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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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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일 11시 55분 등록

이 글은 4기 오현정 연구원(fate_maker@naver.com)의 글입니다.

 

글쎄,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모르겠습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오늘 저녁 못 마시는 술을 한 잔 했고 그 사람의 얼굴이 생각이 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솔직히 몇 년 전만 해도 제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하게 될 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전 누군가가 전해주는 불륜이야기를 들으면서 불륜을 저지르는 남녀를 욕하던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으니까요.

 

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요새 말로 하면 시각 예술가라고 하더군요. 30년 하고도 몇 년을 더 살았습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제 유일한 소명이라고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 소명은 저한테는 너무도 강렬한 것이었습니다. 집안이 그리 유복한 편이 아니었고 누구도 그림을 그리라고 저한테 권유나 강요를 한 적도 없었습니다.

 

몇 번인가 저는 제 재정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그림을 그리는 일을 그만두려 해봤습니다. 유망한 회사에 취직을 해서 돈을 벌려고도 해 봤고 좀더 현실적인 일을 시작도 해봤습니다만 그 때마다 저는 다시 그림을 그리러 돌아오곤 했습니다.

 

어렵사리 저는 제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그림을 그리려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붓을 놓았던 손이 다시 붓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꽤 걸렸고 생계가 막막했습니다. 동네 아이들을 모아 그림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지만 겨우 밥을 먹고 그림을 한 두 장 그릴 수 있는 정도의 수입이었습니다.

 

현실이 어렵긴 했지만 그림을 그릴 때만은 저는 제 세상으로 돌아온 듯 했습니다. 그 세상은 자유로웠고 행복했습니다. 한편 집 안이 부유한 동창들은 유학도 쉽게 다녀오고 전시회도 자주 열어서 쉽게 명성을 얻는 듯 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심한 질투가 일었습니다. 질투가 극에 달하는 날이면 저는자살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어떤 날은 이런 부조리한 인생의 장난이 너무 슬퍼서 신을 향해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왜 저에게 감당하지 못할 소명을 주었느냐고 욕을 해대어 보기도 했습니다. 아무도 저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 슬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는 그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 첫 개인전을 열던 날. 저는 그 개인전을 위해 제 전 재산을 거의 탕진하다시피 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쳐서 한 푼, 두 푼 모았던 돈을 모두 투자해서 전시관을 하나 빌렸고 이번이 아니면 다시 기회가 없을 거라
는 심정으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이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적어도 7~8년도 늦은 나이에 저는 겨우 첫 개인전을 열 수 있었습니다. 그 첫 날이었습니다. 훤칠한 서양인이 무술복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 제 전시관에 들어 왔습니다. 전시관을 한 바퀴 둘러보던 그는 제가 제일 심혈을 기울여 그린 그림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그는 갑자기 기쁜 표정을 지었습니다.


한참을 그 그림 앞에서 그렇게 서 있더니만 저한테 다가왔습니다. 그는 영어로 자신의 그 그림을 살 수 있느냐고 가격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림 가격을 종이에 적어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이내 웃음을 짓더니 자기 주머니에 들어있던 돈을 모두 꺼내어 주면서 일단 그것부터 받으라고 했습니다. 나머지는 현금을 찾아서 줄 것이니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마침 주위에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영어를 잘 못하는 저에게 그는 또박또박 몇 번씩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습니다. 때마침 그와 같은 무술복을 입은 한국인이 들어왔고 그의 친구가 중간에 통역을 해 준 후에야 저는 겨우 그 그림을 팔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그 날 그러는 저를 쳐다보면서 전시관 한편에서 다른 손님을 접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일랜드 사람이었습니다. 한국에 볼 일이 있어 잠시 방문을 했다가 관광 코스인 인사동을 지나게 되었고 우연히 제 전시를 보게 된 것입니다. 원래 작품은 전시회가 마친 다음에 작품을 구입한 이에게 전달이 되게 되었습니다.

 

전시회를 마친 후 저는 그에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작품의 가격에 해당되는 금액을 송금해 주면 작품을 보내 주겠다는 짤막하고 사무적인 이메일이었습니다. 그는 답장을 했고 재빨리 송금도 했습니다. 사무적인 이메일이 몇 차례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저는 잘 생긴 중년의 그의 얼굴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의 이메일에서 제 그림을 칭찬했습니다. 제 그림을 보는 순간 또 다른 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답니다. 그래서 한 동안 멈춰서 그 그림 앞에 서 있었더랍니다. 작가로서 저는 무엇보다고 제 그림을 이해해 주는 그가 너무 좋았습니다. 세상에 이제 제 그림을 이해하게 된 사람이 하나 늘었다고 생각하니 뿌듯했겠지요.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이메일을 쓰고 있다는 그는 묘한 여운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나는 멀리서 오는 꽃 향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의 이메일을 받고 약간 열에 들떠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전시회를 성황리에 마치게 되어서 인 것 같다고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것 말고 분명 저를 들뜨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잘 생긴 그의 얼굴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떠올랐고 세상이 온통 즐거워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에게 보낼 그림을 포장을 하면서 “꽃”에 관한 음악 CD 한 장을 동봉 했습니다. 저는 마치 첫 사랑에 빠진 사람 같았습니다. 이유 없이 즐거웠고 이유 없이 흥이 났습니다. 기쁨에 겨워서 쉽게 피곤하지도 않았습니다.

 

얼마 후 그에게서 제 그림이 담긴 소포를 잘 받았다는 이메일이 왔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이 저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나는 사랑에 빠졌어요. “ 그는 누구와 사랑에 빠졌는지 혹은 무엇과 사랑에 빠졌는지 확실히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 사랑에 빠진
상대가 저라고 확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사무적인 일이 모두 끝났음에도 그와 저는 계속해서 이메일을 주고 받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외국인도 피해 다닐 정도의 영어 무섬증을 앓고 있던 저는 그에게만은 예외 였습니다. 무슨 일인지 영어가 술술 나오고 제 마음을 어렵지 않게 표현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하루 몸이 달아가던 저는 더 이상 그를 멀리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를 가까이에 두고 만지고 싶었고, 안고 싶었고 그리고 갖고 싶었습니다. 제 남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제 남편은 믿음직하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아갈 것이고 아이는 절대 낳지 않을 것이니 제 자신이 결혼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을 했을 때에도 그는 그 모든 것을 받아 들이겠으니 제게 결혼을 해 달라고 했었습니다. 제 소명을 달성하는데 자신은 조력자가 되겠으며 제가 그것을 이루는 것을 옆에서 지켜 보는 것을 자신의 기쁨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었습니다. 저는 몇 번에 걸친 그의 진심 어린 청혼에 결혼을 승락 했었습니다.

 

제가 첫 번째 전시회를 열 때쯤 남편은 저한테 무척이나 지쳤었나 봅니다. 저에 대한 순수했던 사랑이 어느 정도 그 뜨거움을 잃었을 때 남편은 현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에 많은 남편의 친구들은 집을 사고, 차를 구입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남편은 오직 제 성공만을 바라고 있었으니 그것이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 즈음 남편은 몇 년 전 순수했던 자신의 선택에 화가 났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남편은 저를 많이 이해해 주었습니다. 아니 이해해 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가 많이 식어 있다는 것을 식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새로 만난 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을 참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가 저한테 새로운 희망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제 인생에 전환을 가져다 줄 것 같았습니다. 그만 생각하면 가슴이 떨렸습니다. 저는 그에게 모월 모일에 파리에 가겠다고 이메일을 했습니다. 남편에게는 기회가 좋은 세미나가 있어서 놓치고 싶지 않다고 말을 했습니다. 제 돌발적이고 충동적인 통보에 그는 약간 당황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내 우리는 파리에서 만났습니다. 딱 열흘 간, 우리는 서로에게 속한 가족을 잊어 버리기로 했습니다. 그저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자고 약속했습니다. 저는 우리 남편을, 그는 아내와 세 아이들을 몽땅 잊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첫 사랑에 빠진 아이들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약간 어색한 듯 하다가 서로 연인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했습니다. 한 침대에서 서로를 안았고 오랫 동안 연인이었던 것처럼 사랑을 속삭였습니다. 낮에는 파리의 여러 미술관에서 날마다 데이트를 하고 밤에는 재즈바를 순회했습니다. 뜨거운 열흘이었습니다.

 

열흘 후 우리는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 갔습니다. 저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 같았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진 듯 했습니다. 머리 속에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이디어로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밥 먹는 것도, 잠 자는 것도 모두 잊어 버렸습니다. 물감이 부족했고 캔버스가 동이 났습니다.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그리웠습니다. 그의 품이 그리웠습니다. 그에게로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에게 돌아가 버릴까 하고 생각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착하고 믿음직한 남편이 떠올랐습니다. 대신 붓을 잡았습니다. 그에 대한 그리움들을 모두 화폭에 뿜어 내었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그 후로 서서히 저는 화단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제 그림은 날개가 돋힌 듯 팔렸습니다. 이만한 성공은 저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제가 그토록 질투하던 동창들보다 더 알려진 작가가 되었습니다. 남편은 이제서야 자신이 선택한 결혼에 어느 정도 만족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진짜 더 이상한 일은 제가 그린 그림들 중에서도 그를 생각하는 마음을 담은 그림이 훨씬 더 잘 팔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없어서 못 팔 정도였으니까요. 사람들은 제 그림들에서 그 안에 숨겨진 감정들을 읽는 듯해 보였습니다. 그림에 담긴 제 마음을, 제 열정을 읽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제 작품의 근원은 불륜입니다. 그 불륜으로 인해 생긴 제 작품들을 사람들은 열광하면서 사들여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제가 대중 앞에 나서서 “여러분들이 좋아하시는 이 그림은 사실 제 불륜이 남긴 흔적입니다.” 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물론 저는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편한테는 물론 이구요. 그리고 전 남편과도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남편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렇게도 저에게 믿음과 사랑을 주었던 그이에게 제가 배신을 한 꼴이었으니까요.


저는 상당한 죄책감을 남편에 대해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차츰 이런 식으로 풀리다보니 남편에 대한 죄책감도 어느 순간 희석이 되더군요. 저는 남편을 배신한 불륜으로 인해 제 작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 동안 남편이 저를 뒷바라지 하면서 그토록 바랐던 화단에서의 성공을 남편에게 선물할 수 있었습니다. 제 자신은 그 불륜으로 인해 앞으로 작가 활동을 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자신감을 크게 얻었습니다. 저는 명성을 얻었고 부를 얻었고 무엇보다도 내 예술의 생명력을 얻었습니다. 아일랜드에 있는 그이는 저로 인해서 중년의 위기를 쉽게 극복했다고 했습니다. 저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이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희열을 느꼈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일과 관련된 우리 세 사람 모두 잃은 사람은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 무언가를 얻었습니다.

 

제가 무명의 작가로 가난과 고독과 싸우고 있을 때, 남편한테 면목이 없을 때, 저는 파우스트하고 라도 거래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파우스트에게 외치고 싶었습니다. 제게 남은 그 무엇이든 가져가고 작가로서의 성공적인 삶을 달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그런 생각을 너무 오래 한 걸까요? 파우스트가 제 소원을 들어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체 파우스트는 저한테 무엇을 가져간 걸까요? 파우스트는 피카소로부터 누이를 데려가고 대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주었다는데 저한테는 무엇을 가져간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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