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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와 제자들간의 대화 - 평생을 두고 곱씹을 잠언들
주자어류(朱子語類) - 동아일보 7월 20일, 2001
여정덕 편찬, 소나무, 2001
여름은 잠시 마음을 놓아두고 며칠 쉬는 것이 허락되는 계절이다. 그러나 가고 싶은 곳은 많고 주어진 휴가는 짧다. 피서지는 늘 붐비고 가는 길은 체증이 심해 답답하다.
여유롭게 쉬고 즐긴다기 보다는 한바탕 전쟁을 치룬 것 같이 돌아오고 휴가의 마지막 날은 피곤함 속에 저문다. 바쁘기만 한 일상에 잠시도 짬을 낼 수 없다면 우리는 언제 우리의 인생을 한 번 되돌아 볼 수 있겠는가 ?
휴가를 얻어 어딘가 아름다운 곳에서 며칠 쉬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내면의 세계로 잠시 마음의 여행을 떠나는 것 역시 아름다운 일이다. 독서는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마음을 데려올 수 없다. 사람은 바쁘고 혼란스러울 때 마음이 밝지 못하다.
어느 날 잠시 멈추어 쉬며 자신이 혼란스럽다는 것을 아는 순간, 바로 마음이 밝아진다. 공부란 오로지 '불러 일깨우는' 방법 밖에는 없다.
이 책 '주자어류'는 주희와 그 제자들 사이의 대화와 강론을 남송 때 여정덕이라는 사람이 주제별로 편찬한 것의 처음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주자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책이며 우리 선조들이 매료되었던 책이기도 하다.
나는 이 분야의 문외한인데 우연히 이 책을 얻어 읽게 되었다. 두꺼운 책의 후반부에 있는 학문과 독서법에 대한 부분이 마음에 와 닿아 감히 소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붉고 정정한 적송(赤松)들이 즐비한 오솔길을 산책하는 듯하고 대숲이 우거진 암자에 앉아 바람을 쐬는 것 같다. 천천히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니 상쾌하고 시원하다. 잠시 같이 가 볼까 ?
배우는 사람이 늘 조심해야할 것이 있다. 그것은 예전에 받아들인 가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을 읽을 때에는 우선 의심이 일도록 해야한다. 그리고 의심이 생기면 반드시 의심을 없애야한다.
책을 읽다 이해할 수 없는 곳에 이르면 '엣 견해를 씻어 버리고 새로운 의미를 얻어'야한다. 이렇게 되면 크게 나아질 수 있다.
책을 읽을 때는 조금씩 천천히 읽어야한다. 반드시 그 속에 들어가 한바탕 맹렬히 뒤섞여야한다. 마치 앞 뒤의 글이 막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 처럼 되어야 한다. 투철해져야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
그러니 공부할 양은 작게하고 공력은 많이 기울여야한다. 물을 잘 주는 농부는 채소와 과일 하나 하나에 물을 준다. 물을 잘주지 못하는 농부는 급하고 바쁘게 일을 처리한다. 한지게의 물을 지고 와서 농장의 모든 채소에 한꺼번에 물을 준다. 남들은 그가 농장을 가꾸는 것으로 볼 것이지만 작물은 충분히 적셔진 적이 없다. 우리의 정신도 이와 같다.
생각할 것 없는 쉬운 독서와 킬링 타임의 통속성 속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배움과 독서의 향기를 선사하는 책이다. 이 책은 두껍고 비싸다. 다 읽고 버리는 책이 아니다. 평생을 두고 볼만하다. 그래도 다 볼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마음이 떨어진 낙엽처럼 바스러질 때, 혹은 바람에 날려 어디로 날아 갔는 지 조차 알지 못할 때, 책상에 앉아 몇 페이지 보면 차원이 다른 청량함을 맛 볼 수 있다. 이 책은 책이라기 보다는 향기이다. 책의 중반 이후 '소학'부터 읽되 '독서법'을 먼저 보면 마음이 열리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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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어류(朱子語類) - 동아일보 7월 20일, 2001
여정덕 편찬, 소나무, 2001
여름은 잠시 마음을 놓아두고 며칠 쉬는 것이 허락되는 계절이다. 그러나 가고 싶은 곳은 많고 주어진 휴가는 짧다. 피서지는 늘 붐비고 가는 길은 체증이 심해 답답하다.
여유롭게 쉬고 즐긴다기 보다는 한바탕 전쟁을 치룬 것 같이 돌아오고 휴가의 마지막 날은 피곤함 속에 저문다. 바쁘기만 한 일상에 잠시도 짬을 낼 수 없다면 우리는 언제 우리의 인생을 한 번 되돌아 볼 수 있겠는가 ?
휴가를 얻어 어딘가 아름다운 곳에서 며칠 쉬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내면의 세계로 잠시 마음의 여행을 떠나는 것 역시 아름다운 일이다. 독서는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마음을 데려올 수 없다. 사람은 바쁘고 혼란스러울 때 마음이 밝지 못하다.
어느 날 잠시 멈추어 쉬며 자신이 혼란스럽다는 것을 아는 순간, 바로 마음이 밝아진다. 공부란 오로지 '불러 일깨우는' 방법 밖에는 없다.
이 책 '주자어류'는 주희와 그 제자들 사이의 대화와 강론을 남송 때 여정덕이라는 사람이 주제별로 편찬한 것의 처음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주자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책이며 우리 선조들이 매료되었던 책이기도 하다.
나는 이 분야의 문외한인데 우연히 이 책을 얻어 읽게 되었다. 두꺼운 책의 후반부에 있는 학문과 독서법에 대한 부분이 마음에 와 닿아 감히 소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붉고 정정한 적송(赤松)들이 즐비한 오솔길을 산책하는 듯하고 대숲이 우거진 암자에 앉아 바람을 쐬는 것 같다. 천천히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니 상쾌하고 시원하다. 잠시 같이 가 볼까 ?
배우는 사람이 늘 조심해야할 것이 있다. 그것은 예전에 받아들인 가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을 읽을 때에는 우선 의심이 일도록 해야한다. 그리고 의심이 생기면 반드시 의심을 없애야한다.
책을 읽다 이해할 수 없는 곳에 이르면 '엣 견해를 씻어 버리고 새로운 의미를 얻어'야한다. 이렇게 되면 크게 나아질 수 있다.
책을 읽을 때는 조금씩 천천히 읽어야한다. 반드시 그 속에 들어가 한바탕 맹렬히 뒤섞여야한다. 마치 앞 뒤의 글이 막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 처럼 되어야 한다. 투철해져야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
그러니 공부할 양은 작게하고 공력은 많이 기울여야한다. 물을 잘 주는 농부는 채소와 과일 하나 하나에 물을 준다. 물을 잘주지 못하는 농부는 급하고 바쁘게 일을 처리한다. 한지게의 물을 지고 와서 농장의 모든 채소에 한꺼번에 물을 준다. 남들은 그가 농장을 가꾸는 것으로 볼 것이지만 작물은 충분히 적셔진 적이 없다. 우리의 정신도 이와 같다.
생각할 것 없는 쉬운 독서와 킬링 타임의 통속성 속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배움과 독서의 향기를 선사하는 책이다. 이 책은 두껍고 비싸다. 다 읽고 버리는 책이 아니다. 평생을 두고 볼만하다. 그래도 다 볼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마음이 떨어진 낙엽처럼 바스러질 때, 혹은 바람에 날려 어디로 날아 갔는 지 조차 알지 못할 때, 책상에 앉아 몇 페이지 보면 차원이 다른 청량함을 맛 볼 수 있다. 이 책은 책이라기 보다는 향기이다. 책의 중반 이후 '소학'부터 읽되 '독서법'을 먼저 보면 마음이 열리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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