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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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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26일 23시 56분 등록
 

이 글은 2기 연구원 한명석님이 쓰신 칼럼입니다 <2009. 7.30>



연구원 컬럼 난이 조~~용하다. 5기 연구원들의 요즘 과제가 50페이지의 개인사를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구원에 지원할 때 썼던 20페이지의 개인사를 50페이지로 확장해야 한다. 거의 책 반 권에 해당하는 분량이니, 결코 만만한 분량이 아니다. 물론 쓰고 나면 그 노고에 합당한 혜택이 있다.


미스토리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나는 무언가 할 말이 있을듯해서 입이 간질간질하다. 연구원 시절 나도 50페이지의 개인사를 쓰면서 얻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우선 글을 쓰는 것이 겁나지 않게 되었다. 제법 긴 원고를 쓰면서 훈련이 되고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나에 대한 지식이 대폭 늘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내가 ‘밖에서 뛰어노는 아이’였던 것을 회상하고 참 신기했다. 하도 공기놀이를 많이 해서 손톱을 깎을 틈이 없었다. 공기를 집느라 땅을 훑을 때 손톱이 닳아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의 사고와 습관의 뿌리를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백일홍이나 분꽃 같은 우리 꽃을 보면 그저 좋은데, 어린 시절 외가의 장독대 앞에 피어있던 꽃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내는 식이다.



그 다음에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나는 미스토리를 쓰고 나서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황홀할 정도로 행복했던 순간이든, 수치심에 얼굴이 닳아 오르는 장면이든 이상하게도 글로 쓰고 나면 객관화가 된다. 지난 일이 마치 영화를 보듯이 눈앞에서 스윽 스쳐 지나간다. 나의 어떤 기질이 그 일을 불러들인 것도 훤히 보였다. 모든 것이 내 탓이었다. 그러자 불행이나 실수를 계속해서 곱씹으며 자책하지 않게 되었다.



좋았던 일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일을 글로 써서 정리하고 나면, 행복과 불행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에는 행운이라고 생각했던 일에도 그늘이 있고, 정말 어려웠던 시기에서도 얻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금 일이 잘 풀린다고 해서 자만할 것도 없고, 일이 꼬인다고 해서 좌절할 것도 없다. 내게 오는 일은 무엇이든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되 결과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 삶에 대한 여유와 통찰, 그 역시 미스토리의 혜택이다.



이처럼 막강한 미스토리의 위력에 한 가지를 더해 볼까 한다. ‘오감체험’이라고 이름을 붙여 보았다. 지난 일 중에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을 다시 한 번 체험해 보는 것이다. 시간은 늘 균일하게 흐르지는 않는다. 늘어난 테이프처럼 한없이 느리고 쳐지는 시간이 있는가 하면, 도저히 잊혀지지 않을 순간으로 각인되기도 한다. 저만치 앞서가던 그가 문득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을 때, 아이가 처음으로 걷기 시작했을 때, 구석기 시대적인 발상으로 나를 억누르는 시어머니를 견디다 못해 가출하던 순간, 학원을 처음 시작할 때 승합차를 구입하여 시승해 볼 때의 가슴떨림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 이처럼 우리 마음 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순간들을 생생하게 되살려 보자는 것이다.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하고 과거로 여행을 떠난다. 아무래도 시간의 흐름에 따르는 것이 편할 것이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에서 시작하여 의미있는 장면을 메모하기 시작한다. 나는 100개의 장면을 목표로 하고 기억을 되살리기 시작했는데 30분 정도 걸려서 100개를 채울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유독 외가에서의 경험이 많았다. 내가 외가를 많이 좋아했나 보다. 지금은 신도시로 개발된 일산 근처, 그 때는 전형적인 농가였던 그 곳에서의 추억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인생 최대의 프로젝트인 육아기간을 거쳐 창업과 건물신축, 터닝포인트까지 줄줄이 불려나오는데 또 하나 깨달았다. 100개의 인상적인 장면 중에서 제일 선명하고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사람과 어울렸을 때라는 것이다. 어쨌든 그 중의 한 장면을 골라 다시 한 번 오감으로 되살려 보자는 것이 오늘의 목표이다.



내가 잡은 것은 2000년 어느 여름날의 초저녁이다. 당시 나는 별거중이었고 운영하던 학원이 불경기라 그중 힘든 시절이었다. 그 때 나의 유일한 위안은 학원 앞의 작은 뜰이었다. 내 손으로 일일이 골라서 나무를 심고 꾸민 곳이라 애틋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그 날 저녁에도 나는 차 한 잔을 들고 마당에 나가 나무 하나하나에 눈을 맞추고 있었다.



넓지 않은 곳이지만 통행로와 뜰을 구분하고 싶었다. 그래서 쥐똥나무로 울타리를 하고 호리호리한 향나무 두 그루를 휘어서 묶어 아치를 만들었다. 아치 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오른 쪽으로 능소화와 불두화가 한 그루씩 있다. 내가 능소화를 좋아하게 된 것은 김선우의 시 ‘능소화’를 읽기 전이었을까 후였을까. 언제나 능소화를 보면 그녀의 시가 생각난다. 염천을 능멸하며 피어나는 꽃... 주술에 가까운 귀기어린 힘을 뿜어내는 시이다. 불두화는 수국과 똑같은데 화초가 아니라 꽃나무이다. 무수한 작은 꽃이 다닥다닥 붙어 공처럼 소담하게 피어 난다. 나무의 모양이 괴목에 가까워 건물 벽에 비치는 그림자가 일품이다.



뜰 한 복판에는 커다란 모과나무가 있다. 모과나무는 수형이 독특해서 멀리에서 보아도 알아볼 수 있다. 아메바 모양의 무늬가 있는 표피도 좋고, 나무둥치에 길게 골이 패이는 것도 멋스럽다. 수령이 15년은 되어야 골이 패인다고 한다. 제 껍질을 도르르 말아서 떨구어 내는 인고의 세월을 겪어야 비로소 저만한 형상이 나오는 것이다. 비에 젖으면 더욱 선명하게 살아나는 녹색의 그라데이션..., 모과나무는 스토리가 많은 나무이다.



문득 내 조그만 뜰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한 지점을 찾았다. 흙을 한 트럭 갖다 부어 만든 조그만 동산을 등진 곳이다. 이 곳에 앉으면 동산에 심은 세 가지 색깔의 철쭉을 제외하고는 뜰이 한 눈에 보였다. 꽃을 보려고 심었는데 복숭아가 주렁주렁 열려 탄성을 자아낸 복숭아나무에 치여 작약이 자꾸 오그라들고 있었다. 줄 하나 매어주지 않는 게으른 주인을 탓할 것도 없이 나팔꽃 덩굴이 지들끼리 얽혀지고 꼬아져 단단한 벽을 만들고 있었다. 개심사 해우소 앞에서 두 뿌리 훔쳐온 곰취가 빠른 속도로 번져가고 있는 틈새로, 눈을 비비고 보아야만 보이는 작은 별꽃이 피어 있다. 아침이면 청보라 꽃에서 보랏물이 뚝뚝 떨어지는 자주닭개비는 저녁이라 입을 꼭 다물고 있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자 모과나무 잎사귀가 찰랑찰랑 흔들렸다. 가로등과 간판의 불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잎사귀들이 마치 ‘괜찮아, 괜찮아’하고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청남빛 하늘에 가슴이 알싸해진다. 사계절 붉게 타오르는 적단풍과 예쁜 꽃사과가 매달린 나무 밑으로 붓꽃이 무성하다. 조경업자는 지저분하게 붓꽃을 뭐하러 심느냐고 말했었다. 나는 붓꽃이 좋았다.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피어주는 숙근초라 좋고, 번식력이 좋아 땅 밑으로 뻗어 들어가 무리지어 피는 것도 좋았다. 꽃은 지고 없었다. 그 대신 칼날같이 억센 이파리의 서슬이 시퍼렇다. 꽃은 잠깐인데 이파리는 오래도 가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순간 커다란 씨방이 눈에 띄었다. 제 무게를 못 이겨 고개숙인 씨방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내게는 그것이 무언가 한 소식 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보였다. 그 때 내 마음에 그리움 하나 있었던가. 그 날의 풍경은 내 안으로 들어와 시가 되었다.





꽃 지고 난 후



노란 붓꽃은 잠시잠깐 피었다 지고


칼날 성성한 이파리가 여름내


씨방을 키우고 있다


꽃은 졌어도 아직 남은 해 길어


이파리 더욱 푸르고 날카로운데


꽃보다 더 무거운 슬픔으로


꽃보다 더한 열정을 삭히느라


씨방은 날로 침울해져 간다


꽃 시절 다 보내고


왜 이제 와서 사랑인가


무거워진 씨방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Kathleen Adams가 쓴 ‘저널치료’에는 ‘순간포착’이라는 기법이 나온다.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순간들, 그 순간의 친밀함, 열망, 아름다움, 영광, 고뇌와 슬픔을 글로 나꾸어채는 행위이다.  순간포착은 동결된 한 순간이다. 카메라의 셔터가 영원 속의 한 순간을 필름에 포착하듯이 감격과 감동의 순간을 보존한다. 



그녀는 詩가 순간포착을 위한 유용하고 놀라운 도구라고 쓰고 있었다. 과연 인상적인 순간에 접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시를 썼다. 나는 시를 모른다고 혹은 시를 써 본 적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어떤 선입견도 갖지 않고 당신의 감각을 열어놓는다면 당신의 언어도 시가 될 것이다. 아이들이 모두 타고난 시인인 것처럼 말이다. 당신의 마음 속에 각인된 순간을 찾아 세밀하게 집중해 보라. 당신의 마음의 스크린에 그 장면을 재현시켜 보라. 그리고 그 장면으로 들어가 다시 한 번 연기해 보라. 그 장면에 있었던 모든 소리와 냄새와 감촉을 떠올리며 충분히 느껴보라. 모든 뉘앙스와 모든 세밀한 부분을 재생시키며 준비가 되면 눈을 뜨고 심호흡을 한 다음 순간포착을 시작하라. 마침 크로아티아에서 있을 수업에서는 개인사의 꽃인 ‘사랑’이야기를 하라고 하신다. 이야기든 노래든 춤이든 가장 좋아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되, 반드시 자작시를 한 편 낭송하라고 하신다.



개인사를 연대기별로 서술하는 것이 힘들거나 변화를 주고 싶다면 절정경험을 되살리는 오감체험을 해 보라. 그 장면을 지금 통과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끼며 감각적인 글을 써 보라. 오감을 되살려 충분히 그 장면에 몰입할 수 있다면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감각적인 글이 써질지도 모른다. 그 날의 슬픔과 환희를 완벽하게 다시 느낄 수 있다면 홀가분하게 그 감정에서 벗어나기도 쉬울 것이다. 우리 삶에 끼어든 사소한 삽화가 인생의 아름다움을 구가하는 송가가 될지도 모른다. 오감을 일깨우는 훈련도 되고, 시 한 편 건질 확률도 높으니 좋지 아니한가. ^^

 

 

변화경영연구소 2기 연구원 한명석 (dschool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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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7 09:52:00 *.42.252.67

선배님 글을 읽으니 지난 여름이 생각나네요..

 

개인사를 쓰며 어린 나와, 청소년기의 나를 만나며  울고 웃던 그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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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7 14:18:45 *.88.56.230

은주씨!  

10년쯤 더 지나면^^  글로 정리해 놓은 것만 남고,  나머지는 빠른 속도로 흩어져

그 시간이 다 어디로 갔나 어리둥절할 때가 많답니다.

그러니 '지난 여름'처럼 계속해서 써 나가기 바래요!

 

 

경빈씨!

바쁜 일상의 틈새에 연구소 홈피에 자주 접속해야 하는 일감이 하나 생겼네요.

그래도 좋지 않나요?

'한 번 웨버는 영원한 웨버' 라며 늘 나를 불러주는 사람들이 있어, 언제고 그 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수고많이 하구요,  후반부에는 내가 손 바꿔 줄 수 있으니 기억해 두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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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30 19:50:58 *.169.218.205

항상 말씀하시던 보여주는 글이 어떤 것인지 확연히 보이는 글이네요. ^^

잘 읽었습니다.

제 자신을 종이 위로 내려 놓는 것이 가장 어려운 요즘입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

경빈오빠 - 한샘 다음에는 제가 손 바꿔 줄 수 있으니 기억해 주세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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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31 14:18:33 *.119.126.191

말괄량이 삐삐처럼 쭈삣 올라간 뒷머리가 아주 귀엽네.

사진은 어케 올리는 거지?^^

페이스오프 직전의 전면붕대를 휘감은 듯한 저 얼굴 무서워~~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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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4 17:57:43 *.169.218.205

사진 올리는거. 위에 있는 닉네임 누르면 회원정보수정에서 할 수 있어요.

프로필 사진 넣으면 되어요. ^^

혹시나 잘 안 되시면 메일이나 전화로 다시 설명 드릴께용. 댓글로 하자니 길어저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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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0 09:52:53 *.183.177.20

도와줄 사람 많구만!!  근데 이거 마저 못하면 나 바보겠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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