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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작은 이야기'(1999. 8)-느림과 기다림에 대하여
비온 다음 날 아침은 상쾌하다. 청량한 공기 속에 흙 냄새가 느껴진다. 촉촉한 차가움 속에 아침이 깨어나듯 나도 나로 깨어난다.
여의도 샛강은 이제 내가 어려서부터 자라오며 보아 온 친근한 강어귀의
풍경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갈대가 키를 넘기고, 그리운 야생풀과 꽃들로
가득 차 가기 시작한다. 막 비가 갠 아침 길을 걸으며, 흙 길 위를 가로지르
는 참으로 많은 지렁이들을 보았다. 땅이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쭈
구리고 앉아 그것들이 움직여 가는 것을 보았다. 먼저 머리가 뾰쭉해 지면서
힘차게 앞으로 뻗는다. 그리고 이내 몸의 배 위쪽 부분에 해당되는 반쪽이 앞
으로 당겨져 오고 꼬리 부분이 따라 온다. 머리도 움직이고 꼬리도 동시에 움직
이는 법은 없다. 먼저 머리가 움직이고 몸이 따라온 후 꼬리가 멈추어 서야 다
시 머리가 뻗어져 나온다. 꼬리는 몸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몸은 머리가 움직
이기를 기다린다. 기다림이 없이 지렁이는 움직일 수 없다. 기다려야만 움직
일 수 있다는 것은 오래도록 우리가 잊고 있어온 원칙 중의 하나이다.
자연은 언제나 우리의 예상 밖에 있고, 늘 우리의 상상력의 한계를 벗어나 있
다. 인류의 위대한 발견과 발명은 자연에서 기인하지 않은 것이 없다. 노자(老
子)는 자연이 곧 도(道)는 아니지만 가장 도에 가깝게 움직인다고 말한다.
인간은 쉰다는 것을 잊은 것 같다. 우리는 기다리지 못한다. 오직 움직일 뿐
이고 더 빨리 움직이려한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더 힘껏 달려 가고 있지만
누구도 그곳이 어디인지 걱정하지 않는다. 오직 걱정이 있다면 그 대열에 합
류되어 못할 때 뿐이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모든 것을 놓치고 만다.
젊었을 때 우리는 풍족해 지려고 젊음을 바친다. 늙어서는 다시 젊어지기 위
해 벌은 것을 소모하며 산다. 기다림을 상실한 어리석은 분주함이다. 기다
림은 무엇을 놓쳐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것, 기대하지 않았던
무엇인가가 다가오는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기다림 없이 우리는 누구를 사랑
할 수 있는가? 자유로운 시간과 휴식 없이 우리는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 새로운 생각은 게으름과 휴식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막 문이
닫히고 내려가기 시작하는 엘리베이터를 놓치게 된 것을 원통해 하지 말라. 또
는 뛰어가 막 떠나려는 버스에 올라타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 말라. 그대
가 시간을 잊어 버렸다고 생각했을 때 오히려 그대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게 될
때가 있음을 기억하라. 대합실은 놓친 기차를 기다리는 곳만이 아니다. 앞
으로 오게될 기차를 기다리는 곳이다.
오늘 아침 지렁이의 움직임을 보며, 소설가 이탈로 스베보(Italo Svevo)의 말
을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하루에 두 세시간 정도는 편안한 소파에서
지낼 권리가 있다...그리고 몸에 해롭지 않은 소주 한병을 깔 권리가 있다."
좋은 친구와 함께 한 술자리처럼 편안하고 즐거운 말이다
IP *.208.140.138
비온 다음 날 아침은 상쾌하다. 청량한 공기 속에 흙 냄새가 느껴진다. 촉촉한 차가움 속에 아침이 깨어나듯 나도 나로 깨어난다.
여의도 샛강은 이제 내가 어려서부터 자라오며 보아 온 친근한 강어귀의
풍경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갈대가 키를 넘기고, 그리운 야생풀과 꽃들로
가득 차 가기 시작한다. 막 비가 갠 아침 길을 걸으며, 흙 길 위를 가로지르
는 참으로 많은 지렁이들을 보았다. 땅이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쭈
구리고 앉아 그것들이 움직여 가는 것을 보았다. 먼저 머리가 뾰쭉해 지면서
힘차게 앞으로 뻗는다. 그리고 이내 몸의 배 위쪽 부분에 해당되는 반쪽이 앞
으로 당겨져 오고 꼬리 부분이 따라 온다. 머리도 움직이고 꼬리도 동시에 움직
이는 법은 없다. 먼저 머리가 움직이고 몸이 따라온 후 꼬리가 멈추어 서야 다
시 머리가 뻗어져 나온다. 꼬리는 몸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몸은 머리가 움직
이기를 기다린다. 기다림이 없이 지렁이는 움직일 수 없다. 기다려야만 움직
일 수 있다는 것은 오래도록 우리가 잊고 있어온 원칙 중의 하나이다.
자연은 언제나 우리의 예상 밖에 있고, 늘 우리의 상상력의 한계를 벗어나 있
다. 인류의 위대한 발견과 발명은 자연에서 기인하지 않은 것이 없다. 노자(老
子)는 자연이 곧 도(道)는 아니지만 가장 도에 가깝게 움직인다고 말한다.
인간은 쉰다는 것을 잊은 것 같다. 우리는 기다리지 못한다. 오직 움직일 뿐
이고 더 빨리 움직이려한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더 힘껏 달려 가고 있지만
누구도 그곳이 어디인지 걱정하지 않는다. 오직 걱정이 있다면 그 대열에 합
류되어 못할 때 뿐이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모든 것을 놓치고 만다.
젊었을 때 우리는 풍족해 지려고 젊음을 바친다. 늙어서는 다시 젊어지기 위
해 벌은 것을 소모하며 산다. 기다림을 상실한 어리석은 분주함이다. 기다
림은 무엇을 놓쳐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것, 기대하지 않았던
무엇인가가 다가오는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기다림 없이 우리는 누구를 사랑
할 수 있는가? 자유로운 시간과 휴식 없이 우리는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 새로운 생각은 게으름과 휴식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막 문이
닫히고 내려가기 시작하는 엘리베이터를 놓치게 된 것을 원통해 하지 말라. 또
는 뛰어가 막 떠나려는 버스에 올라타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 말라. 그대
가 시간을 잊어 버렸다고 생각했을 때 오히려 그대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게 될
때가 있음을 기억하라. 대합실은 놓친 기차를 기다리는 곳만이 아니다. 앞
으로 오게될 기차를 기다리는 곳이다.
오늘 아침 지렁이의 움직임을 보며, 소설가 이탈로 스베보(Italo Svevo)의 말
을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하루에 두 세시간 정도는 편안한 소파에서
지낼 권리가 있다...그리고 몸에 해롭지 않은 소주 한병을 깔 권리가 있다."
좋은 친구와 함께 한 술자리처럼 편안하고 즐거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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