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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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그냥 사라지는 것은 없다. 때가 되어 다른 것으로 변할 뿐이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한 에너지는 다른 에너지로 전환될 뿐이며 한 트랜드는 또 다른 트랜드로 전이될 뿐이다. 동양인들은 우주는 순환한다고 믿었고, 성(盛)하여 극에 달하면 쇠퇴하며, 그 반대는 꽉찬 달처럼 완성을 향해 치달린다. 최근 수 십 년간 지구상의 기업들은 성장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켰다. 환경은 개발 논리에 밀려 파괴되었고, 인권은 성장 논리에 밀려 미취학 아동들까지 동원되었다. 일은 많고 쉴 수는 없어 삶과 일의 균형은 깨어졌다. 부정과 부패는 업무의 관행이 되었다. 기업은 그 사회에 기여한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득을 얻어갔다. 부자가 된 기업은 너무도 많았지만 착한 기업은 너무도 적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기업의 경영자는 대중적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CEO가 지니는 대중적 매력은 엄청난 연봉과 막강한 힘에서 온다. 그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는 기업의 사회적 영향력의 크기와 비례하여 성장해 왔다.
세계의 100대 경제주체들의 경제규모중 절반은 다국적 기업들이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GM의 매출액은 덴마크의 GDP를 웃돌고, 엑손모빌의 매출액은 오스트리아의 GDP를 웃돈다. 매출액 규모로 따지는 단순 비교가 아니라 기업의 급여, 복리후생, 감가상각, 세전 이익등을 합한 부가가치 기준으로 보아도 다국적 기업은 100대 경제 주체중 1/3 수준에 육박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의 영향력이 국가의 통제 범위를 넘어 막강해 지자 투자자를 보호하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기 위한 움직임들이 그동안 구체화 되었다. 투자기관이나 정부, 의회가 기업이 따라야할 새로운 기준과 법률을 제정해 내고 있다. 한 예로 엔론과 월드컴의 회계부정 사건이후 미국의 기업 역사상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게 된 사베인스-옥슬리 법 Sarbanes-Oxley Act 은 기업 이사회의 구성, 재무보고 방식등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신설하게 되었던 대표적인 사례였다.
국지적 노력을 넘어 보다 근본적인 추세로 세계적으로 앞선 기업들은 ‘지속가능경영’(CSM; Corporate Sustainability Management) 을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환경경영, 윤리경영, 기업시민주의등 다양한 용어로 불려지기도 했던 개념들이 최근 들어 기업의 책임있는 경영활동을 뜻하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라는 개념으로 정착된 것이다. CSM은 이제 기업이 존재하는 이유가 이익의 창출이라는 전통적인 관점을 넘어서게 되었다는 인식에서 시작한다. 기업은 노동문제, 인권, 빈곤, 환경, 반부패, 각종 차별 등 인류의 공통적 관심사항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환경적 건전성, 사회적 책임성, 경제적 수익성을 통합하여 종합적으로 균형잡아 보려는 노력이 중요해 지게 되었다. 결국 이런 균형을 체계적으로 조율할 수 있을 때 기업은 장기적으로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다고 가정한 것이다.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인 로열 더치 쉘은 1990년 대 그린피스에 의해 환경 파괴의 주범이며 부도덕한 기업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1995년 미국의 다국적 기업 모니터링 단체에 의해 세계 10대 악덕기업 중 1위에 꼽히게 되었다. 쉘은 기업 명성에 타격을 입었고, 매출액도 심각하게 떨어지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 후 쉘은 오랜 동안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명성을 얻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해왔다. 먼저 NGO 들과 기업현황을 솔직하게 공유하고 함께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지역경제의 할성화를 위해 현지인들은 고용하여 지역고용율 95% 수준을 유지하였다. 또한 쉘에서 지역단체나 정부에 지불한 세금이나 로열티를 투명하게 공개하였다. 다국적 기업을 위한 OECD 가이드라인을 준수하고, 개발 도상국의 심각한 부패에 따른 문제에 휘말리지 않도록 자체적인 반부패 정책을 엄수했다. 불명예를 안은 지 13년이 지난 2008년, 쉘은 국제 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로부터 '동종업계에서 가장 투명한 기업' 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오랜 노력 끝에 얻은 긍정적 평가였다. 신뢰를 만들어 내는 데는 오래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그것이 무너지는데는 불과 몇 달이면 족하다.
세계최대 규모의 모바일 사업체인 미국의 보다폰은 보다 적극적인 선행노력을 실행한 기업이다. 쉘은 실추된 이미지를 되살리는 노력에 지나지 못했지만 보다폰은 최근 몇 년간 사회적 책임과 투명 경영 그리고 반부패를 중점으로 한 경영전략을 경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다. 그들은 지속가능경영을 법을 준수하는 수준이 아니라 훨씬 더 적극적인 이미지 전략으로 활용했다. 돈을 써야할 데 아끼지 않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업평판이 하락하여 실추된 이미지를 높이고 법적인 비용과 소비자들의 고발과 불매운동의 위험을 감안하면 훨씬 현명한 자세라 할 수 있다. 지속가능경영을 위한 보다폰의 주요 정책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새로운 정책을 도입할 때 윤리적 규범을 정해 이해 당사자들 사이에 확실한 기준을 설정해 둔다는 것이다. 둘째는 진출한 지역의 공공기관과 NGO들의 협력을 얻어 지역 사회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상생정책을 수립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정기적으로 기업활동의 전 부분을 모니터링하여 비윤리적이고 부패한 사례가 일어나지 않도록 관리한다는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법적인 규제나 제약의 차원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기업의 본연의 책임이며 경영활동의 일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정책적 무게를 실어주고 제도적 장치를 갖추고 투명성을 높이는 것도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할 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생각과 가치의 전환이 강력하게 받쳐 주어야 한다. 이 분야에서 역사상 가장 훌륭한 전설적인 모범을 보여준 기업은 ‘존슨앤존슨’이다. 이 회사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의 전설로서 존경받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최고의 실적을 달성하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으로 평가 받고 있다. 1885년 외과용 붕대 개발로 출발한 존슨앤존슨은 오늘날 세계 최대 규모의 헬스케어 관련 제품 제조업체다. 1982년 이 회사는 운명이 갈릴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누군가 이 회사의 제품인 타이레놀의 포장 속으로 독극물을 주입해 이 제품을 사용한 소비자 여러 명이 사망하게 된 것이다. 존슨앤 존슨은 제품에 하자가 없음을 확신하면서도 엄청난 금액의 캡슐약을 전량 수거하여 폐기할 것을 즉각 결정하였다. 그리고 안전성을 높이기 위하여 외부에서 독극물 투입이 불가능한 알약 포장 형태로 대체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고객에 대한 책임을 무엇보다도 우선한다는 그들의 사명과 가치관을 실천한 결단이었다. 이 사례는 존슨앤존슨이 ‘비용을 따지지 않고 소비자에 대한 우선적 책임을 약속한 자신의 신조에 따라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실천할 수 있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게 된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존슨앤존슨은 자신들이 판매한 약품의 부작용을 조사하기 위해서 엄격한 조사활동을 벌렸다. 조사활동에 많은 비용을 들였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학계에 알려진 것보다 해당 약품의 위험성이 더 높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존슨앤존슨은 자신들의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사안임에도 이 결과를 미국식품의약국과 언론에 공지했다. 타이레놀 사건과 마찬가지로 기업의 단기적 이익보다는 소비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앞세운 ‘우리의 신조’(Our Credo)’에 따라 의사결정을 한 것이다.
존슨앤존슨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으로 존경받을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높은 성과를 달성하는 데는 윤리관과 신념이 함축된 ‘우리의 신조’가 전임직원에 체화되어 실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저 벽에 걸려 있는 표어가 아니다. ‘우리의 신조’는 기업경영의 핵심가치로서 고객, 직원, 사회, 주주의 순서로 기업의 책임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포괄적 이해당사자인 사회나 주주보다는 고객이나 종업원처럼 직접적인 이해관계자에 대한 책임이 우선적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고객과 종업원들의 만족이 결국 주주이익으로 되돌아오는 선순환적 사이클을 신뢰한 가치체계라 말할 수 있다.
존슨앤존슨에 있어 사회책임경영이란 일상적 경영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사회적 책임경영이라는 가치가 경영 자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그들은 사업실천지침을 마련할 때 고객과 소비자에게 우선적 초점을 맞춘다. 매년 전직원들은 ‘우리의 신조’를 따라 행동할 것을 서약해야한다. 전 세계 독립법인 경영자들은 매년 한 자리에 모여 ‘우리의 신조’에 표현된 이념이 변화된 경영환경에 맞추어 어떻게 구체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지를 토론하고 서로 공유한다. 사회적 책임경영과 관련하여 하급자에게 문제가 발생해도 상급자에게 책임을 묻게 되어 있다. 존슨앤존슨은 재무성과가 좋아도 고객을 속이거나 직원들의 불신을 받으면 실패한 경영자로 간주하는 기업문화를 키워 왔다. ‘우리의 신조에 입각한 리더십’이 최우선적으로 강조되어 온 것이다. 이 사례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단지 세계적 기준에 부합하는 보고서 작성의 문제가 아니라 직원들의 정신과 태도의 문제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존슨앤존슨은 직원들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훌륭한 기업시민 정신을 일상의 실천적 과제로 인식하여 준수하기를 요구한다.
사회책임경영은 이제 글로벌 기업들을 필두로 모든 기업의 공통적 관심사며 글로벌 게임의 원칙이 되어 가고 있다. 다양한 사회적 비판을 의식해 사회공헌을 강화하려는 뜻도 있겠지만 사회적 책임이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인식전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동안 기업들의 사회공헌은 기업 본연의 경영활동과는 별개였다. 최근 한국 기업의 사회공헌에서 가장 눈에 띄는 흐름은 그것을 본질적 경영 영역으로 담아내려는 노력이다. 즉 사회책임경영(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의 본질은 경영 외적인 일시적 시혜나 자선적 기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업을 통해 고객의 신뢰를 얻는 경영활동이라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활동은 기업 가치체계의 바탕을 이루며 의사결정의 모든 과정에 유기적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책임경영은 이제 글로벌 스텐다드로서 기업 경쟁력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런 이야기들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저 들으면 좋은 이야기고 회사의 정책의 이야기이니 회사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잘하면 되는 것 아닐까 ? 아니다. 이것은 착함에 대한 이야기고 공존에 대한 이야기고, 물려줄 유산에 대한 이야기다. 당연히 한 개인으로서 내가 지속적으로 참여해야할 운동이며, 자부심이다. 다음 두 가지의 개인적 지속가능전략은 어떨까?
첫째는 나는 '가난하여 다른 사람에게 나눠 줄 것이 없다'는 생각을 버리자. 우리는 누구나 나누어 줄 것이 있다. 작은 돈을 가지고 있다면 돈을 나누어 주자. 돈이 없다면 내가 잘할 수 있는 재능을 기부하자. 글을 조금 쓸 줄 안다면 글 쓰는 법을 가르쳐 주고, 빵을 잘만들면 빵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고, 노래를 잘하면 노래를 불러 주자. 돈도 재능도 없다면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주자.
둘째는 되받을 것을 생각하지 말자. 나눔이 즐거우려면 되받을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의도되거나 계산된 나눔은 진정성이 결핍되어 있어 사람들은 경계하게 만든다. 기업이 의도된 계산을 깔고 기부를 하게 되면 그것은 나눔이 아니라 계산된 사업 전략일 뿐이다. 나눔이 상업화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의 사회적 기여는 '이 사회에서 번 것을 이 사회의 발전을 위해 되돌릴 성숙한 책임감'에서 나올 때 존경받는 기업이 될 것이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어디서나 고통받고, 힘든 사람을 위한 선한 이웃이 되는 것만으로 만족하면 나눔의 기쁨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나눔의 경영학은 간단하다. 나누면 커진다는 것이다. 좋은 감정을 나누면 두 사람의 공감으로 두 배로 커진다. 그라민 은행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지만 실제로 그것은 자립을 나누어 준 셈이다. 자립을 통해 그 작은 돈은 몇 배, 몇십 배의 발전으로 되돌아온다. 마음을 나누면 나눈 만큼 공유되고, 공감한 사람만큼 복제되어 물결을 이룬다. 마음이 앞장서서 물질의 나눔을 이끌 때, 진정한 나눔이 시작된다.
(녹색 경영 - 나눔의 경영학, 신한을 위한 기고문, 2012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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