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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7일 22시 06분 등록

* 이 글은 5기 연구원 박정현 님의 글입니다(본인이 연재를 요청하여 4주 연속으로 게재하고 있습니다).

 

 

선조의 붉은 편지

 

<1>

이젠 화로의 불도 다 타버렸지만 아직도 순신은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신만 바라보고 있다. 화롯불 위에는 다 익어 말라 버린 고기 몇 점이 놓여 있지만, 입맛을 잃은 지 오래다. 그의 눈에는 오직 밀서라고 붉은 색으로 적은 선조의 서신만이 들어올 뿐이다.

 

창 밖에는 오랜만에 바람도 잔잔히 달빛이 훤하다. 방까지 비쳐 드는 달빛에 어우러져 바닷소리, 바다 내음이 가슴을 파고 든다.  벌써 7년 째이다. 바다에 몸을 내맡기고 바다 바람에 삶을 내맡기고 살아 온 세월 말이다.

 

문 밖에 보이는 가리포 첨사 이 영남의 그림자가 묵직하다. 묵묵히 곁을 지켜온 사내. 함께 술 잔을 기울이다 서신이 도착하자 이젠 밖에서 그를 받치고 있다.  밤바다가 늘 그러하듯 그 역시 늘 그런 부하요, 늘 그런 사내였다.

 

선조는 밀서를 보내며 예도 갖추지 말고 받으라 명했다. 군신의 예를 갖추지 말고 받으라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싶어 더욱 마음이 착잡하다. 죽음을 면해 준다는 면사첩을 보내온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밀서는 과연 무슨 뜻인지

 

간 밤의 꿈에 선조가 어릴 때 모습이 되어 나타나 울며 탄식하였다. 잠에서 깨어나서도 한참을 현실로 돌아오지 못했는데, 오늘 이러한 서신을 받고 보니 명치 끝이 뻐근하다. 

 

이윽고 순신은 천 근같이 느껴지는 한 줌의 서찰을 집어 들어 서서히 밀봉을 뜯기 시작하였다

 

<2>

여해. 오늘은 내 그대를 여해라 부르리라. 서애 (유성룡의 호)가 그대를 부르듯이 나도 그대를 그렇게 부르리라.

 

그대는 이 땅에 어째서 난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느냐? 난 그것이 내가 적통이 아닌 후궁의 몸에서 난 임금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약 앞의 성군들처럼 적통의 적자 계승 임금이었다면 동인과 서인이 나를 업수이여겨 그다지도 심한 당파를 가르지 않았을 거란 말이다. 그랬다면 왜 역시 우리를 가벼이 여겨 그리 쉽게 난을 일으키지 못했을테고 말이다.

 

그대는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는가? 난 지금도 어제 일처럼 기억이 난다. 그대가 내 앞에 섰을 때 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조부가 사화에 얽혀 문관 시험에 나가지도 못하던 그대였거늘, 어째서 그대의 눈빛에는 그런 정기가 흐를 수 있었던건지. 어째서 임금의 자리에 오를 내가 그대에게 압도당해야 하는 건지. 난 그 날의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그대는 내가 왜 그대를 투옥시켰는지 아느냐? 난 조선의 그 어떤 장수들보다, 그 어떤 문관들보다 그대를 흠모한다. 바로 그거다. 나조차도 흠모하는 그대가 두려웠다.  

 

조정 대신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서 알량한 자리를 지켜보겠다고 내 앞에선 나를 추키지만, 뒤돌아서선 후궁 출신의 임금인 나를 손가락질 하는 무리들 속에 그대는 언제고 흔들림없는 충심을 내게 주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그대의 그 강직함이, 임금인 나까지도 무릎 꿇고 받들고 싶은 그대의 그 강직함에 이 나라 백성 그 누가 감히 무릎 꿇지 않을 수 있냔 말이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다. 온 백성이 그대 앞에 무릎을 꿇어도 난 그럴 수 없다. 그게 내 운명이란 말이다. 알겠느냐. 그게 내 운명이다. 내 비록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임금이긴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더 살아서 이 나라 종묘사직을 지켜야만 죽어서 개국 성군들 먼 발치에라도 엎드릴 수가 있단 말이다.  

 

그대는 군사를 쥐고 있다. 그대는 민심도 쥐고 있다.

 

안다. 나도 알고 있다. 그대가 마음만 먹으면 나를 죽이고 이 나라 종묘사직을 멈추고 태조께서 그러하셨듯이 그대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 역시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난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그대는 민심을 등에 업고 왜놈들과 전쟁을 하고 있지만, 나는 밤마다 그대와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대가 왜놈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그날부터 그대는 백성들을 앞세워 내 목을 조르고 있다. 전쟁은 그대만의 몫이 아니다.

 

온 백성이 우러르는 신하를 둔 임금의 심정을 그대가 어찌 알까.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조차 없는 임금의 타는 속을 그대가 어찌 알겠느냔 말이다. 목숨도 종묘 사직도 모두 그대에게 달려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태 타는 속 말이다.

 

겉으로는 그대 대신 원균을 지지했던 신하들조차 그대만이 이 나라를 구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이 누구인가. 이 나라 제일의 대신들이 아니더냐. 그들은 아마 이 순간에도 그대와 나 사이를 재고 있을 것이다. 그대가 과연 내게서 등을 돌릴지 어떨지,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을 거란 말이다. 만약 그대가 그런 움직임을 보인다면, 그 누구보다 먼저 내 목에 칼을 찔러 넣을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내가 둘러 싸여 있다. 임금인 내가 말이다.

 

차라리 내가 진정 미쳐 돌아가는 폭군이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아무 생각 없이 매일 술에 취해 미쳐 돌아가는 폭군 말이다. 내 눈은 밝고, 내 귀 또한 열려 있으되, 내겐 난을 평정할 힘이 없다. 생각은 떠오르나 목숨은 그대에게 의존해야 하는 무능함만을 깨닫는 생각이니, 생각하지 못함 만도 못하다.

 

여해. 묻겠노라. 그대는 진정 이 나라의 신하더냐? 그대는 진정 역사에 길이 남을 이 나라의 충신이냐?

 

나의 신하가 아니어도 좋다. 조선의 수군 대장으로서, 역사의 영웅이 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이 나라 종묘사직을 위해 그대의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진정한 충신인지를 다시 한 번 묻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대를 믿노라. 그대가 국문 때 보여주었던 그 강직함을 믿는단 말이다. 다음 생에서는 내가 그대를 위해 살리라. 그대의 이름 앞에 내 삶을 거름으로 삼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 난 죽을 수도 없는 운명이다.

 

내 운명, 이 나라의 종묘사직은 오직 그대에게 달렸음이라

 

<3>

순신은 후욱!하고 참았던 숨을 내뿜는다. 

 

임금은 왜놈들과의 전쟁은 어떨지 몰라도 정치적 지략만큼은 이 나라 성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고 있었다. 이미 난 이후의 시대를 바라보고 있는 임금이었다. 

 

역심이 없다면 죽음으로 증명하라는 임금의 밀서.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것이 임금의 운명이라면, 이 전쟁과 함께 하는 것이 이 순신의 운명일까.

 

이윽고 노량해전의 아침이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한다. 그 해를 바라보는 순신은 그것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보는 해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4>

먼 별아, 일어나거라태극 신선이 먼 별이를 불러 깨우고 있다.

 

아직 현실로 체 돌아오지 않은 먼 별이의 두 눈에 눈물 자욱이 있다. 이윽고 서서히 먼 별이가 깨어나기 시작한다.

 

정신이 드느냐?”

 

, 사부님

 

그래, 누구의 세계를 다녀온게냐?”

 

선조 임금님이었습니다

 

역시, 그랬구나태극신선은 예상했던 일이라는 표정을 짓는다.

 

하오나, 사부님. 어째서 이순신 장군님이 아닌 선조 임금님이었을까요?”

 

너는 어찌하여 눈물을 흘리느냐?” 역시 태극신선만의 가르침이다.

 

그건 선조 임금의 고뇌가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충무공께 보내는 밀서는 그 분의 피울음과도 같았습니다… ”

 

고뇌라..?”

 

. 자신보다 너무나 출중한 신하를 둔 임금으로서, 그를 포용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내몰 수 밖에 없는 임금의 고뇌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선조 임금의 세계로 다녀왔는지에 대한 답을 알고 있지 않느냐?”

 

…? 무슨 말씀이시온지…”

 

먼 별아. 영웅과 평범한 인간, 혹은 승자와 패자는 말이다. 능력에 있어선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다. 영웅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능력 한가지가 결코 아니라는 걸 넌 지금까지 충분히 깨치지 않았더냐. 그러므로 진정한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그 그늘에 가려진 사람들 혹은 영웅이 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의 고뇌와 갈등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하느니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 사부님…”

 

진정한 샤먼은 말이다. 영웅뿐만 아니라 패자의 내면까지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그 둘이 별개가 아니고 내면은 똑 같은 인간의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우선 네가 충분히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 네가 느낀 점을 타인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샤먼인 네가 할 일이다. 사람들은 피카소가 고통을 그리면, 그 그림을 보고 고통을 느꼈다. 그런거다. 네가 인간들 세계에 내려가 삶의 고뇌를 얘기하고 그 상처를 어루만지면, 사람들은 그 안에서 치유의 희망을 볼 수 있어야 진정한 샤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알겠느냐?”

 

…” 알듯도 하지만 어딘가 아직은 어렵다.

 

그렇다면 사부님, 다음엔 어느 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겁니까?”

 

그건 나도 모른다. 오직 우주만이 알고 계신 일이다. 그보단 이번 달은 말이다, 느껴라. 사람들의 삶을 충분히 느끼고, 네가 느낀 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전달할 지를 고민하는 한 달이 되도록 해 보거라. 하지만 한 가지. 다음 번에 들어갈 세계가 결코 선조 임금과 무관하지는 않다.”

네에? 다음은 백범 선생님이신데 어찌 그럴 수 있는지요?”

 

하지만 말씀을 마친 태극 신선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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