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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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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8일 07시 28분 등록

숲은 들어갈수록 어두웠다. 지크프리트의 동공은 금새 숲의 어둠에 익숙해졌다. 그에게는 사람들의 소란으로 시끄러운 성안의 시장보다 숲의 침묵이 더 친근했다. 레겐과 함께 보냈던 시절, 그는 늘 숲에서 먹을 것을 구해야 했다. 레겐을 도와 대장간 일을 하던 시간을 제외하고는 숲에서 사냥을 하는 시간들로 어린 시절을 지냈다. 사람이 다니는 길과 멧돼지나 사냥감들이 다니는 길은 달랐다. 그들은 평탄한 길보다는 약간 경사진 길을 따라 키가 작은 덤불 사이를 다녔다. 주로 다니는 길은 정해두고 다녔고, 이정표가 될 만한 나무나 큰 바위에 자신들의 몸을 비벼 냄새를 묻혀 두었다. 그렇게 영역표시를 했고, 서로의 경계를 정했다. 때문에 그 특유의 냄새나 나무 등걸에 붙은 털을 찾으면 쉽게 멧돼지를 쫓을 수 있었다. 새끼를 거느린 암컷은 조심성이 많았고, 포악했다. 사냥하기가 쉽게 않을뿐더러 한참 새끼를 키워야 하는 때는 사냥감으로 적절하지 않았다. 대신 혼자 다니는 수컷이 상대하기가 쉬웠다. 레겐이 왜 자신을 죽이려했는지 지크프리트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동굴 속에 감춰졌던 보물 때문이었다면 더더욱 알 수 없었다. 대장장이에게는 날카로운 칼이나 단단한 괭이를 만들 쇠가 더 귀할 일이었지, 무르디 무른 황금은 별로 쓸 데도 없었다. 그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지크프리트로서는 왜 레겐이 그런 욕심을 가졌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덤불 사이로 발자국이 눈에 띄었다. 분명 혼자인 수컷 멧돼지의 흔적이었다. 발자국이 찍힌 흙 주변에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것이 이곳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했다. 다행히 바람은 불지 않았다. 지크프리트는 소리를 죽이며 발자국을 따라갔다. 발자국은 계곡 아래 물가로 이어졌다. 아마도 목이 말랐던 모양이다. 물가에서 잠시 지크프리트는 목을 축이고 싶었다. 그는 손에 들었던 활과 화살을 곁에 두고 허리춤에 도끼도 풀었다. 무릎을 꿇고 옴팡지게 두 손을 모아야만 담을 정도로 작은 물줄기였다. 물은 더 없이 맑았고, 시원했다. 거기까지였다. 한 모금 마신 물이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순간 차가운 쇠 냄새가 몸을 관통했고, 역한 피 냄새가 목젖으로 넘어왔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눈에 들어온 창날은 분명 자신의 가슴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어지러웠다. 하늘이 빙빙 돌기 시작했고,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겐이었다. 아니 그 뒤로 얼핏 군터의 모습도 비쳤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목구멍을 가득 매운 자신의 피가 입에 고였다. 왜... 도대체 왜... 군터가 하겐이 왜 나를... 묻고 싶었지만, 말을 뱉을 입이 없었다. 가물거리는 눈앞에 크림힐트의 환영이 다가왔다 사라졌고 이내 파프터의 말이 들려왔다.

 

‘황금에 눈이 먼 자는 친구를 배반 할 것이다...’

‘나의 오늘이 너의 내일이 될 것이다....’

 

보름스 성은 침묵에 잠겼다. 방금 전 지크프리트의 시신을 맞이한 성문은 아직도 활짝 열려 있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크림힐트는 오열했다. 이제 막 사랑하는 남자의 죽음을 맞은 여인의 비명소리를 채우기에 성은 너무 작았다. 뒤늦게 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 브륀힐트를 빼고 움직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지크프리트의 심장처럼 멈춰 있었다. 군터도 하겐도 사냥에서 돌아온 어떤 이도 제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서 있었다. 한참을 오열하던 크림힐트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지크프리트의 시신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넋이 나간 채로 자신의 남자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졌던 반지를 꺼냈다. 그리고 죽은 지크프리트의 손으로 반지를 가져갔다. 군터가 움직인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지금껏 침묵하던 그는 재빠르게 크림힐트의 손에서 반지를 가로챘다. 그 순간 하겐이 칼을 꺼내들었다. 칼집에서 칼이 빠져나가는 소리에 군터도 반사적으로 칼을 움켜쥐었다. 군터가 하겐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는 분노와 놀라움으로 뜨거웠다. 하지만 하겐의 목소리는 쇠처럼 차가웠다. 하겐은 반지를 원했다. 군터는 양보할 수 없었다. 아니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당연히 자신이 차지해야 할 것이었다. 이미 자신은 라인 강에서 바다 건너 북쪽나라까지를 차지한 왕이었기 때문이었다. 감히 하겐 따위가 욕심낼 반지가 아니었다. 하겐의 반응은 여전히 차가웠다. 하겐의 입에서 비밀의 고리들이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사내들끼리 맺었던 비밀의 서약은 벌써 깨져버렸다. 그는 브륀힐트를 차지하기 위해 군터가 어떻게 욕심을 부렸는지 폭로했다. 한 번 깨진 항아리는 더 이상 물을 담아 둘 수 없었다. 군터는 지크프리트의 등에 창을 꽂은 하겐을 저주했다. 하겐은 군터의 더러운 입으로 더 이상 의리를 말할 수 없다고 받아쳤다. 두 사내의 칼은 떨어져 서로를 겨누고 있었지만, 허공에서 부딪히는 말은 칼보다 더 예리한 상처를 내었다. 브륀힐트의 가슴이 먼저 베어졌고, 크림힐트의 마음이 찢겨졌다.

 

군터는 하겐의 출신이 천박함을 까발렸다. 미동조차 없던 하겐의 미간이 잠시 찌그러들었다. 살아남은 자 중 아무도 모르던 사실들이 쏟아져 나왔다. 죽은 지크프리트조차 몰랐지만, 하겐은 레겐의 친아들이었다. 어린 하겐은 그들의 머나 먼 조상이 니벨룽겐이며, 신들이 자신의 종족으로부터 반지와 보물을 빼앗아 파프네에게 가져다주었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다. 그렇지만 하겐이 볼 때 아버지 레겐은 그저 하찮은 대장장이에 지나지 않았다. 대장장이의 신분은 비천했고, 하겐은 그런 아버지가 싫었다. 자기 또한 대장장이로 평생을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를 버렸다. 집을 뛰쳐나온 하겐은 자신의 재주와 능력을 믿었고, 마침내 군터의 신임을 얻게 되었던 것이었다. 니벨룽겐의 후손인 하겐의 말이 계속되었다. 라인 강의 황금 반지는 다시 그 종족의 손으로 되돌려져야 한다고. 이미 반지를 손에 쥔 군터나 다시 반지를 되찾으려는 하겐이나 서로 물러설 수 없었다. 마침내 둘의 칼이 부딪쳤다. 승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허공을 가르던 날카로운 소리가 서너 번을 울리더니 군터가 꼬꾸라지고 말았다. 하겐은 재빨리 군터의 손에서 반지를 빼앗았다. 그렇지만 하겐은 제 손의 반지를 껴볼 수 없었다. 어느 틈엔가 브륀힐트의 칼이 하겐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브륀힐트는 자신을 모욕한 하겐을 용서할 수 없었다. 남편인 군터에 대한 복수라기보다는 한 나라의 왕을 속인 괘씸함을 물어야 했고, 무엇보다 여인의 자존심을 짓밟은 죄를 용서할 수 없었다. 브륀힐트는 시간을 끌지 않았다. 하겐의 목이 힘없이 떨구어졌고, 반지는 다시 지크프리트의 손으로 돌아갔다.

 

지크프리트의 장례는 크림힐트가 챙겼다. 그녀는 그의 시신을 작은 배에 태웠다. 그가 결혼반지로 주었던 반지가 그의 손가락에 되돌려져 있었고, 투구와 함께 그가 파프네로부터 빼앗았던 보물들도 배에 실렸다. 라인 강의 바람과 부드러운 물결이 지크프리트의 시신을 실은 배를 끌어갔다. 보름스 성 아래 언덕에서 얼마쯤 멀어졌을 때 궁수가 불이 붙은 화살을 날렸다. 배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잠시 후 배는 서서히 라인의 강물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붉은 빛 황금 보물은 이제 다시 라인의 강 밑바닥 어딘가에 묻혀 졌다. 반지에 새겨진 저주도 지크프리트도 함께 강물 속에 잠겼다.

 

한편 군터는 자신의 조상들이 묻힌 성소에 묻혔고, 하겐은 숲속 어디엔가 버려졌다. 브륀힐트는 군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떠나는 뱃전에서 그녀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크림힐트는 지크프리트의 장례가 끝난 얼마 후 모습을 감췄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라인 강의 물안개가 짙게 피어오르던 어느 날 지크프리트의 환영을 따라 강물에 몸을 던졌다고 하기도 하고, 라인의 세 처녀들이 그녀를 거두어 갔다고도 했다. 라인 강의 뱃길을 따라 오르내리던 뱃사람들의 말로는 라인의 협곡 어디쯤에서 그녀의 노랫소리를 들었다고도 했다. 뱃사람들은 그녀의 노랫소리가 깊은 슬픔에 잠겨 듣는 이의 혼을 훔쳐간다고도 했다.

 

부르군트 왕국은 멀리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난 훈족의 왕 아틸다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보름스를 떠난 크림힐트가 훈족의 왕 아틸다를 만나 청혼을 받고 그의 아내가 되어 부르군트 왕족을 멸하는 복수를 했다고도 전한다. 무엇이 사실인지 또 라인 강변 고성들의 잔해 속에 감춰진 비밀들을 말해 줄 사람도 지금은 아무도 없다. 다만 변함없는 라인 강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보물도 저주도 사랑도 그리고 비극적인 영웅들의 죽음도. 욕망의 비밀까지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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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8 07:31:36 *.186.57.90

그 동안 재미도 없고, 길기도 한 글을 읽어주시니라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좀 다른 모습으로 찾아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감사드립니다. ㅎ

- 진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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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9 17:59:24 *.143.156.74

선배님도 수고(?) 많으셨어요.

다음 주부터는 어떤 글이 올라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꾸준히 쓰다보면 뭔가 손에 잡힐 겁니다.

화이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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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30 11:33:46 *.42.252.67

다른 모습의 글 기대하고 있습니다.

바쁘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글이 안 올라오나요??

화이팅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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