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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15일 12시 31분 등록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박병규 옮김, 민음사, 2008년, (월간중앙)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어, 말도
아니었고,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 ‘시’ 중략, 정현종 번역)

이 시가 바로 여러분들이 어디선가 들어 보았음직한 바로 그 시다. 파블로 네루다, 바로 그가 이 시를 지은 시인이다. 나는 그의 시를 보면 뜨거운 남미가 느껴진다. 그는 ‘손을 대는 순간 모든 것을 시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던 것 같다.

시인 정현종은 네루다의 시를 ‘언어라기보다는 하나의 생동, 그의 시를 통해 만물이 마침내 희희낙락해지는 역동‘이라 말한다. 이 책은 시인으로 공산주의자로 정치인으로 살았던 네루다의 자서전이다. 500 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한 번도 지루한 적이 없이 책장이 넘어간다. 그 이유는 그의 언어적 힘에 있기도 하지만 그의 인생을 사람으로 표현해내는 그의 재주 때문이다.

이 책 속에는 우리가 그 이름을 들어본 온갖 종류의 시인들과 문인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그들과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물론 우리에게 낯 설은 더 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름과 관련없이 그들은 모두 말할 수 없이 운치있는 시적 표현들로 묘사된다. 너무 아름다운 묘사들이여서 나는 여기에 하나쯤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젊은 시인 미겔 에르난데스가 있었다.... 그는 흙냄새 물씬 풍기는 농부였다. 얼굴을 보면 아직도 신선한 흙냄새를 풍기는 감자나 흙덩이 생각이 났다... 순수한 숲과 굽이치는 생명력을 지닌 자연에서 솟아오른 작가였다. 잠든 암염소의 배에 귀를 대어보면 얼마나 재미있는지도 애기해 주었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젖통으로 젖이 흘러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들은 적이 없다고 하자) 그는 나이팅게일이 노래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싶었는지 가로수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나무 꼭대기에 걸터앉아서 나이팅게일처럼 휘파람을 불며 지저귄다... 에르난데스의 얼굴은 스페인의 얼굴이었다. 햇빛에 깎이고, 씨를 뿌려 놓은 밭처럼 고랑이 파인 얼굴은 빵이나 지구처럼 둥굴거렸고...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두 눈은 강인함과 온유함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많은 자서전들이 있다. 자서전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매우 두껍다는 것이다. 아마 저자들이 살아온 그 긴 세월을 반추하고 회상하면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문인들의 경우는 평생을 이야기꾼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아마 더 길어 졌는지도 모르겠다.

종종 지루한 인생도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네루다의 인생은 지루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너무도 역동적인 인생을 살아 낼 힘과 능력이 있었던 듯하다. 열 아홉의 나이에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펴냈는데, 아직도 남미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시가 그에게 무엇이었는지 보여주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 소개해 보아야겠다. 나이 들어 그는 대머리가 되고 뚱뚱해졌지만 한창 젊을 때에는 못먹어서 깡마르고 허약한 가난한 시인이었다.

하루는 그가 친구들과 어울려 허름한 술집에 들어갔다. 탱고가 유행하던 시절 사람들은 허름한 술집에서 춤을 추며 술을 마셨다. 그때 갑자기 춤이 중단되고 무대에서 사람들은 물러났다. 그 동네에서 유명한 건달 두 놈이 서로 욕설을 퍼부으며 서로 주먹질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비쩍 마른 네루다가 나서 소리를 질러댔다. “이 허섭쓰레기들. 여기가 어디라고 싸움질이냐 ?" 두 놈이 기가 막힌 듯 멍하니 쳐다보다가 그 중 한 놈이 네루다에게 달려들었다. 정통으로 주먹에 맞았다면 네루다는 그대로 뻗었을 것이다, 그러나 쓰러진 놈은 바로 달려든 그 놈이었다. 그 놈과 겨루던 상대방이 네루다에게 달려드는 그 놈에게 한 방을 먹여 그놈을 쓰러뜨린 것이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자 다시 네루다가 소리쳤다. ”꺼져, 너도 똑 같은 놈이야“ 잠시 후 복도에서 몸집이 산만한 바로 그 건달 놈이 네루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벽으로 그를 밀어 붙이더니 어느 방으론가 끌고 갔다. 네루다는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다. 그러자 그 건달이 물었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지요 ?"
"그런데요“

그 건달은 네루다에게 웃는 여자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이 여인은 내 애인입니다. 그녀가 나를 좋아하게 된 것은 당신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신 시를 함께 외었거든요.” 그리고 시를 낭송했다.

“나처럼 생긴 슬픈 소년이 그대 안에서 무릎을 꿇고 우리를 바라본다....”

네루다는 천천히 방을 나왔고 그 건달은 여전히 시를 외우고 있었다. 시가 승리한 것이다. 그 건달은 시에 패배한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바로 네루다 그 사람의 삶을 압축해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장면이다. 그는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시가 이기리라는 믿음 속에서 살았다. 그는 늘 사람에 대한 애정과 휴머니즘 속에 살았다. 그 외에 그는 어떤 사상에도 갇히지 않았다.

그는 ‘어떤 딱지도 붙이지 않고 그저 사람으로 살고 싶어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뜨거운 불처럼 타오르는 낭만적 시인이었던 그는 스페인 내전의 참상과 참으로 아끼던 친구 시인인 가르시아 로르카의 피살을 겪으면서 낭만적 시인으로 머물 수 없었다.

스페인 내전에 다른 문인들과 함께 프랑코에게 반대하여 인민전선의 편에 섰고, 파리의 칠레 영사로서 스페인 망명자들을 칠레로 날랐고,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선 공산주의자로 살았다. 그러나 그의 매력은 주의에 갇히지 않은 비이데올로기적인 삶에 있다.

그는 ‘성숙한 작가는 인간적 동료의식과 건강한 사회의식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대중의 시인으로 진화해 갔고, 체 게바라는 죽기 전까지 밤마다 그의 동료들에게 네루다의 시를 읽어 주었다.

네루다는 시로 살았고 시로 사랑했고 시로 노래하며 시로 투쟁했다. 그는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 주고 싶어했다. 빵의 맛도 보고 피의 맛도 보았으며, 시인으로서 그것 이상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시를 위해 살았고, 시는 그의 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 세 가지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첫째는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두꺼운 책도 쉽게 읽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그의 시를 읽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될 터인데, 그때는 얼른 서점으로 달려가 정현종 시인이 번역한 시집을 사와 읽으면 훌륭한 지적 즐거움이 될 것이다. 아니면 이 자서전을 구해 읽기 시작할 때 그의 시집 하나를 사가지고 들어와 함께 즐기면 더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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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2008.06.07 08:36:50 *.202.172.14
확인 수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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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4 14:17:41 *.212.217.154

누구인지 낮 모르는 시인인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예전 감명깊게 보았던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에 모티브가된 시인이었네요.


시를 좋아하진 않지만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네루다의 시는 참 좋습니다.


그의 시가 빛나는 이유는

그가 삶과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만큼

진정성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닐런지.


시인을 될 수 없겠지만,

내 안의 진정성으로 세상을 바꿀 그 무엇을 꿈꾸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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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3 20:55:16 *.212.217.154

'남미'라는 말에는

묘한 맛이 있습니다.


네루다의 표현처럼

진한 흙냄세 같기도 하고

붉은 흑덩이처럼 생명력 강한 감자의 냄세같기도 합니다.


대륙에는 저마다의 색과 냄세가 있습니다.

그 다양성이 저마다의 색으로 피어날때

세상은 그 개성으로써

더욱 풍요로워지겠지요.


저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지역의 색과 맛으로

나만의 개성을 더욱 꽃피우겠습니다.

그 오리지널로 세상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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