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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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키가 어제 신년식에서 내 책 '그리스인 이야기'에 사인을 해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부님, 이 책 어려워요' 라고 말했다. 잠시 생각이 얽힌다. 1년 동안 제법 많은 어려운 책들을 읽어낸 제자가 어째서 가볍고 즐거운 작은 언덕 앞에서 힘들어할까 ? 사인을 하고 나서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가 왜 이 책을 어렵게 느끼고 있는지 짐작하게 되었다.
그리스인 이야기는 별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무수한 별들 중의 하나였으며, 그 별들 중 하나가 지금 우리가 되어 잠시 이 지구별에 머물고 있다 다시 별이 되어 하늘에 달리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이 책은 마음이 한가하지 못하면 읽어 내기 어렵다. 무릇 마음이 한가한 사람들이 많지는 않다. 그러나 마음을 잘 들여다 보면 한가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동일한 삶이라도 그것을 들여다보는 방식과 시각에 따라 호숫가 별빛 처럼 기쁨으로 가득해 질 때가 있다. 하늘과 별을 쳐다볼 수 없으면 삶은 늘 풀어야할 지상의 문제로 무겁게 눌려있고, 풀리지 않는 문제로 가슴 답답할 수 밖에 없다. 제키가 이 책을 어렵게 느꼈다는 뜻은 일상의 문제가 마음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 속에서 사는 삶은 고통 속에서 사는 것과 같다. 시달리다 보면 어느 덧 하루가 지나듯 삶도 덧없이 흐르고 만다. 이 책을 읽을 때는 별이 지구를 바라보듯이 읽어야 한다. 내 안의 신이 나를 보듯, 내가 내 속의 불꽃을 찾아내듯 읽어야 한다.
이 책은 내가 아프기 전에 쓴 책이다. 내게 많은 기쁨을 주었다. 그리고 심한 근육통에 시달릴 때 출간되었다. 이 책의 제목도 '그리스인 이야기'가 될 줄은 몰랐다. 재미있는 것은 문득 이 책이 그리스인 이야기 시리즈 중 첫 번 째 책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는 점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몇 가지 장점도 있지만 사고가 활달하지 못하고 예측되는 지점에서 장벽을 넘지 못하고 늘 막혀있는 작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마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서 많은 지적 성장과 기쁨을 얻었을 것이다. 나도 그리스인 이야기를 한번 제대로 길게 강처럼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그리스인 이야기일까 ? 돌이켜 보면, 나는 학창 시절에 내 은사의 연구실 조교로 있으면서 수업이 끝나고 저물어 가는 오후에 연구실을 가득 채운 그리스사의 책들을 뒤적였다. 그때 내 관심사는 혁명사였다. 그리스 역사 따위는 공부하다 지치면 화보를 넘기듯 뒤적이는 심심풀이 같은 것이었다. 어떤 책을 보았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 신화들을 눈여겨 보았고, 도판과 화보들을 즐겼다. 아름다운 여신들과 고귀한 남신들의 벗은 몸들을 젊은 내 삶과 연결시키지 못한 채 감상했었다. 그리고 40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리고 나는 문득 인류의 젖줄 중 하나였고, 무수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그리스인들의 생각과 문화에서 젊은 날 오후 해가 뉘엿거릴 때의 이유없는 고뇌와 한가와 춤추는 듯한 상상을 즐기게 되었다.
마음의 밭에는 언젠가 뿌려진 씨앗이 있게 마련이다. 하나의 씨가 뿌려져 40년이 지나 발아 하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 그때 그 일을 하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라고 세상이 물었던 그 일이 결국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 일을 하면 술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빵 한 덩어리와 포도주 한 병, 시집 한 권, 그리고 나를 위해 노래 불러 주는 그녀가 있다면 그 인생은 아름다우리. 이 보다 더 아름다운 인생도 없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즐겨 읽어 기쁨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별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그리고 내 제자 제키도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만큼 삶 속에서 한가함과 동시에 치열함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언젠가 그 때의 일년을 보낼 때의 마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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