만둘 것이라는 예측이 대부분이었으며, 만약에 끝까지 전기 충격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사회병질자일 것이라는 의견까지 나왔다고 한다.
가치관의 정립과 더불어 '나는 이렇게 살리라'하는 다짐 앞에 지난 주 두 번째 읽는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이라는 김용규 선생님의 책의 한 구절이 나의 생각을 흔들었다.
"독일 출신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평범성'은 이렇게 언제 어디에나 웅크린 채 숨어 있습니다.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의 본질이 무사유(thoughtless)라고 설파했지요. 무사유는 일반적으로 '사려 깊지 못함'을 뜻하지만, 그녀는 이 단어를 - 보다 실천적 의미로 -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반성의 불능 또는 거부'를 지칭하는데 사용했습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사회다윈주의자 들이 바로 그렇게 행동했고, 아렌트가 경악했던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그 역사적 귀결이었지요."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마음에 떠오르는 멋있는 세 가지 가치관을 자신 있게 드러내고 그렇게 살 수 있으리라고 자신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의 지적'과 '밀그램의 실험'은 나의 파놉티콘적 시선 혹은 생각 앞에 칼로 찌르는듯한 기세로 그것의 근거를 물어왔다. "너의 가치관은 안녕한가?"
나는 앞으로 선택과 갈림길에서 얼마나 나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틀림과 다름에 구분하여 지혜롭게 판단하고, '틀림'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용기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인가. 흔들리지 않는 힘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인가. 그런 힘은 운동선수처럼 지금이라도 노력한다면 내부에서 굳건하게 뿌리 내릴 수 있는 것인가. 나의 가치관은 이런 물음들 앞에서 '밀그램의 실험'처럼 나를 피실험자로 테스트할 것이다.
<자유, 사랑, 용기>는 나의 것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과연 그들은 내 안에서 안녕할 것인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