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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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어둠은 별을 더 빛나게 한다. 천재들의 시대이며 가장 화려한 예술의 시대인 르네상스도 중세의 어둠이 깊어 더욱 빛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가장 화려한 꽃이었던 피렌체는 500년도 더 지난 르네상스의 유산으로 아직도 먹고 살고 있다. 그곳에 가면 단테와 조또와 브루넬리스키와 캄비오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체온과 숨결이 경이로운 감탄을 자아내게 하고, 천재들을 모아 최고의 걸작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지원했던 메디치가 인물들의 돈 쓰는 법을 부러워하게 된다. 앞으로도 그 도시는 그렇게 먹고 살고 빛날 것이다. 문화는 오래될수록 경이로운 것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르네상스를 단순한 고대로의 복고라고 부르지 않는다. 고대의 부활이며,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시대로 돌아 온 재생의 시대로 이해한다.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은 1000년 중세의 길고 긴 암흑을 넘어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서구는 새로운 문명으로 진화해 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반복의 역사가 아니라 고대를 창조적으로 되살리는 과정이었다. 바로 서양문화의 뿌리인 그리스와 로마 문명이 리메이크되고 리바이벌된 것이 바로 르네상스인 것이다.
리메이크는 원형이 보존된 상태에서 창의적 변형이 가해진 것이고, 리바이벌은 같은 것이 또 다시 전성을 맞는 것이다. 문화만 그런 것이 아니다. 비즈니스 역시 이 역사적 변천과 트렌드의 추이에 따라 흘러가게 마련이다. 과거는 죽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요구에 맞게 변형되고 재창조 되는 것이다. 마치 하나의 열매가 썩어 다시 수많은 열매로 되살아나듯이 말이다.
얼마 전까지 우리는 계절에 관계없는 과일을 즐겼지만, 지금은 제철 과일을 찾는다. 수입산들이 비싼 먹거리였으나 이제는 신토불이(身土不二)의 철학에 걸맞는 향토음식을 찾고, 재래식 전통방법으로 재배된 친환경 소채와 먹거리들이 훨씬 비싼가격에 거래된다. 자연주의와 친환경은 비단 먹거리 뿐 아니라 생활의 양식 전반에 걸친 변화와 추세를 되불러 오게 되었다. 패스트 푸드도 하나의 트랜드지만 슬로 푸드 역시 만만찮은 역(逆)트렌드인 것이다. 요 가와 명상은 바쁜 시대의 휴식이 되었고, 영혼의 휴양은 웰빙과 템플 스테이로 이어진다. 도시로 밀려들던 젊은이들은 중년의 나이에 길을 잃고 귀농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이제 어쩌면 노인 밖에는 일할 사람이 없는 농사일이 화훼와 특용작물로 차별화 된 새로운 젊은 벤처 비즈니스로 변할지도 모른다. 고령화 트렌드와 맞물려 시골은 의료서비스와 문화센터를 갖춘 퇴직한 도시인들의 정신적 고향으로 재배치 되어가고 있다.
인간은 새로운 미래로만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불편이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 내고, 상상력이 과거를 개조하게 만든다. 인간은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동물이지만 자각하고 다시 살아 보고 싶어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에 과거의 불완전함을 제거하는 개선과 진보가 일어나는 것이다. 혁신이라는 돌연변이가 종의 운명을 바꾸기도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는 진화가 진보의 또 다른 힘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리메이크와 리바이벌은 급격히 일어나는 혁신의 충격과 부적응으로부터 우리를 위로하는 따뜻한 닭고기 스프같은 부작용없는 개선인 것이다. 완벽한 혁신 보다 원형이 보존되는 리메이크나 리바이벌이 효과를 볼 수 있는 조건은 다음과 같다. 이때는 이 방법으로 부드러운 혁명을 만들어 보자.
첫째, 새로운 트렌드에 주목하라. 예를 들어 소득이 늘고 삶의 질이 높아지면 문화에 대한 수요가 커지게 마련이다. 취미 생활에 대한 그리움은 문화와 예술에 대한 트렌드를 만들어 낸다. 서커스는 사양산업이다. 적어도 태양의 서커스가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들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어른들의 문화 현실로 리메이크했다. 서커스에 스토리를 넣고, 스토리에 맞는 음악을 깔고, 최고의 기예를 가진 사람들을 배역으로 썼다. 서커스는 연극이 되었으나, 연극이 줄 수 없는 서커스만의 박진감을 유감없이 살려냈다. 그리고 최고의 엔터테인먼트로 되살아났다.
둘째, 불편에 주목하라. 페인트 칠을 해 본적이 있는가 ? 아파트에 사는 동안 그럴 리는 별로 없을 지 모르지만 슬슬 그리운 흙냄새나는 단독주택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페인트칠 역시 즐거운 소일꺼리로 생각한다. DIY(Do It Yourself) 트렌드에도 어울린다. 페인트라는 것이 통 속에 들어 있을 때와 직접 칠해 보았을 때의 느낌이 사뭇 다르기 때문에 몇 통 사가지고 가 칠해 보았는데 마음에 그리던 색이 아니면 난감하기 짝이 없다. 조금씩 테스트 할 수 있도록 샘플 킷트를 만들어 주면 좋지 않을까 ? 벤자민 무어는 2온스 짜리 샘풀을 만들어 가로세로 70 센티미터 정도 칠해 볼 수 있는 분량을 작은 옹기에 담아 팔았다. 또 철사 손잡이가 달린 페인트 깡통이라는 것이 영 세련되지 못한 것으로 따르려면 통 표면에 줄줄 흘러 내려 지저분하고, 조심해도 기어이 손에 묻고 마는데다 쓴 다음 뚜껑도 닫기 어렵다. 더치 보이는 프라스틱 용기로 페인트 통을 다시 디자인해서 주둥이를 안쪽에 달아 쉽게 따라 쓸 수 있게 하고 밖에 뭉뚝한 손잡이도 달아 두었다. 쓴 다음 쉽게 열고 닫는 마개도 만들어 두었다. 이게 어려운 일인가 ? 그러나 그리 쉬운 일도 1810년 페인트 통이 고안된 이래 이것을 바꾸는데 200년이나 걸렸다.
셋째, 본질을 버리지 마라. 예를들어 자명종 시계에 대해 생각해 보자. 호텔은 자는 곳이다. 특히 비즈니스 호텔은 편한 잠자리와 아침에 일하러 가기 위해서 제 때에 깨는 것이 중요하다. 호텔방에 가면 각종 아이디어를 담아 복잡한 기능의 디지털 시계가 있게 마련이다. 중소업체가 만들다 보니 투숙자들은 난생 처음 보는 시계와 맞닥드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실 자명종 기능만 되면 좋은데, 일어날 시간을 맞추어 알람이 울리게 하는 일이 만만찮다. 몇 분 주물럭거리다 포기하고 모닝콜을 부탁하게 된다. 햄튼인 호텔은 자명종 기능이 잘되는 간단한 모델을 원했으나 모델을 구하기 어려워 쓸데없는 기능을 다 빼고, 정확하게 기상 시간을 맞추고 작동하는 가장 단순한 시계를 직접 디자인하기에 이르렀다. 시계의 가장 기본적인 본질인 정확한 시간과 알람 기능외 다른 기능들을 제거하여 원형에 충실한 복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넷째, 물건을 팔지 말고 체험과 이야기를 팔아라. 만들어진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면 이야기거리가 되지 않지만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먹으면 '이거 재미있겠는데'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콜드 스톤은 고객이 수십 가지의 아이스크림과 수십 가지의 토핑을 고를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가볍고 재미있는 분위기 속에서 아이스크림 주걱으로 취향에 맞게 믹스해 준다. 그들은 '화강암돌은 당신의 파레트이고, 당신은 화가가 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가벼운 웃음 체험을 할 수 있게 해준다. 느린 시대의 맞춤 주문을 빠른 시대에 맞게 리메이크해 놓은 것이다.
인간은 떠나온 곳이 그리우면 그때의 삶의 방식으로 되돌아가려한다. 그러면 리바이벌이 가능하다. 그때를 그리워하나 지금의 감각을 섞고 싶다면 리메이크가 한번 해 볼 만한 변화 방향이 된다. 추억을 버리지 않는 변조, 미세 조정을 통한 딱 맞춤, 마음이 끌리는 곳으로 가보는 추억 탐험, 이 모든 것이 삶의 풍요에 기여한다면, 이때가 바로 우리가 과거를 버리지 않고 진화할 수 있는 적기인 것이다.
( KTcs 를 위한 원고 -2011년 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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