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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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찾아오는 느닷없는 불청객, 어쩌면 마흔이 되기 시작하면 늘 이런 반갑지 않은 방문을 받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잠을 아주 잘 자는 사람이었다. 잠을 즐기고 잠과 뒹굴고 잠을 많이 자는 사람이었다. 불면증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흔이 넘으면서부터 가끔 불면에 시달려야 했다. 이유는 분명치 않다. 어떤 스트레스가 나를 잠자지 못하게 하는 지 모르겠다. 나는 별로 스트레스가 없는 마흔 살을 보냈다. 구체적인 스트레스라기보다는 어떤 거대한 불안 같은 것이 내 신경을 무척 예민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불면이 찾아오면 내 신경은 가닥가닥 끊기는 느낌이 든다. 목에서부터 어깨로 굵고 두껍고 검은 근육들이 뻣뻣하게 굳어 오는 듯해진다. 그리고 심장은 가냘픈 흐느낌처럼 나약해 진다. 머리가 아프고 무거워 지며 둔해진다. 자려고 하면 더 잘 수 없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의자에 앉는다. 약간 흔들거리게 만들어 놓고 편안하게 반쯤 눕듯이 앉는다. 내 의자는 꽤 좋다. 그리고 편하다. 나는 의자에 약간의 돈을 투자하였다. 하루에 여러 시간 함께 보내야 하니까. 어쨋든 나는 이 불면증과 잘 친해두어야 한다. 불면증을 고칠 수 있는 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일 단 찾아오면 나는 이 놈과 친하게 지내려고 한다. 이렇게 의자에 앉아 바로 이 놈에 대해 써 보기도 하는 것은 꽤 오랜 동안 이놈과의 싸움에서 얻은 요령이다. 마흔은 가끔 불면증과의 동행과 동침을 의미한다. 나는 즐길 것이다. 불면 역시 주어진 것이니 받아들일 것이다. 내가 결코 좋아하지 않는 어떤 것들이 날 찾아 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싸우지 않고 돌려보내는 것이 가장 상책이다. 예를 들어 번잡함이 내 주위에서 서성거리면 나는 조용히 혼자 있는 방법을 취한다. 방송이 나를 괴롭히면 나는 출연에 응하지 않는다. 모임이 나를 괴롭히면 나는 모임에 나가지 않는다. 원고를 써야하는 강박감을 느낄 때에는 언제고 청탁을 거절한다. 어쨋거나 고독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고독은 비 같은 것이다. 밤사이에 식물을 자라게 하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주로 내부적인 이유 때문에 발생하는 것들일 텐데 이것은 그렇게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불면증도 그 중의 하나다. 싸우는 것 보다는 - 나는 훌륭한 싸움꾼이 못된다 - 데리고 함께 즐기며 사는 것이 좋다. 불면증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내가 모르던 다른 세계를 접하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나는 바하의 무반주 첼로곡이 불면증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파블로 카잘스가 타는 바하를 듣다보면 어느덧 잠이 들고 아침에 상쾌하게 깰 때도 있다. 불면증은, 적어도 나를 찾아 온 이 놈은 약간 묵직한 음률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음악은 괜찮은 치료제인 것 같다. 또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괜찮다. 그저 마음이 흐르는 대로 가볍게 생각을 따라 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무겁고 진지한 사고가 나쁠 거야 없지만 경쾌하고 가벼운 사고 역시 나쁠 것이 없다. 때로 바다 속으로 깊게 가라앉고 때로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 보는 것 모두 나쁠 게 없다. 불면은 내게 또 다른 고독을 즐기게 해주는 하나의 방법이다. 단지 내 스스로 불면을 찾아 가지는 않는다. 이 놈이 찾아오면 맞아줄 뿐이다. 이것 역시 마흔이 넘어가면서 터득하게 된 불면에 대한 처세술이다. 와라, 즐겨주마. 그러면 가끔 그놈들은 내가 두려워 꽁지를 빼기도 한다. 인생에 대한 두려움도 그런 것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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