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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화병과 미국인의 자아도취, 삼성월드, 5월
글로벌리제이션은 우리에게 세계로 부터의 정보와 지식을 수신할 수 있는 열린 안테너를 아주 많이 그리고 아주 높이 설치할 것을 요구한다. 폐쇄는 곧 갇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로벌리제이션의 뒷면, 즉 동전의 다른 쪽에는 로칼리제이션이라는 또 다른 숙제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우리의 내부를 탐색할 또 다른 센서를 아주 많이 그리고 아주 깊이 설치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세계화의 밑천으로 쓸 수 있는 것은 결국 한국적인 토속성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추격과 모방으로는 리더십을 쥘 수 없다. 한국적 특수성의 세계적 보편화라는 과제가 바로 글로벌리제이션과 로칼리제이션이라는 모순을 화해시키며 번영할 수 있는 바람직한 접근법이라면 한국인의 특수성 그것은 무엇일까 ?
시인 고은은 ‘한국인은 한의 자궁에서 태어나 한의 젖을 먹고 자라고 한을 견디며 살아가고, 한을 남기고 죽는다“ 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고난에 찬 삶을 보냈다.
한국인들은 대외적으로는 열강들의 틈에 끼여 살았고, 대내적으로는 옛날에는 양반들에 의해서 그리고 최근에는 군부 독재에 의해 억압받아 왔다. ’억압된 삶에서 비롯된 분노‘라는 의미의 한을 품고 살아 왔다. 한이 민족적 심리장애라면 화병은 한국인 특유의 개인적 심리장애라고 말할 수 있다. 원인은 같다. 한과 화병은 분노의 억압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만성적인 분노와 공포 그리고 가슴이 답답한 느낌을 받는다. 한은 개인들에게 흔한 화병들이 민족적 차원에서 쌓이고 곰삭아 ’끈적거리는 줄‘ 처럼 이어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어느 사회나 개인이 사회로부터 억압을 받을 수 있고, 좌절할 수 있고, 분노를 느낄 수 있고, 억압을 참는데서 나오는 스트레스에 의해 심리적 장애를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병을 한국인 특유의 질병으로 인식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메릴랜드 대학의 정치학교수며 ‘글로벌 시대의 한국인의 가치들’ (Korean Values in the Age of Globalization)이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한 프레드 앨퍼드(C.Fred Alford)는 연구 과정에서 생긴 일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나는 화병 주제로 한국인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그리고 45명의 한국인들과 이야기 했다. 대부분 화병을 일종의 분노라고 말했는데, 젊은이들 보다는 노인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대체로 화병을 부정했다. ”우리는 분노를 안에 쌓아두지 않아요. 밖으로 표출해 버리죠. 화병은 우리 어머니들 병이예요’ 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정신과 의사는 짤막하게 말했다. “20년만 더 살아 봐요. 그러면 그 젊은이도 알게 될테니 ”
이 대화는 화병도 마치 정신적 유산처럼 우리의 후세들에게 옮겨지고 계승되는 듯이 느껴졌다. 도대체 분노의 억압이 한국인 특유의 심리장애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 예를 들어 미국인들에게는 화병과 같은 억압된 분노가 없을까 ?
신기한 것은 미국인들은 화병에 걸리는 대신 다른 길을 걷는다는 점이다. 미국인들은 사회구성원을 짓누르기 보다는 낙오시키는 것에 더 익숙하다. 따라서 상사에게 위축된 미국남자들은 가정에서도 아내에게 버림을 받게 되고 결국 삶의 의미를 잃은 채 사회의 구석으로 밀려나게 된다. 결국 그들은 쾌락에 빠지거나 상처 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성형 수술을 하고 다이어트와 운동에 몰두하는 자기 사랑을 가장 위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결국 가정과 사회에서 낙오된 사람들의 인격 장애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래슈(Christopher Lasch) 이것을 ‘자기도취의 문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다수는 낙오되기 보다는 억압 받지만 집단 속에 남아 있는 길을 택한다. 실제로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약 60%, 그리고 한국 대학생의 약 70 %가 자신에게 일어 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로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 고립되는 것’ 을 들고 있다.
즉 자신이 알고 사랑하는 사람이 모두 죽어 없어졌거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빈곤으로 인해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고 업신여김을 받는 것 그리고 집단으로부터 배제되는 것 등이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분노를 표출하고 낙오되고 배제되는 대신 분노를 참고 집단 속에 남는 길을 택하기 때문에 유독 화병이 민족적인 심리 증후군이 되었다는 해석이다.
한국인들에게 나타나는 화병은 주변에 신경을 써야하는 사람들은 너무 많은 데 진정한 관계는 너무 적은 상황에서 생기는 심리적 장애에 노출된 때문이며, 미국인들은 주변에 사람이 너무도 적고 진정한 관계는 더욱 적은 데서 오는 심리적 장애가 개인적 소외와 고독으로 이어진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면 왜 한국인과 미국인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까 ? 한국인이 보다 집단주의적이고 미국인은 보다 개인주의적이기 때문일까 ? 실제로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조화, 호감, 정 그리고 이념적 목표를 공동으로 추구하는 데서 느끼는 가족적인 집단적 소속감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인들의 다수는 고립과 고독을 최악의 것으로 생각한다. 반대로 미국인들은 자신을 집단에 맞추어야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개인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이것이 독립과 자유라는 긍정적인 요소만으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알렉시스 토크빌은 ‘미국 민주주의’ 속에서 이 부분을 희망과 공포의 이중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조상을 잊게 하고 동료를 무시함으로써 개인을 영원히 홀로 남겨두고 결국 자기 마음의 고독 속에 가둬 버리게 될 것이며... 독자적인 삶을 얻을 수는 있으나 그것은 죽음 보다 더 나쁜 삶이며... 개별적으로 개인을 홀로 남겨 둠으로써 다수의 영향력 앞에 무방비한 상태로 만든다’라고 경고했다.
한국인들은 집단에 어울리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고, 미국인들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따라가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독자적 생각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우리는 ‘자립적이지만 소외되지 않고, 집단에 속하지만 갇히지 않는‘ 화해에 도달할 수는 없을까 ? ’우리‘라고 표현하면서 ’나‘로 행동하는 한국인들이 위선적인 것만은 아니다. ’나‘와 ’우리‘ 사이의 갈등과 모순을 서로 다가서게 하여 화해시키는 방법은 어쨌거나 나와 우리의 공존, 나와 우리의 상생이라는 코드로 풀어 줄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IP *.229.146.16
글로벌리제이션은 우리에게 세계로 부터의 정보와 지식을 수신할 수 있는 열린 안테너를 아주 많이 그리고 아주 높이 설치할 것을 요구한다. 폐쇄는 곧 갇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로벌리제이션의 뒷면, 즉 동전의 다른 쪽에는 로칼리제이션이라는 또 다른 숙제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우리의 내부를 탐색할 또 다른 센서를 아주 많이 그리고 아주 깊이 설치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세계화의 밑천으로 쓸 수 있는 것은 결국 한국적인 토속성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추격과 모방으로는 리더십을 쥘 수 없다. 한국적 특수성의 세계적 보편화라는 과제가 바로 글로벌리제이션과 로칼리제이션이라는 모순을 화해시키며 번영할 수 있는 바람직한 접근법이라면 한국인의 특수성 그것은 무엇일까 ?
시인 고은은 ‘한국인은 한의 자궁에서 태어나 한의 젖을 먹고 자라고 한을 견디며 살아가고, 한을 남기고 죽는다“ 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고난에 찬 삶을 보냈다.
한국인들은 대외적으로는 열강들의 틈에 끼여 살았고, 대내적으로는 옛날에는 양반들에 의해서 그리고 최근에는 군부 독재에 의해 억압받아 왔다. ’억압된 삶에서 비롯된 분노‘라는 의미의 한을 품고 살아 왔다. 한이 민족적 심리장애라면 화병은 한국인 특유의 개인적 심리장애라고 말할 수 있다. 원인은 같다. 한과 화병은 분노의 억압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만성적인 분노와 공포 그리고 가슴이 답답한 느낌을 받는다. 한은 개인들에게 흔한 화병들이 민족적 차원에서 쌓이고 곰삭아 ’끈적거리는 줄‘ 처럼 이어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어느 사회나 개인이 사회로부터 억압을 받을 수 있고, 좌절할 수 있고, 분노를 느낄 수 있고, 억압을 참는데서 나오는 스트레스에 의해 심리적 장애를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병을 한국인 특유의 질병으로 인식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메릴랜드 대학의 정치학교수며 ‘글로벌 시대의 한국인의 가치들’ (Korean Values in the Age of Globalization)이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한 프레드 앨퍼드(C.Fred Alford)는 연구 과정에서 생긴 일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나는 화병 주제로 한국인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그리고 45명의 한국인들과 이야기 했다. 대부분 화병을 일종의 분노라고 말했는데, 젊은이들 보다는 노인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대체로 화병을 부정했다. ”우리는 분노를 안에 쌓아두지 않아요. 밖으로 표출해 버리죠. 화병은 우리 어머니들 병이예요’ 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정신과 의사는 짤막하게 말했다. “20년만 더 살아 봐요. 그러면 그 젊은이도 알게 될테니 ”
이 대화는 화병도 마치 정신적 유산처럼 우리의 후세들에게 옮겨지고 계승되는 듯이 느껴졌다. 도대체 분노의 억압이 한국인 특유의 심리장애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 예를 들어 미국인들에게는 화병과 같은 억압된 분노가 없을까 ?
신기한 것은 미국인들은 화병에 걸리는 대신 다른 길을 걷는다는 점이다. 미국인들은 사회구성원을 짓누르기 보다는 낙오시키는 것에 더 익숙하다. 따라서 상사에게 위축된 미국남자들은 가정에서도 아내에게 버림을 받게 되고 결국 삶의 의미를 잃은 채 사회의 구석으로 밀려나게 된다. 결국 그들은 쾌락에 빠지거나 상처 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성형 수술을 하고 다이어트와 운동에 몰두하는 자기 사랑을 가장 위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결국 가정과 사회에서 낙오된 사람들의 인격 장애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래슈(Christopher Lasch) 이것을 ‘자기도취의 문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다수는 낙오되기 보다는 억압 받지만 집단 속에 남아 있는 길을 택한다. 실제로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약 60%, 그리고 한국 대학생의 약 70 %가 자신에게 일어 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로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 고립되는 것’ 을 들고 있다.
즉 자신이 알고 사랑하는 사람이 모두 죽어 없어졌거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빈곤으로 인해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고 업신여김을 받는 것 그리고 집단으로부터 배제되는 것 등이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분노를 표출하고 낙오되고 배제되는 대신 분노를 참고 집단 속에 남는 길을 택하기 때문에 유독 화병이 민족적인 심리 증후군이 되었다는 해석이다.
한국인들에게 나타나는 화병은 주변에 신경을 써야하는 사람들은 너무 많은 데 진정한 관계는 너무 적은 상황에서 생기는 심리적 장애에 노출된 때문이며, 미국인들은 주변에 사람이 너무도 적고 진정한 관계는 더욱 적은 데서 오는 심리적 장애가 개인적 소외와 고독으로 이어진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면 왜 한국인과 미국인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까 ? 한국인이 보다 집단주의적이고 미국인은 보다 개인주의적이기 때문일까 ? 실제로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조화, 호감, 정 그리고 이념적 목표를 공동으로 추구하는 데서 느끼는 가족적인 집단적 소속감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인들의 다수는 고립과 고독을 최악의 것으로 생각한다. 반대로 미국인들은 자신을 집단에 맞추어야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개인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이것이 독립과 자유라는 긍정적인 요소만으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알렉시스 토크빌은 ‘미국 민주주의’ 속에서 이 부분을 희망과 공포의 이중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조상을 잊게 하고 동료를 무시함으로써 개인을 영원히 홀로 남겨두고 결국 자기 마음의 고독 속에 가둬 버리게 될 것이며... 독자적인 삶을 얻을 수는 있으나 그것은 죽음 보다 더 나쁜 삶이며... 개별적으로 개인을 홀로 남겨 둠으로써 다수의 영향력 앞에 무방비한 상태로 만든다’라고 경고했다.
한국인들은 집단에 어울리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고, 미국인들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따라가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독자적 생각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우리는 ‘자립적이지만 소외되지 않고, 집단에 속하지만 갇히지 않는‘ 화해에 도달할 수는 없을까 ? ’우리‘라고 표현하면서 ’나‘로 행동하는 한국인들이 위선적인 것만은 아니다. ’나‘와 ’우리‘ 사이의 갈등과 모순을 서로 다가서게 하여 화해시키는 방법은 어쨌거나 나와 우리의 공존, 나와 우리의 상생이라는 코드로 풀어 줄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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