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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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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4일 07시 48분 등록

장마가 지나고..

홍수가 지나갔다. 폭염이 쏟아지기 시작한 8월의 도시는 자지러들 듯 매미 울음소리로 숨이 막힌다. 줄지어 선 느티나무 가로수들을 따라서 빠르게 번져가는 파도는 마치 재난경보를 알리는 싸이렌처럼 들린다. 올해 들어 부쩍 강우패턴이 달라진다 싶더니, 7월 내내 장맛비가 오락가락 하였다. 큰물이 지나고 난 전주천은 여기저기 어지러워 보였다. 맑아진 물길을 따라 갯버들들이 바짝 엎드린 채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고, 군데군데 상류에서 떠내려 온 마른 달뿌리풀 더미들이 무덤처럼 쌓여져 있었다. 간혹 이빨이 빠진 듯 뿌리째 뽑힌 운동시설들이 전쟁터에 널부러진 주검들처럼 누워 있다.

초등학교 시절, 물이 불면 학교를 가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가방을 메고 강둑으로 나왔지만 다리는 이미 성난 괴물에게 삼켜지기 직전이었고, 제방 안쪽으로 혀를 날름거리는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동네 어른들과 젊은 군인들의 손놀림이 바빴다. 우리는 학교에 가는 대신 강둑에서서 물구경을 하였다. 상류 쪽 어느 집과 축사가 무너졌는지 돼지도 떠내려 오고, 수박이며 가재도구들이 괴물의 등허리를 타고 내려왔다. 더러 사람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았다는 친구도 있었다. 함께 물구경을 나온 아주머니들은 홍수에 떠내려가는 살림살이들 하나하나에 눈길을 놓치 못하고 애를 닳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괴물의 혀끝에서 날름거리던 돼지도 얼마쯤 흘러가면서 부터는 아예 보이질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서서 물난리 구경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하수구로 역류된 물을 다시 골목으로 퍼내느라 어머니가 정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퍼내도 퍼내도 쉬지 않고 다시 밀려드는 그 괴물을 당해내진 못하였다. 우선 급한대로 살림살이들이 젖지 않도록 옮겨두고 물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도리밖엔 없었다. 햇볕이 나면 내어 말리고, 다시 마른 걸레로 닦아두어야 했다.

어머니는 홍수를 사람의 힘으로 어찌 못하는 천재天災라고 했다. 비록 사람이 죽거나 집이 무너지는 피해를 본 것은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하늘의 탓으로 돌렸다. 어떤 이들은 부덕한 나라님을 탓하기도 했다. TV에서는 낙동강 어디.. 한강 어디에 큰 물난리가 나서 사람 몇이 실종되고, 집과 축사가 무너졌다는 보도들이 이어졌고, 며칠 후에는 서둘러 군인들과 군장비들이 동원되어 복구작업이 진행된다는 이야기와 각계각층에서 성금이 모아지고, 각종 생필품들이 구호품으로 전달되는 장면들이 비쳐졌다. 학교에서도 편지봉투로 하나씩 쌀을 걷었다. 일일이 이름을 적고 양동이에 부어진 쌀은 당번들과 몇몇 아이들의 손에 들려 교실 문을 나서 세상 어디론가 전해졌다. 마치 준비된 이야기처럼 매년 반복되던 일이었다.

홍수가 난 자리는 그 이듬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마찬가지였다. 상처가 아물고 잊혀질만하면 여름이 돌아왔고, 탈옥한 죄수번호 같은 13호 태풍이 북상하고 있다는 아홉시 뉴우스는 배 깔고 누워 옥수수를 삶아 먹던 평화로운 저녁을 긴장시켰다. 얼마 뒤부터는 성질머리 사나운 마녀같이 들리던 여자 이름들이 붙여지기도 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리고 많은 것들이 변했다. 공을 들여 제방이 만들어졌고, 이제는 웬만큼 큰 비가 내려도 물난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지구가 날로 더워진다고 하고, 사계절이 뚜렷하던 날씨도 점점 더 애매해지면서 간혹은 게릴라성 폭우도 나타나고, 종잡을 수 없는 날씨는 더욱 더 변덕스러워졌다. 여전히 어머니는 하늘을 원망한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어른들을 탓한다. 사람의 잘못이라며, 화석연료가 어떻고.. 이산화탄소가 많이 생겨서 온실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라며 제법 구성진 논리를 편다. 그래도 어머니는 하늘이 정하는 일이라고 했다. 혼란스럽다. 사람보다 더 오래 물길은 제 갈 길을 지났을 뿐이었다. 겨울 내내 눈덮인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흐르다가 봄이 되면 수많은 생명들을 품어 키우고, 또 여름이면 어김없이 큰물을 지어 하류로 많은 영양분들을 날랐다. 그것은 신이 강에게 준 사명이었고, 약속이었다. 마침내 바다에 가까이 이르러 숨을 죽이면 모래가 쌓였고, 오랜 세월동안 많은 생명들이 그것을 의지하며 살아왔다. 생명들은 상류에도, 중류에도 있었고, 강의 끝이자 바다의 시작인 곳에서 더 많은 생명들이 더불어 살고 있었다. 댐이 들어서고, 물길을 돌리고,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물길 가까이까지 집을 지었다. 그리고 넘쳐드는 강물은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둑을 담장처럼 높이 세워 강물을 그 안에 가두어 두려했다. 더러는 허물어지기도 했지만 어찌했던 콘크리트 벽은 단단해 보였다. 우리 안에 갇힌 짐승처럼 강은 오열하였고, 이따금씩 몸부림을 쳤다.

강과 마을 사이, 둑이 들어서면서부터 강은 한참을 멀어졌고, 사람들은 강둑 가까이서 들리던 물소리를 잊고 살았고, 여름날 오후 멱을 감으며 해맑게 웃어대던 어린아이들의 추억도 빼앗아갔다. 두려움이 없는 대신 그리움도 잃었다. 장마가 지난 도시, 작열하는 태양이 뜨겁게 아스팔트를 달구기 시작한다. 또 다시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자지러지기 시작한다. 자동차들의 소음마저도 그 파도같은 울음소리에 덮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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