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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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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30일 20시 34분 등록

                                                                                                     본 칼럼은 변화경영연구소 6기 연구원 박상현 님의 글입니다.

 

버스는 오지 않았다. 한 대, 두 대, 세 대… 5분 간격으로 정류장에 들어선 버스들이 30, 40대를 넘어섰다. 드럼통 화덕에서 장작불은 혀를 낼름거리며 주변의 냉기를 야금야금 잘라 먹었다.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장작불이 눈을 찡긋 하고 입을 삐죽거렸다. 이윽고 버스는 50대를 넘어섰다. 요즘 말로 보험LP였던 엄마는 그날 결국 버스에서 내리지 않았다. ‘꽃감 먹는 호랑이한테 잡혀 먹힌 게 아닐까형이 잠들어 있을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가로등 불빛이 덩그러니 허연 입김을 비추었다. 인적이 끊긴 아파트단지에는 보도블럭이 가로등빛을 받아 일직선을 그렸다. 시린 발을 일자로 모으고 보도의 가장자리를 따라 기우뚱거리며 걸었다. 가로등 빛이 다한 지점에 들어설 무렵전설의 고향시그널이 떠올랐다. 지금쯤 일이 터질 때가 됐는데. 다행히도 뒤통수에서내 다리 내 놔.”라는 절규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움이 존재를 향해 차려논 밥상이라면 기다림은 자신을 위해 감추어둔 꽂감 같은 것임을 그때 알았다. 기다림이 그리움 이상으로 뭉클한 것임을 어렴풋이 안 아이는 서른 무렵 석양을 바라보며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었다. 곁에는 이십 대 후반에 만난 여인네가 앉아 있었다.

난 내 남자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

“…… .”  

난 외제차 몰고 다닐 정도로 여유 있게 살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해줄 수 있지?”

“… 난 다만 오늘을 열심히 살 거라고 약속할 수 있어.”
이 장면이 어디서 본 듯하다는 기시감을 느끼며 난 그렇게 말했다
.

그녀는 이 년 간의 연애가 쌓아놓은 정과 유력한 혼처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사내연애를 인정하지 않는 회사를 떠나 이직하려던 내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사내연애의 끝은 현실에 눌려 시작만큼 창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별 전망이 없어 보이는 미래를 의식하며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로라도 자신을 붙잡아주기를 바랐다. 눈치 없는 나도 그 정도는 알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녀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읍소하고 싶었다. 구체적인 정황은 몰랐지만 그 때 그 순간이 기로인 것은 확실했다. 그녀의 다짐에 응한다면 나는 애 셋을 낳을 때까지 시간을 번 나무꾼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년 간의 연애에서 변하지 않은 그녀의 취향이 아이 셋을 낳는다고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애가 셋이면 그녀의 발목을 잡기에는 충분하겠지. 언젠가는 등을 대고 돌아눕게 되더라도 마음을 감아오는 서늘한 위기감에 충실할라 치면 나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얼마면 되는데.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순간은 또한 어떻게 살 것인가가 정해지는 기로로 느껴졌다. 그녀를 놓칠 것 같은 불안감 속에서도 인생이 그렇게 풀리는 건 나답지 않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서른 살에 그녀와 헤어지고 백 여 번이 넘는 인공 만남을 거듭하면서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다는 유행가 가사를 온전히 내 것으로 소화했다. 이제 여섯 살 아이들의 아빠가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쌍둥이 아이 둘이 매트리스 위에 윷짝처럼 널브러져 있다. 홀로 살다 조용히 사그라질 것 같더니 나로부터 새로운 가족이 생성되었다. 노곤한 몸을 뉘여 아들놈의 작은 손마디를 잡고 있으려면 뭉클함이 배어 나온다. 그건 버스를 기다리며 마음 졸이던 심정이나 떠나는 여인네 앞에서 폭삭 무너지던 드라마틱함과는 다른 것이다. 끼니때가 되면 묵묵히 올려지는 밥 공기 같은 것이라고 할까. 밥벌이의 일상 너머를 까치발로 재어 보되 얼렁뚱땅 탈옥하지 않는 건 지금 여기에 내가 있음을 아이가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아이는 아내와의 관계를 가늠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존재다. 아이는 그대로인데 아이를 두고 우리 부부는 첨예한 갈등을 벌이기도 하고 흐뭇하게 미소를 짓기도 한다. 내가 다니는 교회 재단에서는 교회 내에 장애우 학교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장애아동들의 아버지들이 참여하는 구역모임도 매주 열린다. 교회에는 작년부터 출석했지만 연구원활동에 바빠 구역모임은 참석하지 못했다. 장애아동을 키우는 일은 엄마 혼자의 힘으로 감당하기 벅차다.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역할을 자임하지 않으면 분란이 생길 소지가 크다. 모임에 참여하는 이들은 그러니까 자식에 대해 나름 소명의식을 가진 깬 사람들이다. 나는? 소명의식은 진작 있었으나 상황이 따라주지 못하는 처지였다고 해 두자. 그런데 얼마 전 일이 있었다. 예배를 마치고 장애우 부모들끼리 담소를 나누는 자리에 구역모임을 주도하는 이가 있었다. 내가 먼저 가 아는 체를 하지 않자 아내가 집에 가는 길에 이유를 물었다. 상황을 설명하고 몇 번 아는 체를 했지만 데면 데면 대하는 게 아무래도 모임에 참석하지 않아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아내는 그래도 참고 인사하는 게 아이를 위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에게 굳이 다가가 아는 체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아내는 사람들하고 얘기도 하고 모임에 자주 참석해야 교회 다니는 재미가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맞다. 나는 사도신경으로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매주 예배시간에 다짐한다. 하지만 상황이 있었던 거고 지난 상황에서 파생된 관계를 개선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 아닌가. 그 일로 인해 아내와 나는 오랜만에 말다툼을 했다. 말이 오고 가는 과정에서 표피는 벗겨지고 관계에서 해소되지 않은 본질이 나왔다. 나는노력한 것과 나를 존재 자체로 인정해달라. 가정이 회사도 아니고 아내가 바라는 수준을 채우지 못했다고 한 게 없는 것이냐고 했다. 아내는상대방에게 가장 절실한 것을 채워주는 게 배우자의 몫이다. 아빠, 남편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존재에 대한 존중을 말하라고 반박했다.

 

결혼 9년 차 우리 부부가 극복하지 못한 과제가 이 부분이다. 이런 다툼을 한 번 하고 나면 왠 놈이 골목어귀에서 꿀밤을 매기고 달아난 것처럼 황망하고 비루한 느낌이 든다.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작년에 읽었던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 떠올랐다. 소통에 대한 장자의 철학을 소개한 책인데 아래 대목이 나에게 화두를 던졌다.


이런 임계점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 하나는 자신의 생각을 타자에게 그대로 관철시키고자 하는꿈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타자가 속한 시스템의 규칙을 배우면서 새로운 주체로 변형되는삶의 길이다. 여기에서 장자의 선택은 명확하다. 그는 우리에게삶의 길을 따르라고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꿈의 길, 다시 말해 형이상의 길을 따르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파괴하든가 아나면 타자의 삶을 파괴하는 비극적 결말에 이르게 될 것이다. 132

 

장자는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서 다음두 가지 사항실천해야만한다고 했다. 첫째는 우리의 마음을 일종의 판단중지의 상태(잊어라)로 만들어야 하고, 둘째는 이런 마음 상태로 타자의 소리에 민감하고 역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연결하라)는 것이다. 장자의 소통(疏通)막힌 것을 터버린다’() 개념과타자와 연결한다’()이란 개념의 합성어다. ‘트임이라는 타자로의 개방성을 상징하는개념은 결국비움이라는 망각의 수양론을 함축하고 있다. 장자에 따르면 먼저 자신을 비워야만 우리는 타자와연결될 수 있는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고, 그럴 때야 비로소 비움은 타자에게로 비약할 수 있는 가벼움을 우리에게 제공해 줄 수 있다.

 

연결하라’, 즉 타자와의 자발적 연대가 가능하기 위해선 우선 권력, , 아름다움 등의 초월적 가치가 우리의 삶으로부터 제거되어야만 한다. 나의 초월적 가치는 자아라고 할 수 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된다. 가정경영뿐만 아니라 소설의 주제로도 상당히 흥미를 당긴다. 가슴의 답을 찾을 수 있다면 인생의 햇살이 될 것이다. ‘오늘을 열심히 산다.’-서른 살 놀이터에서 문득 내뱉은 말의 이유를 나는 새삼 뒤적거리고 있다. 왠지 새로운 기로에 선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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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30 21:16:20 *.42.252.67

이 글이 젤 땡겼냐고 나한테 전화하려고 했지?

비오는 날 아침을 올리려고 했는데 말이지....ㅋㅋ 그건 좀  아끼기로했어.

사부님의 글에 이어 청춘의 풍경을 그려보았지.

다시 읽는 칼럼들이 묵은지를 다시 꺼내 놓은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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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4 23:18:01 *.204.8.39

의식하지 못하게 그런 마음이 있었나. ㅎㅎ

읽고 골라주느라 고생 많았슈.^^

묵은지 얘기하니까 추운 공기 마시면서 한잔 하고 싶네~

새해 복 이빠이 받아유.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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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1 00:12:14 *.34.224.87

2012.1.1 새해가 밝았다.

 

버스는 오지 않았고

청춘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청산도의 묵은지와 돼지고기가 생각나는 첫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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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4 23:26:41 *.204.8.39

겨울이 끝나갈 무렵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3박4일의 버라이어티한 일정을 끝내고 그는 연구원

1년을 한박아지로 쏟아냈다던데...

그는 갈수록 목마르다.

희퍼런 정맥이 지나던 자리에 야수의 터럭이 자라고 있는걸까.

Run, Run, Run Devil R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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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4 17:29:28 *.169.218.205

아마도 지희언니 북콘서트 뒷풀이였을꺼예요.

술자리에서 했던 오빠의 카메라와 딸랑이 얘기.

그 얘기와 오버랩 되면서 몰입해서 읽었네요.

잘 읽었어요. ^^ 오빠글 계속 쭉 읽을 예정인 독자가.

 

그리고 우성오빠, 나도 묵은지와 돼지고기 좋아해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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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4 23:34:45 *.204.8.39

그 때가 아마 절정이었지요.

팝콘처럼 튀었지요 머리는 멍했더랬습니다

카메라와 딸랑이 얘기, 새롭네요. ㅋㅋㅋ

 

벌써 철 지난 이야기가 됐네요

요즘은 새롭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자잘한 이야기들

부끄럽고 기억해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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