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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ana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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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18일 00시 17분 등록

4월 1일...과장이 되었다.


어느 기업이나 마찬가지지만 승진의 사다리에는 그에 걸맞는 의무와 책임, 권한이 따른다. (군대 간 남자들은 모두 다 자신들이 특수 부대에 있었다고 애기하듯이 내가 있는 회사도 '과장 되기는 좀 힘들다'라고 애기하고 싶다.) 승진이 결정된 날 우리 부문의 중역은 나를 불러 축하 인사와 함께 이런 애기를 전해 줬다. '자네의 이번 승진에는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지금까지의 성과로 보면 자네가 최고지만, 지금의 자네는 자네의 예전 시절과 비교해서 당신 능력의 50%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라네. 의욕이 떨어져 있다고 보는거네. 지금부터가 매우 중요하네. 열심히 하게'


그들이 누군인지 안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지도 이미 안다. 그들에게 별다른 감흥은 없다. 다만 나를 엄습한 것은 '지금의 나'는 그 예전 '과거의 자신'과 경쟁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와 같은 이야기를 마음에 짊어지고 고객사 VIP 대응을 위해 해외 출장길에 나섰다.


U자 라인이 아닌 일자로 길게 늘어선 제조 라인... 이미 오래전부터 생산 효율화를 꾀하기 위해 공장 부지를 여유있게 준비했다는 애기다. 사람의 모습은 보기 힘들다. 간혹 지나가는 생산기술 담당자들... 그 제조 라인에는 로봇만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반도체 라인은 아예 그 로봇들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한 걸음, 두 걸음...라인을 따라 걸으며 내 발자국 수를 잰다. 성인의 평균 보폭은 0.7m...발자국 수와 보폭을 계산하면 대략적인 제조 라인의 길이가 나온다. 길이가 나오면 대략적인 투자 비용을 가늠할 수 있다. 로봇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생산 capa, 각 공정마다의 검사 항목, 라인 특징을 물어본다. 보틀렉은 없을까? 문득 책 한권이 떠 오른다. 이스라엘의 물리학자 골드렛은 지인의 부탁으로 생산 공장의 효율화를 주제로 한 The goal 이라는 소설을 써 제약조건이론을 세상에 알렸다.

자연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거의 대부분이 자동화되어 있는 제조 공장... 예전...나는 여기서 교외의 숲길을 걸을 때와 마찬가지로 감탄을 금하지 못 했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서 보면 꽃 한송이 한송이에도 감탄과 이야기가 있듯이 이 삭막해 보이는 곳에도 경이로움이 있었다.


그 예전의 제조 라인에 서서... 보고 있어도 보지 못 하고, 느낄려고 해도 느끼지 못 하는 것은 슬픔이다.




그날 밤 식사와 술, 새벽까지 이어진 보고서 작성을 마치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이곳의 호텔은 고급임에도 불구하고 방은 무척이나 좁다. 이 좁은 방과 회사일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최인훈 작가의 소설 중에도 이런 성향의 책이 있지 않았던가) 방은 작기는 하지만 하룻밤을 묶기에 지장이 없는 다양한 기능을 소화한다. 잠을 잘 수 있고 볼일을 볼 수 있고 텔레비젼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방의 주된 기능은 잠을 자는 것이다. 오죽하면 캡슐 호텔이라고 잠만 잘 수 있는 공간만 주는 호텔마저 있을까.


나의 일도 이 방처럼 주된 기능을 잘 소화해 내야 한다. 호텔에 있는 객실 하나로써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객실의 주된 기능인 잠잘 수 있는 침대와 같은 기능을 잘해내야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싱글룸은 싱글룸의 기능을, 스위트 룸은 스위트 룸의 기능에 맞게 룸으로서의 잘 해 내는 것이 첫번째 목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잘 하는 일을 특화시켜야 하고 그 일로 유토피아를 꿈 꿔야 한다.)


오늘 밤 고객사 차장님과 나눈 대화가 떠 오른다. '국내에서 잠시 보던 너와 지금 대응하는 너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열의가 틀려.' 아마도 나의 주요 Task 중에서 오늘은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을 본 것이고 예전에는 내가 가장 못 하는 일을 보고 하시는 말씀이리라.


어느덧 이른 아침이 다가오는 시점에 난생 처음으로 '일이 무섭다.'라는 생각에 소름이 끼친다. (한국에 있는 아내가 걱정하게끔(?) 애써 눈물 한방울 찔끔 흘리며 비싼 국제 전화로 안부를 전한다.)




귀국 후 오랜만에 학교로 향한다. 졸업이 다가오고 있다. 꿈을 찾은 것은 2009년의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그 꿈을 놓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여기까지 왔는데 졸업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내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게 즐거이 하던 이 공부가 노동으로 다가옴을 느낀다. 몸은 피곤하다.


이 생활에 지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편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편한 적이 있었던가라고 물을 정도로 내 상태는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럭저럭 시간에 맞추어 회사에 도착한다. (과거 엄청 일 할때는 지각 대장이었다.) 중요한 일 몇가지를 콕 집어 하다보면 하루가 간다. 퇴근하여 책을 읽거나 아내와 이야기 하다보면 어느새 곤히 잠자리에 든다. 편안하다. 하지만 오늘을 잘 보냈다는 개운함도 내일에 대한 흥분도 없다.


과연 편하기 때문에 그럴까? 편하기 때문에 지치는 것은 왠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왜 일상에 급속도로 흥미를 잃어가는 것일까? 변화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4시간'의 저자처럼 훌쩍 무인도로 떠나 버릴까? 세계 일주를 해 버릴까? ('어디 싹수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기꺼이 허하겠지만 당체 지금 당신의 상태를 봐서는...'라는 말과 함께 결국 아내의 재가는 받지 못 한다.)


어떻게 해야 이 앞뒤가 꽉막힌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다시 물어본다. 과연 편하기 때문에 이런 상태가 된 것일까?


출장 갔던 짐에서 우산을 꺼내다 벚꽃 하나를 발견한다. 출장 내내 현지에서 비가 왔는데 비에 떨어진 벗꽃 하나가 우산에 살포시 내려앉아 그 곳의 봄을 여기까지 전하러 왔나 보다.


초속 5 cm... 어느 에니메이션의 제목이기도 하고 벚꽃이 바람에 떨어지는 속도이기도 하다.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봄을 알리다 한 순간 지는 벚꽃... 많은 이들은 활짝 피어있는 벚꽃에 취한다. 지는 벚꽃에 취하는 이는 몇이나 있을까? 벚꽃에게 의지가 있다면 초속 5cm로 떨어지는 벚꽃은 무엇을 생각하며 떨어질까? 결국 떨어질 시기가 되었다는 순리를 따랐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내 우산에 어떻게든 내려앉자 여기까지 따라 올려는 욕심이 있었을까? 


욕심...내 욕심은 무엇인가? 떨어지며 나를 따라가고 싶다는 벚꽃의 욕심보다 내 욕심은 소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욕심이 욕심을 낳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거의 나를 버리지 못 하고 경쟁할려고 하고, 꿈을 꿈으로 바라보지 못 하고 내 앞에 있는 것들은 무엇이 되었든 잘 해 낼려고 하는 나... 욕심에 가득차 있는 나... 그 섣부른 욕심이 나를 지치게 한다. 서둘러 가본 미래에 꿈이 아닌 욕심을 심고 키워내고 있다. 욕심을 내려놓기란 싶지 않다. 이미 내 꿈과 뒤범벅이 되어 나 스스로 쉽게 구별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운이 좋다. 내게는 꿈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있고 시간이 있다. 그네들과의 특별할 것 없는 (?) 어울림 속에서 나는 다시 꿈과 욕심을 구별해 낼 수 있으리라. (위와 같은 깨우침을 진작에 대화로 알려준 아내에게 감사하는 바이다.)



4월 28일...꿈벗 소풍... 나는 그 시간, 그 곳, 그 사람들이 있는 간이역으로 향한다.



IP *.206.92.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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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8 06:20:19 *.116.114.90

현명한 아내가 옆에 있으니 행복하겠습니다. 꿈의 발목을 잡고 있는 욕심을 지적하기는 사실상 무척 어렵습니다.

배울 수 있는 꿈벗의 글이 있어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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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8 09:30:03 *.136.209.2

짧은 글 속에 풀어놓은 이야기이지만 꽤나 좌충우돌 하고 있습니다.

많은 꿈벗들의 글을 통해 저 역시 많이 배웁니다. ^^ 

오늘 하루도 홧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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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8 07:01:18 *.10.140.23

그대가 누구일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____^

 

간이역에서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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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8 09:30:34 *.136.209.2

ㅋㅋㅋ

 

개봉박두~~~입니다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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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8 12:51:22 *.169.188.35

사진을 다운로드 받아서 확대해봐도.

얼굴은 알 수 없네요.

 

그런데 짚이는데가 좀 있어 

혹시 내가 알고 있는 그대이신가요..

 

결혼 몇년차인지만 힌트를 줘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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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8 13:23:45 *.231.52.2

작년에 결혼했으니 결혼 2년차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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