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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25일 16시 18분 등록
작은 구릉 위에 서서 바다를 보면 수평선은 늘 내가 생각하는 곳 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 조각공원 열차 위에서 차를 마시며 보는 정동진 바다도 그렇고, 서귀포 여고에서 보는 바다도 그렇고, 제주 신라호텔에서 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나무 계단 위에서 보아도 그렇다. 내 눈높이와 거의 수평을 이룬다. 바다를 굽어본다는 생각은 생각 속의 생각일 뿐이다. 바다는 언제고 내가 그 안으로 스며들 수 있는 부드럽고 푸른 커튼처럼 내 눈앞에 서있다. 나는 바다를 좋아한다. 바다에서 뜨는 해를 보며 잠에서 깨기를 바란다. 바다로 다시 지는 해를 보고 있다가 그 정취를 안고 이내 어두워지는 뒷방의 전등을 켜고 책을 읽고 싶다.

바다가 좋아 아이들 이름 속에도 바다를 하나씩 넣어 주었다. 살면서 아이
들이 태어난다는 것만큼 축복 받는 일은 없다. 보들보들하고 예쁜 아이가 하
나 집에 와서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 말고, 우리가 언제고 죽어 없어진다는 이
유 때문에 그렇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서 힘이 세어지면, 우리는 죽음을
치루어야 한다. 결혼 생활은 아이를 낳고, 남편이나 아내의 죽음을 지켜 보아
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하고 생명을 얻고 생명을 떠나 보낸다. 죽은
뒤에도 우리는 아직 우리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있게 된다. 죽었
지만 그들의 마음에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그들마저 죽으면 그때 비로소 우
리는 정말로 죽어 우리가 살던 세상을 떠나가게 된다. 삶은 우리가 세상에 머
문 시간이며 다른 사람 속에 남아 있는 기억이다.

첫 아이가 태어날 때 나는 처의 곁에 없었다. 출장 기간의 중간쯤에서 처는
딸아이를 낳았다. 그 소식은 내게 가슴을 지나가는 한 줄기 서늘한 바람 같은
것이었다. 운명, 만남, 궁금함, 아버지, 두 사람의 건강, 기쁨 같은 것들이 한데
섞여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무엇인가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일이 나에
게 생겨났다는 느낌이었다. 그 아이의 태어남은 나의 삶이 다시 시작된다는 것
을 말하는 것이었다. 일 주일 쯤 후에 귀국하여 그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볼
수 있었다. 모든 게 하도 작고 가늘어서 부서질 것 같았다. 처 역시 바다를
좋아하여 아이의 이름에 바다가 들어가게 짓자고 했다. 그래서 상서롭고 귀하
다는 기린을 더하여 큰 아이의 이름은 '해린'이 되었다. 큰 아이는 가끔 '바다
와 기린'이 무슨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고 물어본다. 나는 대답한다. '아무런
관계도 없다. 너의 삶이 곧 너의 이름이다. 너의 이름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인지는 네가 어떤 생을 사느냐에 달려있다. 만들어 가는 것이다.' 아이
는 갸우뚱한다.

둘째 아이를 날때, 처는 피를 많이 흘렸다. 여름 소나기가 억수로 퍼부을
때 처는 퇴원했다가 열흘쯤 지나 다시 입원하였다. 그 동안 둘째는 엄마와 떨
어져 있었는데 입에 아구창이 돋아 우유조차 잘 빨지 못했다. 아이와 그 엄마
가 처음 만날 때 서로 꽤 고생을 한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아이에 대한 처
의 애정은 유별난 점이 있다. 이 아이는 나와 모양도 성격도 흡사하다. 겉으
로는 매우 느긋해 보이지만 속은 여리고 섬세하다. 둘째 딸 아이의 이름은 '해
언'이다. 좋은 선비처럼 늘 배우되 바다처럼 또한 늘 푸르라고 그렇게 지었다.

아이들의 이름 속에는 삶에 대한 기대가 들어가 있다. 아름다움, 풍요로움,
무병장수, 배움, 곧음, 부드러움...... 이름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주는 축복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 축복 속에서 스스로의 생을 만들어 가고, 그 독특한 생 하
나 하나에 다시 우리는 그 이름을 붙여 묘비에 새겨 넣는다. '아무개, 그의 인
생은 이러했느니라.'라고 말이다.

나는 바다를 좋아한다. 그 속에는 온갖 것들이 다 들어 있다. 벗어 던진
신발도 있고, 깨진 요강도 들어가 있다. 새벽에 토한 그 전날 밤의 술도 그
속에 들어 있고, 사랑을 잃어버린 젊은 남자의 눈물도 담고 있다. 독재정권 아
래서 땅끝까지 쫒겨간 어느 시인의 절망도 들어있고, 남편을 잃은 어부의 아낙
이 터트리는 오열도 담고 있다. 한일어업협정의 어리석음과 울분이 들어있다.
그러나 또한 내가 좋아하는 조기, 명태, 우럭, 도다리, 성게, 꽃게도 그 속에서
헤엄치고 살아있다.

모든 것을 다 담고도 푸르를 수 있다면... 아아, 나는 그렇게 살고 싶다. 나는
나의 삶이 그랬으면 좋겠다. 푸르기 때문에 푸르른 것도 좋다. 그러나 삶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뜻을 이루지 못한 허망한 좌절이 있고, 상실의 아
픔이 있다. 햇빛 같은 기쁨이 있다. 뿌듯한 보람도 있다. 서쪽 창가로 지는
노을 같은 추억이 있고, 어두운 방에서 소주를 털어 넣어야 했던 아픈 이별이
있다. 깃발을 들고 거리로 뛰어 나가던 젊은 분노와 기개가 있다. 세상은 바
뀌지 않고, 어쩔 수 없이 견뎌야하는 지루한 일상도 있다. 모든 것을 다 담고
도 그래도 푸른 바다는 결국 세상을 끌어안는 포용이고 다양함에 대한 너털웃
음 일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화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은 색이나 누런
빛이 아닌 푸른빛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선택이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되 자
신의 색을 잃지 않는다.

바다인들 늘 푸르기만 하겠는가. 폭풍과 함께 거대한 해일로 분노를 터뜨리
기도 하고, 검은 하늘과 짝이 되어 몸을 솟구쳐 울부짖기도 한다. 그러다가 다
시 수양하는 선비처럼 항상심으로 돌아가 푸른 바다가 된다. 그리고 이내 섬세
한 흰빛 포말이 되어 해안의 모래톱을 쓰다듬고 있다. 나는 이것이 세상에 대
한 자신의 표현일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참다 참다 못 참는 분노일 것이
고, 분노 뒤의 체념일 것이라고 믿은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알게 되었다.
바다는 세상의 일에 관심이 없다. 그것은 푸른 바다로 남기 위한 끊임없는 자
기혁명이며 개혁이다. 속으로 거대한 해류가 흐르게 하고, 때때로 소용돌이치
게 하고,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뒤섞어 줌으로써 살아 있는 푸른 바다로 남
기 위한 쉬지 않는 자기 정화 작업이다. 그리하여 바다는 바다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다는 세상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스스로 세상이 되고 푸른 바다가
되어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바다가 더 이상 바다가 아닐 때 세
상은 끝나는 것이다.

바다의 냄새는 나를 깨어나게 한다. 시원한 바람이 되어 명치 끝에 걸려있
는 알 수 없는 걱정들을 달래 평화로운 마음으로 돌아가게 한다. 바다는 또한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밤새 파도 소리 들리는 어촌의 방 하나를 빌어 누워 있
으면 바다가 긴 밤 내내 깨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보길도의 자갈밭을
뽀구르르 빠져나가는 그 소리도 좋고, 제주도 산방산 밑 사계 바다의 바람 속
에 섞인 파도 소리도 잠을 못 이루게 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참 좋은 것이다. 바다를 보며 그가 살아 있고 또한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 잠시 깨달은 자가 되어 무엇을 하고 무엇이 되고 무엇을
가지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자유스러움을 느낀다. 다시 도시로 돌아와 팔
과 다리를 스스로 묶고 일상 속에 놓이게 되면 작고 보잘 것 없는 속물이 되곤
하지만 구릉에 서서 바다를 보면 나는 바람이 되고 파도가 된다. 그리고 이내
그 푸르름이 된다
IP *.208.140.138

프로필 이미지
2015.06.14 18:14:00 *.212.217.154

바다의 소리와 그 냄새가 나는 듯 합니다.

글 속에서 살아계시군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7.10.11 09:56:41 *.93.9.81

선생님이 진행하신 '고전읽기'가 생각나네요. 

중저음의 부드럽고 힘찬 목소리와 함께 흘러나왔던 

두번째 달의 '바다를 꿈꾸다'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왜 이 노래를 선정하셨는지 이제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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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2 10:01:34 *.134.5.21

갑자기,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집에서

석양이 끝나며 방 안에 불을 켜고

책을 드는 선생님을 그려봅니다.

그런 제 모습도 그려 봅니다.


추운아침, 따듯함이 마음에서부터 

온 몸으로 퍼져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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