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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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사랑, 창피한 사랑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 이미지 www.yes24.com
장맛비가 내린다. 장마철이 되면, 이상하게도 나는 메콩강의 넘치던 황톳빛 물살이 떠오른다. 작년 이 맘 때, 강남역에 침수가 되었을 때, 나는 SNS에 이런 글을 남겼다. ‘강남역. 지금 메콩강이 되었음.’
메콩강은 중국의 티베트에서 발원하여 미얀마,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을 거쳐 남중국해로 흐른다. 많은 나라를 거쳐 구비구비 흘러내려간다. 메콩강은 많은 나라를 거치면서 많은 사람과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생명체이다. 이렇게 여러 인종과 사람, 그리고 국가를 거쳐가는 메콩강을 생각하면 나에게 동시에 '부끄러운 사랑'의 영상이 떠오른다. 장마. 메콩강, 그리고 감추고 싶은 사랑...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이 창피하고 부끄러운 존재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 이라는 작품은 바로 ‘부끄러운 사랑’에 돌직구를 던진다. 보통의 소설 같으면, ‘위대한 사랑’을 꿈꾸며, 그 사랑을 세상에 알릴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랑을 하고 있다고. 이런 사랑은 위대한 사랑이라고. 그러나 뒤라스가 그려낸 사랑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남자를 사랑하면서도 줄곧 그 남자를 창피하게 생각하고 부끄러워 아무에게도 드러내놓고 싶지 않다. 15살의 사춘기 소녀에게 다가온 사랑. 처음에는 ‘사랑’이라기보다는 성적인 호기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육체적인 관계에서 시작된 불장난 같은 끌림은 그녀의 나이 70이 넘어서야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평생을 그 사랑을 부끄러워했다.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꽁꽁 숨기려고 했다.
1929년 프랑스령 베트남.
가족과 함께 방학을 보낸 소녀는 기숙학교로 돌아가기위해 메콩강을 건너는 배에 오른다. 온통이 황톳빛으로 젖어들어있는 메콩강 유역. 그리고, 식민국의 유색인종만이 타는 배에 유일하게 타고 있던 프랑스 소녀. 같은 배에 타고 있던 중국인 남자는 시선을 사로잡은 소녀에게 말을 건다. 두 사람은 첫눈에 교감한다. 그 교감의 근원은 아마도 성적인 매력이었을 것이다. 둘은 이내 친해지고 소녀는 남자의 리무진으로 등하교를 하게 된다. 어느 목요일, 그는 ‘끊임없이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으로 북적대는 그의 침실로 소녀를 끌어 들인다. 소녀는 그곳에서 출혈을 하고, 그는 소녀의 피를 닦아준다. 그리고 약 1년 반 동안 남자와 여자의 육체를 탐하는 사랑이 지속된다.
가난한 환경으로 무기력 해진 노름에 빠진 어머니, 어머니의 편애를 받으며 마약과 폭력을 일삼는 큰 오빠, 늘 큰 오빠에게 시달리는 나약한 작은오빠. 그리고 작은 오빠의 죽음... 소녀가 느끼는 강렬한 육체적 욕망과 해방감의 이면에는 그녀의 비정상적인 가족관계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어머니와 큰 오빠는 중국인 남자와 관계를 갖는 막내를 혐오하면서도 남자의 가진 돈을 이용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파렴치한 가족들과 나약한 연인 사이에서 소녀는 한 순간에 ‘늙어’ 버린다.
열여덟 살에 나는 늙어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다 그러는지 어떤지는 알지 못하고, 결코 물어본 적도 없다. 다만 가장 싱그러운 젊은 날을, 생애에서 가장 축복받은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이따금 충격적인 시간들이 후려치곤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나에게 얘기해 주었던 것처럼 여겨질 뿐이다. 늙어간다는 것은 가혹했다. 나는 늙음이 내 얼굴에 찾아와 내 모습을 하나씩 하나씩 변화시키는 것을 목격했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p.10 중
어둠과 소음으로 쌓여있는 남자의 아파트는 소녀에게 욕망을 경험하고 해방감을 느끼게 하는 장소이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가족에 대한 혐오가 더해 갈수록 소녀는 남자와의 관계에 더욱 몰입하고, 그 관계는 점점 광적인 욕망과 공허한 사랑으로 치닫는다. 첫 번째 관계 도중에 남자는 눈물을 흘린다. 두 사람은 아무런 목적 없이 공허함만으로 서로를 사랑을 나눌 뿐이다. 육체적 사랑에 대한 댓가로 남자는 소녀에게 돈을 건내고, 소녀는 그 돈을 수령하지만, 남자는 돈을 이용해 그녀를 산 것도, 지위를 이용해 강제로 그녀의 몸을 취한 것도 아니었다. 공허한 몸 놀림과 공허한 돈 거래가 있을 따름이다.
울면서 그는 그것을 한다. 처음에는 고통이다. 그다음에는 고통이 사그라지면서 변해간다. 천천히 고통에서 빠져나와 사그라지면서 변해간다. 천천회 고통에서 빠져나와 쾌락으로 빨려 들어가, 향락을 즐긴다.
형체가 없는 바다, 비길 데조차 없는 그 바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p.49 중
중국인 남자는 소녀의 몸을 원했고 소녀는 남자를 통해 일탈을 원했다. 소녀는 그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한 걸까. 혐오감과 욕망, 애정과 애증이 뒤섞인 관계. 결코 지속될 수 없는. 출구가 없이,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정사만이 끝없이 이어지는, 어둡고 습한 미로와 같은.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뒤라스는 그것을 바로 ‘사랑’ 이었다고 이야기한다.
프랑스가 낳고 메콩강이 기른 마르그리트 뒤라스. 그녀는 1982년 알콜 중독으로 뇌이(Neuilly)의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병원에서 알콜중독 치료를 받으며, 일흔 살의 나이에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담은 자전적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베트남에서의 가난으로 인해 비참했던 사춘기 시절의 생활과 중국인 남자와의 첫 경험에 이른 기억. 그 시절은 뒤라스에게는 슬픈지만, 아름답고, 아프지만, 아련한 그리움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녀에게 이 작품은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을 안겨주었고, 이에 프랑스 최고 문학상인 콩쿠르는 그녀의 작품에 수상의 명예를 안겼다.
<연인>은 관능적이고, 섬세하며 공허하다. 중국인 갑부와 어린 프랑스 소녀의 사랑은 그렇게 파행적으로 지속된다. 그러나 그들은 안다. 그들 서로는 부정했지만, 이것이 바로 사랑이었음을. 그리고 그 사랑의 종지부를 바로 눈앞에 두었음을. 끝이 보이는 사랑 앞에서 그들은 더욱 간절해지고 서로에 대해 더 집착하며 육체에 탐닉하게 된다.
둘은 처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연인이었다. 인종의 차이, 나이의 차이, 빈부의 차이, 그리고 가족의 차이가 극명했다. 30대 중반의 중국 남자와 15살의 프랑스 소녀, 식민지와 식민통치국의 관계, 동양과 서양의 남자와 여자, 가진 자와 가난한 자의 격차, 지금 같으면, ‘원조교제’라고 사회적인 지탄을 받을 만한 관계를 지닌 그 존재를, 그녀는, 부끄러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정리하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그녀는 그녀의 인생을 정리하며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렇게 부끄러워했던 그 사랑을 그녀의 연필 끝에서 정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내 나이 칠십에 나는 어떤 이야기를 쓰게 될까. 칠십이 되면, 부끄러운 사랑이야기를 나는 쓸 수 있을 것인가. 평생, 무덤 속까지 가지고 들어가고자 했던 부끄러운 이야기를 쓰게 될까.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혹은 젊은 시절의 불장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문득 생각나는 나이에, 나는 그렇게 부끄러워하던 것을 당당히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그에 대해 품고 있는 이 무모한 사랑은 나에게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로 남아있다. 왜 내가 따라 죽고 싶을 만큼이나 그를 사랑했는지,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내가 이 사랑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은 지 10년이 지났고, 그래서 그에 대해 거의 생각하고 있지 않은 무렵이었다. 나는 영원히 그를 사랑할 것 같았고, 이 사랑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날 것같지 않았다. 나는 죽음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p.126 중
아직, 강남역 지역이 메콩강의 황톳물이 넘치지는 않은 모양이다. 나는 아직 내 부끄러운 사랑을 메콩강에 흘릴 준비가 되지 않은 지도 모르겠다. 강남역 침수라는 검색어가 아직도 SNS에 뜨지 않은 것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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