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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1월 12일 17시 23분 등록
샘터-8월, 2003

얼마 전 광주에서 강연이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비행기를 타고 가서 강연이 끝나면 곧바로 다시 되집어 서울로 올라 왔습니다. 강연은 저술과 함께 본업이 되었지요. 그러니까 직업이 돼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직업이라는 어떤 묵직하고 순환적인 타성이 나를 누르기 시작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지방에서의 강연은 여행이라기 보다는 출장같은 것으로 여겨졌지요. 여행은 즐거운 것이지만 출장은 들고 가는 가방만큼이나 무거운 것입니다. 여행은 아주 가벼운 것이지만 출장은 목을 조이는 타이 같은 것이지요. 여행은 다른 공간에서 자유를 찾는 것이지만 출장은 자유로운 다른 공간까지 일로 오염시키는 것이지요.

나는 출장을 즐거운 여행으로 만들어 보려고 했습니다. 출장 대신 강연여행이라는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처가 이 여행에 동참해 주었지요. 우리는 함께 갔습니다. 그리고 공항에 내려 12시간 동안 차를 빌렸습니다. 가능하면 새 차면 좋고 휘발유 보다는 가스차가 더 좋습니다. 여행강연은 출장강연보다 더 다이나믹하고 더 즐겁고 더 밝습니다. 행복한 강사만이 훌륭한 강연을 할 수 있으니까요.

강연이 끝나자 우리는 나주를 거쳐 무안으로 다시 현경을 지나 지도를 향해 아주 작은 서해안의 반도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전 날 폭우가 몰아쳐 모두 닦아냈기 때문에 하늘이 반짝거립니다. 우리는 여름 뭉게구름 흐르는 선명하기 그지없는 바닷가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서해안이지만 바다 속으로 깊숙히 빠져나온 반도였기 때문에 물은 오히려 초록빛이었습니다. 바다가 어쩌면 그렇게 고운지요. 백사장이 호수와 같이 둥근 초록 바다를 감싸안고 길이 끝나는 곳에 조촐한 몇 개의 횟집이 빛나는 오후 속에서 졸고 있었습니다.

구름 흐르는 그 한가함 속에 나를 놓아두고, 바다를 거쳐온 시원한 바람에 나를 태워두었습니다. 바닷가에 커다란 그물막을 치고 그 아래 침상을 놓아 두었더군요. 그곳에 앉아 호수 같은 바다를 보고 있었습니다. 물빛 고운 가운데로 멀리 양식장까지 세 사람을 태운 작은배가 물살을 가르고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우리는 한가함 속에 그렇게 편히 앉아 있었고 시간은 정지한 듯했습니다. 새도 하늘을 나르다 멈추어 섰고, 햇빛 역시 작은 물결위에서 졸고 있고, 바람도 흐르다 서있는 듯 했습니다. 우리는 한가함 속에 모든 동작 모든 생각을 벗어 두었습니다. 평화는 소리 없음이고, 무위며, 멈춰서있음입니다.

문득 심심하다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심심하게 먹어야 속이 편합니다. 마찬가지로 심심하게 살아야 생각이 맑아지나 봅니다. 노래하고 술마시고 춤을 추는 것이 모두 심심해서 그런 것이지요. 재미있게 논 다음 날 아침은 늘 목이 마르고 속이 쓰리고 머리가 아파요. 심심해서 몸이 튀틀려야 새로운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문화는 심심함에 지친 사람들이 심심함을 이기기 위해 만들어 낸 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심함이 없으면 창조도 없습니다. 불행하다고 인식한 사람들만이 변화를 만들어 내고, 심심한 사람들만이 심심함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노동은 심심함을 이기는 아주 생산적인 일이긴 하지요. 그러나 노동이 바쁨을 만들어 내면 우리는 석고처럼 됩니다. 바쁨은 새로움의 천적입니다. 머리는 죽고 손발은 헉헉대는 것이 바로 바쁨의 모습이예요. 바쁨은 전염성이 아주 강합니다. 휴가조차 바쁘게하고 쉼조차 바쁨으로 가득 채워요. 결국 심심한 것을 참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모두 똑같아지는 것 같아요.

바닷가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자 우리에게 시계소리가 다시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는 다시 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로 가는 비행기 시간에 맞추어 쉬고 있던 감각이 다시 바쁘게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행의 세계가 서서히 문을 닫고, 우리는 다시 일상 속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IP *.229.14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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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8 22:11:19 *.212.217.154

십여년 전 부터

느린 삶을 살고 계셨군요.

세상의 시계가 아닌

내 안의 시계, 속도에 맞춘 삶을 살려합니다.

때론 여행처럼 느리게,

때론 일 처럼 빠르게,

그렇게 사는게 행복한 삶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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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3 12:27:57 *.143.63.210

요즘의 유행어로

'멍 때리기'를

십 오년전에 실천하고 계셨군요.


더 창조적이기 위해,

너무 바쁘지 않으려 합니다.


조금 설렁설렁 꾸물꾸물 어슬렁어슬렁

그렇게 느린 걸음으로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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