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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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 하는 밤-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한 번 이상은 만나게 되는 스승님, 그 스승과 제자에 관한 이야기를 오늘 나누고자 합니다. 조선시대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학자인 다산 정약용. 그에게 ‘삶을 바꾼 만남’을 이룬 제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황상 (黃裳, 1788-1870)입니다.
다산의 제자 황상에 대한 이야기는 한양대학교 국문학과 정민 교수가 지은 책 <삶을 바꾼 만남> 이라는 책에 자세히 소개가 되어있습니다.
다산이 천주교인 사학 죄명으로 유배를 받게 되어 강진으로 옮겨간 뒤, 유배지에서 황상은 다산의 문하생이 되었습니다. 지역 유지들이 자신의 자녀들을 서울에서 온 다산에게 공부를 배우도록 한 것은, 다름 아닌 과거시험에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황상은 아전의 아들로 태어나 과거시험을 볼 기회조차 부여잡지 못한 인물이었지만, 다산의 가르침을 받아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였습니다.
다산 정약용이 돌아가시고 나서 꿈에서 다산을 보며 쓴 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5년 전에 돌아가신 스승을 가슴속에 그리며, 늘 한결같이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려했던 제자 황상. 그는 어느 날 꿈에서 스승을 뵙게 됩니다. 그리고 지은 시가 바로 오늘 나눌 <몽곡(夢哭)>입니다. (이 시는 <삶을 바꾼 만남 450페이지에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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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선생님 꿈꾸었는데
나비되어 예전 모습 모시었다네.
나도 몰래 마음이 몹시 기뻐서
보통 때 모시던 것 다름없었지.
수염 터럭 어느새 하얗게 세고
얼굴도 꽃다운 모습 시들어.
아미산 눈 덮인 산마루 아래
천 길 높은 소나무가 기울어진 듯.
천행으로 이런 날 은혜롭구나
백 년에 다신 만날 기약 어렵다.
예전에도 꿈에서 뵌적 있지만
이처럼 모시긴 처음이었네.
술과 국, 찬 음식 제사장에는
제사 음식 이리저리 놓여있었지.
나는 실로 찬찬히 보지도 않고
두 기둥 사이에서 절을 올렸네.
무릎 꿇고 조아려 애도하는데
곡소리가 먹은 귀를 놀라게 했지.
마음에 품고만 있던 생각이
그제야 겉으로 드러났어라.
때마침 옆 사람 흔들어 깨워
품은 정 다하지 못하였구나.
애도함 이보다 더는 못하리
아마도 세상이 끝난 듯 했네.
목이 메어 말조차 떼지 못하고
헛된 눈물 주룩주룩 흘러내렸지.
꿈에 곡함 아침에 누가 알리오
모습은 내 누누에 여태 선한데.
시 지어도 누구에게 평을 청하며
의심나도 여쭙던 일 생각만 나네.
추모의 맘 한가할 날이 없으니
영령께서 내 충성됨 환히 아시리.
지난날 향 사르던 자리에서는
백 척의 오동처럼 우러렀다네.
못나고 둔한지라 얻은게 없어
못이룸이 삼대밭의 쑥대 같구나.
선생의 문도라기 이름 부끄러
소와 양에 뿔조차 없는 격일세.
한마음 순수하긴 처음과 같아
잠자리서 전날 공부 펼쳐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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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 나날은 선생님과의 추억 속에 늘 함께 있습니다. 깨어있는 매순간 선생님 생각만 합니다. 이런 못난 제 마음 만져주시려고 꿈에 잠깐 다녀가셨군요. 아무 이룬 것 없어 선생님 제자라 말하기도 송구하지만, 부끄럼 없이 살겠습니다. 떳떳하게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오늘, 저는 구본형 선생님께 제자 황상의 마음을 빌어 같은 목소리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보통의 선생은 그저 말을 하고, 좋은 선생은 설명을 해주고, 훌륭한 선생은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위대한 스승은 영감을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선생님에게서 사상가로서의 모범을 보았고, 어두운 길 위에 뿌려진 달빛 같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한없이 모자라는 사람이지만 선생님은 제게 책과 지식에 대한 열망을 품게 해 주셨습니다. 마치 선생님께서 길현모 선생님이 인생의 중요한 길목마다 거기에 계셨듯이, 황상에게 다산 정약용 선생이 늘 그렇게 있었듯이, 저에게는 구본형 선생님께서 나와 늘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갈림길과 모퉁이를 돌아 설 때 마다 제 스스로에게 물어 보겠습니다.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삶의 중요한 순간 마다 저는 이 질문을 꼭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길을 즐기며 걷겠습니다. 저는 너무도 분명히 훌륭한 선생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고 만질 수 있는 행운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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