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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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정경빈 2기 연구원이 쓴 글입니다. (2009.05)
살다보면 종종 갈림길에 위에 서게 된다.
이 일을 할지 말지 이 길을 갈지 말지 입구에서부터 발을 멈추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선악(善惡)이 분명하거나 호불호(好不好)가 명확한 길이라면 고민 끝에 분명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라면 애초에 고민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좋고 나쁨, 이롭고 해로움을 도무지 알 수 없을 때에는 어찌해야 할까. 좌우의 경중을 따질 수 없는 오직 선택의 문제만 있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때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은 오직 하나인 줄로만 알았다. 내가 원하는 길을 가지 못하면 실패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니 어떠한 어려움이 오더라도 나는 견디고 일어서야 했고, 세찬 비바람을 뚫고서라도 그 길을 고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세상일은 그렇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살면서 지켜야 하는 것들이 하나씩 늘어남에 따라 고집의 심지는 점점 가늘어질 수 밖에 없었다. 요즘의 나는 조금 더 유연해졌다. 식물처럼 여러방면으로 다양한 가지를 뻗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그러다가 막히는 것을 실패라고 여기지 않게 되었다. 나는 조금 더 크는 법을 배웠다.
갈림길이 찾아 왔다는 것은, 내가 한 번 더 클 수 있는 날이 왔다는 뜻이다. 가능하다면 내가 원하는 곳으로 뻗는 것이 더 좋다. 하지만 설사 그렇게 되지 못하더라도 나를 탓하거나 인생을 비관할 필요는 없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나는 분명 자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갈림길에 서게 된다면 성공과 실패라는 세속적 기준에만 눈을 두지 말기를 바란다. '성장'에 선택의 기준을 두고 내가 어느 쪽으로 가면 더 자랄 것인가를 판단해 보자. 최선을 선택하면 가장 좋다. 하지만 차선을 선택하더라도 '성장'은 건질 수 있을 것이다.
선택의 기준
선택을 위한 기준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피해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을 알아야 하고 이러한 기준들을 적절히 배합할 수도 있어야 한다.
§ 물질적 조건 §
선택을 함에 있어 가장 명확하게 보이는 부분이다. 어떤 조각이 더 큰 지를 알아 보려면 금전이나 보상만큼 명확하게 비교되는 것이 없다. 그 때문에 사람들의 선택을 가장 크게 좌지우지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장 쉽게 속는 부분이기도 하다. 금전적 보상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숨겨져 있는 약점이 있다는 뜻이다. 일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든지, 아주 험한 일이거나 누구나 다 꺼려하는 일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물질적 조건만을 보고 선택한 사람들이 후회할 확률이 높은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돈의 뒷면에 뭐가 숨겨져 있는지를 충분히 알고 나서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 인간관계 §
선택을 가장 주저하게 하는 것이 인간관계이다. 사람들 때문에 그 길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지만 사람들 때문에 그 길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도 아주 많다. 특히나 오직 인간관계만 생각하는 의리파들에게는 종종 눈을 가리는 연막으로도 작용한다. 사람이 선택의 기준이 될 경우에는 과거가 아닌 미래에 중점을 두는 것이 현명하다. '누구와 얼마나 오래 시간을 보냈는가', '내가 누구에게 신세를 가장 많이 졌는가' 와 같은 과거의 사실이 기준이 되는 것보다 '누구와 함께 보내는 것이 서로에게 더 도움이 되는가', '나와 그가 앞으로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을까'와 같은 미래 시점의 기준이 필요하다. 선택을 하고 나서 발목이 잡혔다는 느낌이 들면 시작부터 삐그덕 거릴 확률이 높다.
§ 안정성 §
인간은 누구나 편안함을 원한다. 이는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지금의 상황이 달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 얻었던 것을 내일도 똑같이 얻길 바란다. 항상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현대사회에 접속해서 살고 있는 한, 우리는 항상 수많은 파도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니 선택의 기준에서 안정은 지우기는 것이 더 낫다.
사실 안정은 어떤 길에서든 만날 수 있다. 초기에만 새로운 일의 리듬을 타지 못해 불규칙적으로 넘실댈 뿐이지,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몸이 알아서 새로운 일의 리듬을 배우게 되어 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도 정형화된 패턴이 있기 마련이고, 몸은 무엇보다도 빨리 그 패턴을 알아차릴 것이다.
§ 성장 §
성장을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는 나이테의 원리를 받아 들일 수 있어야 한다. 나이테 원리란 우리의 과거는 우리의 현재 속에 들어 있고, 우리의 현재는 우리의 미래 속에 자리 잡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즉, 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현재와 과거를 품고서 한해 한해 성장할 것이라는 가정을 믿어야 한다. 다행히도 동양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사고가 쉽게 가능한 반면, 서양 사람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직선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가정할 수 있다면, 갈림길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어떤 길을 선택했을 때 나는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는가?'
즉 선택의 문제가 성장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곳이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느냐의 문제로 바뀌기 때문에 선택의 순간부터 긍정적인 고민이 시작되는 것이다. 양쪽 모두 성장의 길이고 나는 조금 더 성장할 수 있는 곳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이는 다분히 자기주술적이기는 하지만 똑같은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과는 극에서 극으로 달라질 수 있다. 그만큼 생각과 자세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세를 숲에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행복숲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 김용규씨는 숲의 성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숲 바닥으로 버려지는 수많은 시도(가지와 줄기)들이 미생물을 만나 썩음으로써 다시 자신과 주변 생명체의 삶을 비옥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리라는 걸 나무들은 알고 있습니다...(중략)... 인간은 그러한 흔적을 실수나 실패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나무의 삶이 보여주듯이 그러한 모색의 결과로써 제 삶의 모양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무의 가지 하나가 전체 나무의 수형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무수한 가지의 들고남이 멋진 나무의 모습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가지 갈래길에서 인생이 결정되지는 않는다. 여러 선택과 시도들이 모두 모여 사람의 폭과 깊이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성장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고무될 수 있는 것이다.
선택이 끝났다면, '갈탄이 되어라'
선택의 순간이 끝났다면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다. 내가 가지 않은 길에 미련이 남더라도 더 이상 고개를 돌려 쳐다볼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산다는 것은 어차피 버림의 연속이다.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상황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미 저만치 일이 진행되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과 만나게 되면 최대한 빨리 감정을 정리하고 따라잡아야 한다.
이제부터는 새로이 들어선 길에 재빨리 익숙해지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시간적인 여유가 확보된다면 천천히 음미하면서 시작해도 되지만 대부분 그렇게 너그럽지 않을 것이다. 일을 빨리 배우고 싶다면, 아주 괜찮은 방법이 하나 있다. 내가 충분히 그 효과를 누려본 방법인데, 바로 '조르바처럼 갈탄이 되는 것'이다.
"갱도를 팔 때는 '오냐, 내가 바라는 건 탄이다' 하고 나 자신이게 다짐했지요. 그래서 대가리에서 발 뒤꿈치까지 몽땅 갈탄이 되는
거지요...(중략)... 일할때는 말 걸지 마슈. 뚝 부러질 것 같으니까. 나는 일에 몸을 빼앗기면, 머리꼭지부터 발끝까지가 잔뜩 긴장하여 이게 돌이 되고 석탄이 되어버린단 말입니다. 두목이 갑자기 내몸을 건드리거나 말을 걸면 돌아봐야죠? 그러면 꼭 부러져 버릴 것 같다는 말입니다"
일을 빠른 시간에 배우고 싶은가? 그렇다면 하루 종일 오직 그 일만 생각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저녁에 잠들때까지 오직 그 일만 생각하는 것이다. 배워야 할 지식이 있다면 모두 머리속에 넣어야 하고, 몸으로 배워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모두 직접 해봐야 한다. 그렇게 최소한 두달을 할 수 있으면 새로운 일을 하면서 불편하지 않을 수준까지 올라 올 수 있다.
나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됐을 때, 하루를 온전히 그 일에 바쳤다. 새벽에 일어나 두 시간 동안 업무지식을 익혔고, 출퇴근길 지하철과 버스에서도 서류를 들고 다니며 줄쳐가며 배워냈다. 업무를 하면서도 내 일과 남 일을 구별하지 않고 알아야 되는 모든 것을 다 내 것으로 만들려 했다. 또 몸으로 겪어야 할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부딪혔고 그 결과를 하나하나 기록해 두었다. 그렇게 딱 두 달을 채우고 나니 현재 내 위치에서 알아야 할 상황을 거의 다 알게 되었다. 오직 숙련의 문제만 남은 것이다. 이 동안은 내가 좋아하던 모든 것을 중지했다. 책도 보지 않았고, 글도 쓰지 않았다. 영어공부도 하지 않았고 정보검색도 하지 않았다. 오직 '일' 뿐이었다.
가장 빨리 적응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방법이 유용하다. 대신 한쪽으로 치우친 삶을 오래도록 지속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시한을 정해 두는 것이 좋다. 저울의 한쪽을 끝까지 내려야 할 상황이 되었다면 한 달 또는 두 달 정도 시간을 정해 놓고 갈탄이 되는 것이다. 처음하는 일이라도 두 달 정도 전력질주를 하다보면 어느 정도 트이게 되어 있다. 그 고개만 넘으면 잠시 접어두었던 삶의 다른 부분, 즉 가족, 여가, 취미 등을 다시 삶으로 불러들일 수 있다.
갈림길은 언제든지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리를 갈등하게 만들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경력이 많아지면 더 많은 갈림길들이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고민하고 주저하고 두려워하고 후회하기 보다는, 이로 인해 나의 가지를 하나 더 뻗는 것이라고 생각하라. 어제는 동쪽에서비추던 해가 오늘은 서쪽에서 비추고 있다면, 오늘 부터는 서쪽으로 나의 가지를 하나 더 뻗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가지들이 하나씩 늘어나게 되면 어느 새 나는 둥그렇고 커다란 그늘을 가진 근사한 나무가 한 그루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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