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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일 22시 55분 등록

  아침 첫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위대한 것으로 피어났다네. 어제만 해도 그저 봉오리에 지나지 않았는데, 밤새 달빛과 별빛 속에서 조차 조금씩 자라더니 해가 떠오르자 그 나무는 꽃을 피웠다네. 봄이 시작되었네. 봄은 꽃으로 시작하네. 시작하자마자 끝나는 것이 바로 봄이네. 봄의 끝자락 보다 더 덧없는 것은 없다네. 그러나 봄의 아름다운은 바로 그 단명한 아쉬움에 있네. 인간의 삶은 슬프다네, 그 단명함 때문에. 청춘인가 했더니 벌써 나의 귀밑머리는 속절없이 희어졌네. 하루가 저무는 속도가 화살 같고, 일 년이 촌음 같아 결국 오늘이 마지막인듯 살아야만 가장 잘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네. 오늘 죽을 것 처럼 살아보자 하니 사람을 사랑하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이 없어 보이네. 사랑하라, 사랑할 수 있을 때 까지. 이 말이 얼마나 좋은가 ! 지는 꽃이 추하다는 것은 그 꽃이 아름다웠기 때문일 것이니, 아름다울 때 마음껏 사랑하는 것이 사는 법인가 하네.

자네의 편지를 받았네. 자네는 그 편지에 이렇게 썼더군.

선생님,

예전에 선생님께 결혼이 망설여진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새로운 가족을 제 생활의 일부로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고, 다시 잘 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상처를 주고받지 않고 더 재미있게 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이유에서 였습니다.

소풍이 끝나고 제가 선생님 꽃머리띠 하고 계신 사진을 올렸는데 선생님께서 덧붙인 글로 해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사진 참 좋다. 내가 그때 행복했었구나. 양수 딸 소미가 토끼풀로 만들어 준 꽃띠가 죽이는구나. 그놈 부리부리한 눈도 생각나는구나. 꼴대 앞에서 공에 머리를 가져다 대기 위해 그림같이 몸을 날리던 그 순간, 떨어져 잠시 못 일어 나더니 그때 다쳤나보구나. 아직 젊으니 뼈 진이 잘 나와 잘 붙어 금가기 전보다 단단해 질 것이다.

모든 상처는 인생의 약이 되나니,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꽃이 온 들판에 가득할 때, 커다란 모자를 쓰고, 반바지를 입고, 그 환한 들판을 쏘다니고 돌아다닐 때 조차, 다리엔 온통 억새가 만들어낸 크고 작은 상처로 따갑다. 가장 아름답고 즐거운 때 조차, 그 순간을 지나는 상흔과 자취가 남는 것이니, 아픔을 두려워 하지 마라. 그것이 살아 있음이니. (사진 속의 내가 웃고 있다.) 무엇이 저리 좋았을까 ? "

그때 축구하다가 다쳤다는 말을 해서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을 수도 있지만, 전 그게 다친 상처 때문이 아니라 제가 드린 결혼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를 선택한 제 반려자는 선생님의 이 말씀을 듣지 않았는데도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저를 선택했습니다. 그 용기에 저는 부끄러워졌고, 2년 반의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계속 저를 잡아준 그 친구 때문에 예전의 상처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진정 살아있는 삶을 같이 보내고 싶다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편지는 지금까지 이 봄에 들은 가장 유쾌하고 기분 좋은 소식들 중 하나였다네. 마치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 창문을 열 때, 창가에 문득 활짝 핀 꽃 한송이를 발견한 듯 했다네. 아무 것도 아닌 것 조차 그렇게 예쁠 수 있으니 그것은 신의 손길이 분명할 것이네. 축하하네. 그대의 삶이 예쁘고 고우리라는 것을 믿고 있다네.

5월에 결혼하는 그대들을 축하하며, 먼저 결혼하여 살아가는 선배의 한 마디가 없을 수 없으니 즐겁게 들어주게.

인간이 무엇인지는 참 말하기 어렵다네. 그러나 단순화 시켜 말해보겠네. 인간은 결국 두 가지 종류로 대별된다고 생각하네. 한 종류의 인간은 실제적이고 본능적인 동물적 인간이라네. 이 부류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가 없이 자명할 것이네. 그리고 또 한 부류는 '신성한 잉여로서의 아름다움'의 유혹에 민감한 인간적인 인간이라네. 인간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른 동물들에게는 이런 정신적 관심과 욕구가 없고 오직 인간에게만 있기 때문이네. '신성한 잉여의 아름다움' devinely superfluous beauty 은 미국 캘리포니아 시인 로빈슨 제퍼스가 쓴 표현이라네. 이 말은 아주 멋지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내 식으로 설명해보겠네. 나는 비가 며칠간 억수로 퍼 내린 다음 산에 가는 것을 즐긴다네. 평소에는 작은 계류로 흐르지만 폭우가 지난 다음에는 계곡마다 물이 넘치고, 큰 바위 듬섬듬성 서있는 웅덩이 속에는 시퍼런 물이 고여 하루 종일 산행에서 흘린 땀을 씻어 내기 십상이라네. 그 신비하고 차고 두려운 푸른 물들을 장마 후 며칠 동안 즐길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비 온 후 산행을 즐기게 된다네. 자연은 실용적이지 않아. 자연은 넘쳐흐른다네. 그때 장관을 이루게 되지. 역설적이게도 필요를 넘어서는 잉여, 그것이 바로 문화라고 생각하네. 자연과 문화는 반대되는 듯하지만 인간의 정신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태초의 스승은 바로 자연이였다네. 인간은 실제 필요에 충실한 동물적 인간성과 잉여의 신성한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아는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인간성을 한 몸 안에 모두 가지고 있다네. 한쪽 성향이 지나치게 편중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이 둘은 한 몸 속의 두 가지 속성이라네. 결혼은 이 두 가지 속성이 생활의 공간에서 적나라하게 부딪치고 조화하는 삶의 현장이라고 생각하네. 그러니 나는 두 가지를 당부하고 싶네.

하나는 싸움을 잘하라는 것이네. 부딪치지 않고는 조화할 수 없다네. 두 물결이 만나면 파도가 만들어지고, 두 손바닥이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네. 바로 이것이 두 존재가 함께 존재하는 방식이라네. 하나가 늘 피하고 양보하고 눌러두면, 다른 사람에게는 편할 지 모르지만, 참는 사람에게는 질곡과 억압이지 않겠는가 ? 그것은 진정한 관계가 아니라네. 결혼이 아니라네. 그러니 하나의 사건을 놓고 견해가 다르고 느낌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그 차이를 받아들이고 조화해 가기 위해서는 창조적 불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네. 나는 이 불협화음을 튜닝이라고 부른다네.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의 악기가 되는 것이네. 악기는 한번 튜닝된다고 평생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연주가 있을 때 마다 늘 다시 튜닝하여 쓰는 것이네. 크고 작은 사건들이 생길 때 마다, 마치 연주자처럼 튜닝을 하듯,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조율하도록 하시게. 그렇게 해서 점점 서로의 악기가 되어가는 것이 나는 관계라고 생각하네. 많이 싸우시게. 그러나 악기를 거칠게 다루어서는 안되네. 그것이 튜닝이라는 것을 잊지말게. 결혼은 '관계라는 제단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임을 늘 기억해 주기 바라네.

또 하나는 결혼을 통해 서로 성장해야한다는 것이네. 종종 결혼이 자유의 억압과 축소로 이해되는 경우가 있다네. 하고 싶은 것을 참아야 하고, 책임과 의무로 양 어깨를 누르는 참담함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많다네. 그래서 시니컬한 사람들은 결혼한 신혼부부에게 '무덤에 온 것을 환영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네. 사랑은 상대를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네. 사랑은 상대방을 꽃피게 하는 것이라네. 결혼이 곧 사랑은 아니지만 사랑이 없이는 절대 이루어 질 수없는 것이 결혼이라네.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함께 해내는 것이라네. 상대방이 그 사람의 길을 가도록 도와주는 가장 훌륭한 스폰서가 되어 주는 것이라네. 튜닝의 과정을 거친 후 비로소 그 악기는 연주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훌륭함은 그때 만들어 진다네. 연주되지 않는 악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그러니 서로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네.

자신이 만일 하나의 악기라면 어떤 악기이고 싶은지 상상해 보게. 어떤 음색 어떤 방식으로 연주되는 악기인지 생각해 보게. 그리고 상대가 어떤 악기인지 추측해 보게. 그리고 어떻게 어떤 악보에 따라 서로 연주할 때, 최고의 연주가 될 수 있는 지 서로 잘 튜닝하고 연습하고 끝없이 연주하게. 그대들 두 사람의 삶을 지켜보는 우리들은 음악회에 온 청중이네. 우리를 아름다운 선율로 죽여주게. 그리하여 '브라보'라고 외치게 해주게.

(월간중앙 기고문, 4월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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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10.05.03 15:11:44 *.70.138.17
결혼식 주례사로 쓰면
가장 아름다운 세기의 주례사가 될 것 같습니다, 사부님.
이 글 읽으니 괜히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아이 넷 낳고 결혼생활하면서
인생은 피할 수 없는 고해다,  했었는데
이제 겨우 일상이 주는 아름다움에 감탄할 여유가 생겼습니다.
아직 노력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도 참 감사하구요.
사부님은 정말 시인이 되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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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
2010.05.04 07:37:03 *.150.248.52
thank you for inviting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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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5 14:30:18 *.212.217.154

결혼, 인연, 남자와 여자(혹은 동성간의) 

이런 타인과의 연결은 쉬운일이 아니겠지요.

몇십년을 함께산 가족끼리도 서로다른 취향과 삶의 방법으로 티격태격 살아가는데,

몇십년간 다른가치관으로 살아온 두사람이 만난다니!

삶을 함께할 그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정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함께 답을 고민해 보는 관계가 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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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8 10:05:42 *.32.9.56

결혼이란, 세상을 살면서 언젠가는 통과해야 할 과정이자 

삶은 커다란 기쁨, 또 다른 삶의 시작이겠지요.

결혼하게 될 때를 준비해 명심해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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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1 11:31:37 *.214.238.146
선생님... 
오랫만에 선생님 글을 읽으러 왔다가 또 한번 이 글을 읽게 됩니다. 
선생님께서 해주신 두가지 말씀, 잘 지키며 살고 있어요. 
결혼식때 모두 앞에서 이야기한 풍광들도 어느정도 이루어가고 있구요.
다 보고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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