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주
- 조회 수 5359
- 댓글 수 9
- 추천 수 0
이 컬럼은 변화경영연구소 6기 연구원 이은주 님의 개 '오리오'가 쓴 글입니다.
나는 한눈에 알아 보았다. 산책 길에서 만난 검은 옷을 입고 있고 풍만한 가슴을 가진 암캐, 내가 늘 상상하던 나의 이상형이었다. 집 근처에도 없는 성당의 종소리가 귀에서 댕댕 울리고 현기증이 났다. 사랑은 가슴이 반드시 이야기 해준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지만 이렇게 다가올 줄은 정말 몰랐다. 내 가슴은 말하고 있었다. ‘저 검둥개를 놓치지 마.’ 마치 내 가슴 속의 말을 들은 듯 그녀는 씩~ 웃고 있었다. 반짝이는 검은 입술 사이로 쏙 내놓은 혀는 농익은 복숭아처럼 분홍색에다 물기가 촉촉했다. 그녀는 마르고 쎅시한 스타일이 아니라 퉁퉁하고 풍만함을 가진 넉넉한 몸매였다. 딱! 내 스타일이었다. 힘든 날, 때론 기분이 우울한 날, 푸근히 안아줄 수 있는 품이 있는 그녀. 하루를 보낸 노곤함을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자고 싶었다. 지금 마음에는 저 큰 가슴에 압사가 되어도 행복한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얼굴 생김새도 눈 거리가 조금은 멀어 까칠하거나 사나운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눈 주위에 흰 털이 동그랗게 나있어 마치 흰 안경을 쓴 것 같은 지적인 모습에 살짝 접힌 한쪽 귀의 귀여움까지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는 것처럼 언제 이 자리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나는 그녀에 비해 너무 왜소했지만 그것이 사랑하는데 장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급하지 않게 서서히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냄새를 맡기위해 나는 기린처럼 목을 빼야 했다. 예전 같으면 내 상대가 아니라고 돌아섰을 나였지만 사슴이 되든 기린이 되든 자존심은 바닥에 떨어진 계란처럼 깨져버렸다. 역시 나의 매력에 그녀도 정신 줄을 놓은 모양이다 얌전하게 서 있다.. 세상에! 다리 사이로 보이는 가슴 한 개가 내 머리통보다 더 컸다. 젖꼭지도 어찌나 탐스러운지 나도 모르게 혀가 나와 입언저리를 한 바퀴 돌고 있었다. 어릴적 형제들의 쟁탈전에서 차지했던 통통한 엄마 젖이 생각이 났다. 젖에 앞발 하나 올리고는 꾹꾹 누르면 쭉쭉 나왔던 따뜻하고 비릿한 젖이 그리웠다. 사방을 둘러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엔지는 햇빛 좋은 날 마당에서 광합성을 하고 오라며 우리를 내보내 주고 집 안에서 전화로 수다 떨기에 바빴다. 기회는 찬스다! 뒷다리에 힘을 단단히 주고 앞다리를 들어올렸다. 긴장감 속에 뒷일은 잊은 채 그녀의 몸 속으로 건너가고 싶은 조바심이 끓어 올랐다 그녀의 허리를 잡으려는 순간 허리는 커녕 엉덩이에도 앞발은 닿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뒷다리 하나를 두발로 꼭 붙드는데까지 성공을 할 찰라, “담비야, 담비야 어딨어? 어서 와, 네 새끼 젖 먹일 시간이다.” 그녀는 담비야~라고 주인이 부르는 소리에 몸을 확 돌리는 순간 나는 그녀의 꼬리에 머리를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새끼 젖 먹일 시간?’ 그녀의 풍만한 가슴은 새끼들 먹일 퉁퉁 불은 젖통이었다. 담비는 젖통을 철렁거리며 쏜살같이 언덕 위쪽으로 달려 갔다. 나는 담비가 언덕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바라만 보았다.
“오리오, 방울이 찾아 와. 이제 들어 와서 발 씻고 간식 먹어야지” 엔지의 목소리에 사라진 담비의 여운이 확 깨져 버렸다. ‘날기도 전에 벼락처럼 덮쳐 새를 잡아 꽁지를 입에 물고 들어 오는 번개 같은 놈을 나 보고 어떻게 찾아오라는 거야’ 방울이가 아니라 담비가 우리 집에 같이 살았으면 좋으련만……이내 이 생각은 머리를 털어 지워버렸다. 가여운 방울이는 중성화 수술로 향기 없는 꽃이 되었다. 때로는 담비처럼 엄마가 되고 싶은 본능을 떨쳐 버리려고 저렇게 뛰어다니나 보다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찡! 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깨가 늘어지고 고개가 숙여지고 눈동자가 초점을 잃으면 그건 사람들이 슬퍼하는 거였다. 그런데 지금 내 어깨에 힘이 빠져 내 코가 바닥을 훑고 있었다. 그래 나는 슬펐던 거다. 개들의 사랑은 조건이 맞아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이럴 땐 키 작은 남자가 키 큰 여자와 결혼을 해서 애 낳고 잘 사는 인간들이 부럽다. 그나마 건진 것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 두 글자, ‘담비’. 지금 막 내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나는 그녀가 벌써 보고 싶었다. 방울이를 찾아 나선 척 하고 나는 그녀가 달려간 언덕 위를 오르며 아까 그녀에게 맡았던 향기를 기억해 집을 찾아 나섰다. 그녀도 나를 거부하지 않은 것을 보면 내가 남자로 싫지 않은 모양이 틀림이 없다. 그녀의 가까이에라도 가있고 싶었다. 나처럼 그녀도 나를 그리워한다면 내 냄새가 그녀의 기쁨이 될 것이다. “아이고 우리 담비 목줄이 어떻게 풀렸다냐 큰일날 뻔 했네 그래도 똑똑한 우리 담비 제 새끼 잊지 않구 잘 찾아 왔구나.” 그녀의 주인으로 보이는 할머니의 말에서 담비 이름이 들렸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이 촘촘히 심어 놓은 쥐똥 나무 울타리가 그녀가 사는 집 담장이었다. 나는 나무 틈 사이로 집안을 들여다 보았다. 할머니는 담비의 머리통을 어찌나 살뜰히 쓸어주는지 그녀의 눈꺼풀이 딸려 올라가 흰자위가 보였다. 그녀의 흰 자위는 너무나 맑아 푸른 빛이 났다. 담비를 저렇게 마구 만질 수 있는 할머니가 부러워 목이 메이는 순간 목덜미가 채이는 느낌이 들었다. ”오리! 너 방울이 찾아 오라니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엔지가 화가 났다. 엔지는 화가 나면 나를 ‘오리’라고 짧고 단호한 음절로 불렀다. 하얀 몸뚱이에 암컷 한 번 올라 탈 수 없는 짧은 다리 ‘꽥꽥’ 그래 나는 오리였다.
밤이 되니 이루지 못한 사랑이 그리워 몸이 근질거렸다. 식탁에 앉아 티브이를 보며 콩나물을 다듬는 엔지의 하얀 다리가 보였다. 담비의 젖통만큼 뽀얗다. 나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아 올랐다. 아주 천천히 슬금슬금 다가가 엔지의 발목을 두 발로 잡는데까지는 성공을 했다. 엉덩이에 힘을 주고 옴찔옴찔 방아를 찧는 순간 “오리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하고는 붙은 나를 떨어 뜨려 보려고 흔들었지만 난 힘을 다해 발톱까지 살에 박으며 붙어 있었다. “아야, 안 놔” 드디어 엔지는 놀고 있던 다른 발을 사용해 세게 밀어 나를 떼버렸다. 찍 미끄러져 냉장고 문짝에 등허리가 쿡 찍혔다. “쪼그만게 이제 별 짓을 다해요, 에구 징그러워” 내 나이 엔지 나이를 넘어선지 오래이건만, 등 굽고 머리 하얀 할머니가 아들에게 ‘아가 오늘도 차 조심하고’하는 할머니처럼 엔지의 머리 속에는 눈썹 하얀 나는 언제나 그녀의 아가였다.
아침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늘씬하게 몸을 늘려 기지개를 키고 거실로 나갔다. 엔지가 밥을 주는 시간이다. 밥그릇 앞에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방울이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방울이가 유일하게 제일 얌전한 자세로 말을 듣는 시간이기도 하다. “오늘은 코다리 북어 머리 푹 삶은 물에 밥을 말았어 완전 보약이야 방울아 많이 먹어.” 냄새가 비릿하며 구수하니 입맛이 돌았다. 그런데 나에게는 밥을 주는 엔지는 다르 날과 사뭇 달랐다. 마치 손등에 앉아 있는 송충이에게 뽕잎을 주는 야릇한 표정과 눈빛이었다. 나는 다른 날과 똑같이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집 안 한 바퀴를 돌며 내 할 일을 했다. 지나간 시간은 나를 사로잡지 못했고, 앞으로 닥쳐올 추위도 걱정하지 않았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현재일 뿐이니까…….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676 | 쉬운 여자 [5] | 승완 | 2011.12.26 | 6239 |
675 | 미스토리로 두 마리 토끼 잡기 [6] | 경빈 | 2011.12.26 | 5214 |
674 | 몸의 정복자 [1] | 옹박 | 2011.12.28 | 5157 |
673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길 (박중환) [2] | 로이스 | 2011.12.29 | 5572 |
672 | 다시 시작되는 길... [10] | 희산 | 2011.12.30 | 5418 |
671 | 청춘의 풍경들 [6] | 은주 | 2011.12.30 | 5009 |
670 | 내면의 에너지 열정을 품어라 [2] [7] | 승완 | 2012.01.02 | 6833 |
669 | 신입사원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3] | 경빈 | 2012.01.03 | 16372 |
668 |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거라" [10] | 옹박 | 2012.01.04 | 7121 |
667 | 가면나라 이야기 (양재우) [2] | 로이스 | 2012.01.05 | 4833 |
666 | 관음죽 분을 갈다 (by 좌경숙) [1] | 희산 | 2012.01.06 | 5461 |
» | 내 사랑 담비 [9] | 은주 | 2012.01.06 | 5359 |
664 | [소셜 빅뱅] 1. 당신의 검색이 신종 플루를 막는다 [3] [1] | 승완 | 2012.01.09 | 6798 |
663 | 여정 [3] | 경빈 | 2012.01.10 | 4466 |
662 | 자전거와 일상의 황홀 [3] | 옹박 | 2012.01.11 | 5032 |
661 | 도구, 그 수단과 방법에 관하여 | 희산 | 2012.01.13 | 9611 |
660 | 두 친구, 그후.... [2] | 은주 | 2012.01.13 | 5987 |
659 | 새벽 일기 [4] | 승완 | 2012.01.16 | 5384 |
658 | 당신의 아침에 여유는 누가 줄 것인가? [6] | 경빈 | 2012.01.17 | 4766 |
657 | 크로아티아 여행을 기다리며 1 & 2 [1] | 희산 | 2012.01.20 | 446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